겨울아침

오늘따라 게으른 공사판 일꾼들은 보이지 않고 먼동 빛 조차 차가운 아침.

새들은 살을 에는 바람과  밤새 싸우며 날아 이 아침을 맞은 것일까? 아님  시린 아침에 서둘러 길 떠나는 것일까?

무심하게 가게 문을 열다.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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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 하루

때론 기막히게 들어맞기도 하지만 종종 호들갑으로 끝나곤 하는게 일기예보다. 어찌 딱히 일기예보 뿐이랴! 내일이란 늘 열려 있어야 사는 맛이 더하는 법이니, 무릇 예보(豫報)란 그저 준비하라는 지시어로 족하다.

일기예보 덕에 단단히 준비하고 맞은 아침, 예보의 호들갑에 비해 눈은 2인치가 조금 넘게 내렸을 뿐이었다. 눈을 치우려 나갔더니 날씨는 생각보다 꽤 추웠다. 집안으로 돌아와 방한복을 찾다가 눈에 들어 온 스웨터 조끼와 자켓에  오 륙십 년 전, 그 시절에 잠시 빠졌었다.어머니가 짜 주셨던 스웨터와 조끼를 참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는 내가 잠시 대견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땐 참 추웠었다. 어머니는 그 추위에 넉넉히 견딜 수 있도록 두툼하지만 결코 투박하지 않게 멋을 내어 조끼와 스웨터를 짜 주셨다.

글쎄? 내가 몇 번이나 입었을까? 한 땀 한 땀 당신의 잠을 줄여가며 짜 주셨을 옷을 입었던 기억은 거의 없다. 십대 후반을 넘겨 이십 대로 접어 들  무렵 헛 꿈에 들 떳던  내게 어머니의 정성은 늘 뒷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여도 2022년 그 옷들을 바라보고 있는 내가 일견 대견스럽다는 생각에 부끄럽진 않다.

어머니는 그렇게 오늘도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후배 양정용선생. 그를 안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와 단 둘이 밥을 먹거나 술 한 잔 나눈 사이도 아니다. 살아 온 이야기나 사는 이야기를 깊이 나누었던 기억도 없다.

필라세사모(세월호를 기억하는 필라델피아 사람들의 모임)을 통해 그를 만났고, 일을 통한 이야기를 간간히 해 왔던 사이이다.

모를 일이다. 그를 바라는 내 시선은 늘 애틋했다. 나와는 나이 차이도 제법 있고, 삶의 경험과 서로의 삶의 자리에 대한 인식이 서로 다른 점도 있었으니, 어떤 일에 대한 접근 태도와 이해가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그에게 나는 애틋함을 느끼곤 했다.

딱 열흘 전 일만 해도 그렇다. 그는 일어난 현상에 대한 반응에 순수했고 나는 노회한 편이었다. 아주 짧은 논쟁도 아니고 그저 의견 교환이 끝이었다. 그는 다시 거리에 섰고, 나는 일상에 충실했었다.

그러다 들은 그의 소식이다. 그는 오랜 동안 투병생활을 이어오고 있었다. 이즈음 들어 꽤나 회복 되어가는 모양새여서 참 좋았다. 그런 그가 갑작스런 병원행을 하였는데 의사들이 그만 손을 놓았단다.

아직 그의 나이 오십 대인데…

후배 양정용선생. 나는 그를 깊이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살아 온 시대와 환경은 알고 이해하며 살려고 애쓰는 편이다.

양정용선생.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저돌적인 그의 순수함은 오래 살아 있을 것이다, 내 안에.

기적을 비는 마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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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종말론적 삶이란 기억과 예보에 귀 쫑긋 세우고 사는 하루 하루가 아닐까?

눈 내린 날에.

욕심

어제나 오늘이나 욕심의 끝은 없다. 그 욕심 쫓다 보니 일이 제법 커졌다. 애초 부엌이나 조금 손대어 고쳐 볼 요량이었는데 그만 일이 커져 버리고 말았다. 다 버리지 못한 욕심 탓이다.

그렇게 시간에 쫓기다 맞이한 새해 첫 날, 장기 요양 시설에 계시는 아버지와 제법 긴 시간을 함께 보냈다. “이젠 말하기도 힘들고 귀찮다”고 하시는 아버지는 “아버지, 오늘은 정월 초하루… “라는 내 말에 “정월 …초하루, 정월… 초…하루…”를 몇 번 되뇌이셨다.

올해는 호랑이해, 1926년생 내 아버지가 여덟 번 째 맞이하시는 호랑이해이다. 두어 달 후면 꽉찬 만 아흔 여섯, 우리 나이 아흔 일곱 그야말로 백세 나이가 욕심이 아닌 아버지를 생각하다.

내가 세탁소를 막 시작할 무렵이었다. “얘야! 이 동네 이름이 Newark이구나. 여기가 너의 새 방주(New Ark)가 되길 바란다!” 따져보니 그 말씀을 하셨을 때의 아버지의 나이보다 지금의 내 나이가 훨씬 많아졌다.

그리고 오늘 아침 동네 뉴스. 거의 대개의 뉴스들이 어둡다만 오늘자 News Journal도 크게 엇나가지 않는다.

델라웨어 공중보건국(Delaware Division of Public Health)은  지난 주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 수가 급증했으며 지난 수요일에만 하루 3381명의 확진자가 발생하는 등 Covid 팬데믹 이후 가장 높은 수의 감염자가 생겼다고 하였다. 또한 John Carney 주지사는Delaware주는 1월 3일 월요일부터 비상사태에 들어가고 정부가 운영하는 건물에 일반인 출입을 금한다는 발표하였단다. 모처럼 활기를 띠었던 UD(델라웨어 대학교) 겨울 학기도 전면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 한단다.

날씨는 예년에 비해 따듯하지만, 새해 첫 뉴스는 몹시 춥고 어둡다.

곰곰 이제껏 내가 맞아 온 새해 아침을 돌아본다. 아버지에게 들었던 새해 경험들도 되새겨 본다. 더하여 오래된 옛사람들이 남긴 새해 격언들도 새로 새겨본다.

그렇게 다시 만난 내 아버지에 대한 기억.

언제 어디서나 사람사는 세상에는 New Ark(새 방주)은 반드시 준비되어 있다는 생각을 해보는 새해 첫날 늦저녁,  아주 오래 전 옛사람의 말 한마디 되새겨 새해 욕심을 품어 본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2022년, 새해 나와 이어진 모든 사람들이 함께 누리는 하느님 나라를 꿈꾸어 보며. 이런 꿈의 욕심은 끝이 없어도 좋겠지.

어제 밤, 아내와 함께 한 공원 풍경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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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 동정

‘한복 동정을 달아 줄 수 있나요?’라는 문의 전화를 받은 아내는 “참 별일이 다 있네”라고 했다. 그리고 백인 아주머니 한 분이 한복과 동정을 들고 내 가게 문을 들어선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였다. 그녀는 친구에게서 선물 받은 것인데 연말에 입으려 하니 동정이 너무 낡아서 바꾸려 한다며 한복을 맡기고 갔다. 그녀는 명확히 “Hanbok Collar”라고 했다.

삼십 년 넘도록 세탁소 하면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세탁소를 하며 보낸 세월만큼 아내의 주말 한국학교 선생 일도 이어져 왔다. 이즈음 아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모두 성인이고 한국계가 아닌 영어권 미국인들이다. 한국드라마나 K-pop에 홀려 한국어를 배우는 이들이다.

왈 격세지감(隔世之感)이라고. 잠깐 흐른 듯한 세월인데 참 많이 변했다.

경외(敬畏)에

어찌어찌 어릴 적 벗의 연락처를 얻었다. 살다 보니 서로 얼굴 본지 수십년이 흘렀다.

카톡으로 몇 자 적어 안부 인사를 나눈 뒤 video call로 얼굴 보며 한참 동안 사는 수다를 떨었다. 아들들과  며느리 손주와 함께 한 사진 속 벗의 얼굴엔 영락없는 그의 아버지가 웃고 있었다.

“참 좋은 세상이다. 이렇게라도 얼굴 볼 수 있으니…”그와 내가 거의 동시에 한 말이다. 한땐 우리도 참 모던한 진보 흉내 내던 시절도 있었건만.

어제 밤 일인데 오늘까지 옛 벗 생각이 이어진다. 멀어진 시간들이 오늘에 닿아 있음을 깨닫는 순간 삶은 그저 경외다.

며칠 전 아내의 생일, 새삼스레 내 삶 속에 가장 가깝고 오랜 길동무에게 감사와 미안함을 느껴보다. 삶의 경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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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

작지만 더할 나위 없이 큰 감사가 넘친 올 추수감사절 연휴는 내 삶 속에 누린 큰 축복  중 하나일게다.

이제껏 살며 내가 선택했던 몇 안 되는 옳은 판단 가운데 하나, 어쩌면 으뜸으로 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드는 것인데 바로 가족들을 위해 한 끼 밥상을 준비하는 일이다.

모처럼 집에 온 아들 딸 내외와 함께 준비하고 나눈 밥상에서 누린 행복의 크기는 가늠할 수 없을 만치 크다.

감사의 절기를 따로 정해 둔 옛 사람들의 지혜는 가히 밝다.

누리는 행복을 곱씹게 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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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에

엊그제가 봄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가을도 저물고 아침이면 두꺼운 옷을 찾는 계절이 되었다. 이것 저것 한 해를 마무리 해야만 하는 일들과 다가오는 새해를 준비할 일들로 이렇게 저렇게 머리 속 생각들이 많다. 너무 빨리 지나간 시간들 속에 쌓인 후회와 부끄러움도 많고, 다가 올 시간에 대한 염려와 걱정 또한 함께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오는 한 주간은 할 수 있는 한 넉넉한 마음을 가지려고 한다.  할 수 있는 능력 안에서 최대로 넉넉하고 단순하고 더하여 여유롭게 보내려 한다. 추수감사절이 끼인 한 주간이기 때문이다.

그저 바쁘게 곱씹어 보고 싶은 것들은  감사다. 지난 시간들 속에서 찾아내야 할 감사들과 오늘 내가 누리면서 모르고 있는 감사들 그리고 내일을 꿈꿀 수 있는 조건들에 대한 감사까지 누려 볼 생각이다. 감사는 누구에게 주는 것 이전에 내가 누리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감사절을 앞두고 무겁게 쳐진 가지들로 버거워 하는 옆 뜰 전나무들 무게도 덜어 주고, 겁 없이 하늘 높이 재려는 양 치솟는 뒤뜰 언덕배기 나무들을 맘 먹고 몽땅 베어 내었다.

무릇 감사란 누리고 있던 것들을 베어 내고 난 자리에서 더 크게 자라는 것이 아닐까?

다시 봄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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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들

올해 잔디 깍기는 마지막이 아닐까? 기온이 가파르게 떨어지며 가을이 깊어 간다. 잔디를 깍으며 스쳐 지나가는 지난 생각들 위에 넘치는 감사를 맛보다.

“한 이태만에 아범이 돌아왔는데 거지도 거지도 그런 상거지가 없었단다.”  외할머니가 큰외삼촌의 젊은 시절을 기억하시며 손주들 귀에 딱지가 앉도록 하셨던 말씀이다.  한국전쟁 당시 국민방위군으로 끌려 가셨다 두어 달 만에 피골이 상접한 채로 집으로 돌아오셨던 내 큰외삼촌에 대한 외할머니의 기억은 돌아가실 때 까지 이어졌다. 두 어른 모두 떠나신 지 오래된 이야기다만.

“이눔아! 넌 내 덕에 사는게야!” 어머니가 내 젊은 시절을 기억하시며 내 귀에 딱지가 앉도록 하셨던 말씀이다. 1980년 오월,  늦깍이 복학생이었던 나는 특별하게 무슨 한 일도 없었건만 계엄사 합수부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했었다. 그해 오월과 유월은 아직도 내 기억속에 아픔으로 남아있는 세월이다. 돌아가실 때까지 잊을 만하면 어머니가 되뇌이셨던  “아눔아! 넌 내 덕에…”하실 때면 나는 그저 웃었었는데, 어머니는 그런 내 웃음을 아주 못마땅해 하셨었다. 그 어머니 떠나신 지도 어느 새 두 해가 가까워 온다.

그리고 어제 정말 모처럼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 짧은 저녁 시간을 함께 했었다. 필라 세사모(세월호를 기억하는 필라델피아 사람들의 모임) 벗들이다. 다들 먹고 사는 방법들(직업)도 다르고 주관심사도 다르지만 기억하며 살아야 할 것들을 공유하며 하나로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참 좋은 이웃들이다.

이민자들의 권익, 소수민족들 사이의 연대, 도시빈민들에 대한 관심, 열악한 노동조건들에 대항하며 싸운 노동조합, 미국내 만연한 총기사고에 대한 안전 방안, 한반도 통일에 대한 염원 등등 잊지 않고 기억하며 아주 작은 일이라도 해보자고 애쓰는 이들이다.

“왜? 그 어린 아이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생중계로 만인이 보는 순간에 손 하나 제대로 쓰는 노력을 볼 수 없었는가?” 그 기억을 잊지 말고 그 까닭을 밝혀보자는 뜻에 지치지 않는 참 좋은 친구들이다.

이미 서늘해진 날씨건만 잔디를 깍다 보니 등에 땀이 배었다. 그렇게 내 맘속에 배어 나는 감사였다.

이 나이에 만나 즐거운 참 좋은 벗들이 있음은 내 삶이 누리는 정말 큰 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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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껍(식겁食怯)

그야말로 씨껍(식겁食怯) 했던 저녁 한 순간이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우체통에 메일을 집어 들고 집안에 들어와 보니 세무서(IRS)에서 보낸 편지가 있었다. ‘웬 IRS?’하며 뜯어본 봉투 속엔  내겐 어마 무시한 금액의 세금을 부과하는 서류였다.

내용인즉은 2019년 그러니까 삼 년 전에 내가 보고한 세무보고가 실제와 달라 나름 지(IRS)들이 알아보니 내가 누락한 보고가 있어 추적해 본 결과 이에 대한 세금 7만 2천여불의 세금을 내야한다는 것이었다.

고된 일 마치고 돌아와 밀렸던 시장기가 싹 가시는 편지였다.

그들이 보낸 메일을 꼼꼼히 따져 볼 필요도 없이 훅 훑어보다가 그냥 웃고 말았다.

도대체 공무원들이란?

예나 지금이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쩌겠나? 나는 한 동안 내 정말 아까운 천금 같은 시간을 이 멍청한 공무원 시스템 또는 공무원들과 씨름할 밖에.

이건 싸움도 아니고.  아무튼 한동안 쓸데없는데 아까운 내 시간을 들여야만 할 듯.

내 아까운 시간을 뺏는 이 멍청한 놈들에게 몇 푼 안 되지만  내 세금이 쓰인다는 것 조차  불쾌한…

공연히 식겁했던 저녁에.

달(月)

아직 서리도 내리지 않았는데 오늘밤 최저 기온이 32도(0도)란다. 그러고보니 이른 아침 일터에서 만났던 달도 추워 보였다.

아무리 차고 기우는 것엔 끝이 있으면 시작이 있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고 하지만 그 수를 헤아리는 사람의 시간은 명확한 마침이 있어 서늘한 법.

달이 차고 기움을 느끼는 오늘을 누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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