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에

<아우슈비츠에 갇힌 유대인 집단이 신을 재판에 회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들은 신을 잔혹함과 배신으로 기소했다. – 중략- 그들은 신의 유죄를 선고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랍비가 신의 유죄와 사형 선고문을 발표했다. 그런 후 눈을 들어 재판이 끝났다고 말했다. “이제 저녁기도 시간입니다.”> – 카렌 암스트롱의 <신의 역사>에서


노동절은 공식적으로 여름이 끝나는 날. 그 공식적이라는 말을 비웃듯 따가운 햇살이 내려 쪼이는 기록적 더위가 이어진 연휴였다.

여러날 찔끔찔끔 책장을 넘기던 카렌 암스트롱의 <신의 역사> 정독를 마치며 연휴를 보냈다. <축의 시대>, <마음의 진보>에 이어 읽은 그녀의 세 번째 책인데 이번에도 진하게 남는 말 한마디 ‘compassion’이다. 역자는 이를 ‘동정심’이라고 했다만 카렌이 그 말에 담고 있는 의도는 사랑, 자비, 공감, 연민 등등의 말을 녹여내어 쓴 말 같다.

읽다가 혼자 실없이 낄낄거린 대목이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제 머릿속 생각의 크기만한 신을 믿고 산다.”는 이젠 굳어진 내 고집을 더욱 공고히 한 것이었는데 바로 이 대목이다. -<아일랜드의 사도 성 패트릭의 유명한 기도문 구절. ‘신이 내 머리와 내 이해 안에 있게 하소서.”>


올해 팔순인 카렌 암스트롱과 비슷한 연배의 내 선생이자 신앙의 선배이며 내 삶 속에서 만난 숱한 인연들 가운데 묵직한 끈으로 이어진 이가 있다. 호주에 계신 홍길복목사님이다. 무엇보다 사십 년 함께 살아 온 아내와의 연을 맺게 된 탓(또는 덕?)의 빌미를 제공한 이가 그였으며, 비록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은 참으로 짧았지만 그로 인해 내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신앙의 선생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 들어 가며 꾸는 꿈이 하나 있었다. 사오 십 년 전, 아내와 내 친구들이 십대 이십대 였던 나이에 삼십 대 청년이었던 홍목사의 설교를 들었던 시절을 다시 재현해 보는 꿈이었다. 그저 단지 꿈일 뿐이었다. 다들 그렇겠지만 나 또한 그 때의 신과는 사뭇 다른 신과 이야기하며 지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는 호주에 나는 미국 시골에 아내와 내 친구들 역시 고향 신촌을 다 떠나 있을 터. 그저 꾸어 보는 꿈이었다. 이른바 헛 꿈.

아직은 그런대로 정정하게 누워 계신다만 아흔 일곱 아버지 덕에 먼 길 나들이 나설 엄두가 나질 않았는데 이런저런 연유로 서울 나들이를 작심한 것은 몇 주 전일이었다. 그리고 아마 그 이틀 후 였을 게다. 홍목사의 서울 나들이에 맞추어 옛날 그 친구들이 고향 신촌 그 교회에서 함께 예배를 드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아뿔사! 우리 내외 일정과는 맞지 않았다. 목사님과 우리 내외 일정이 겹치는 시간은 단 이틀 뿐이었다. 목사님께 아쉬움을 전하는 소식을 드리자 그가 전해 온 말이었다. “이틀 중 시간 조율해서 서울서 한번 만납시다.어쩜 이제 부터의 만남이란 늘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말이죠.”

그리고 오늘 아침 아직 신촌을 지키고 있는 옛 친구가 전해 온 말. ‘교회와 여러 삶의 사정으로 인해 홍목사님을 모시고 드리는 예배는 일정이 바뀌었다.’는 소식. 그 바뀐 일정은 바로 목사님과 우리 내외 일정이 겹치는 이틀 중 하루.


해가 따갑고 뜨거워도 여름은 이미 아니다. 가을 볕이다. 그 볕에 이틀 간 널어 둔 호박이 정말 잘 말랐다.

  • 작고 마른 모습이야 타고 난 것, 그게 내 삶을 버텨 준 또 하나의 힘이었는 지도 모를 일이고. 그래도 머리카락은 까매서 그 또한 누리는 복이다 했는데… 엊저녁 느긋한 마음으로 거울 앞에 서니 며칠 사이(?) 반백이로세.
  • 제 아무리 백세 시대 운운해도 이젠 신의 은총을 곱씹어야 할 나이.  ‘compassion’과 함께. 무릇 “사랑, 자비, 공감, 연민, 동정심”이란 함(행위)이 뒤따라야 한다는 …

바른 늙음을 위하여. 은총에.

외식

어찌보면 나이 들어 늙어 간다는 게 별게 아니다. 그저 습관이 된 일상조차 버거워 지는 순간, 내뱉는 말이다. ‘에고 이젠 나도 늙었고만…”

아내가 저녁 밥 준비를 하느랴고 긴 기지개와 하품을 물고 부엌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고 넌지시 건낸 말, “나가서 먹읍시다.”

두 내외 한끼 먹을 밥상거리야 늘 차고 넘쳐 감사이다만, 때론 밥상 차리는 일조차 귀찮은 사치를 누려 보고픈 욕심으로 던져 본 말이었다.

그렇게 찾은 동네 식당.

밥 맛이야 어찌 집에서 해 먹는 맛을 따르랴만, 한 주간 밀린 피로를 씻은 참 좋은 외식이었다.

마침 노동절 연휴가 시작되는 첫날 이기도 하여 조금은 느긋한 여유가 생긴 탓이었는지 제법 시끄러운 실내 음악이 거슬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진 드럼과 전기 기타와 함께 이어진 생음악들, 음악에 문외한인 내 귀에도 익은 1970년대 Rock and roll이었다.

뒤뚱 거리는 걸음으로 밴드 앞에서 소년 소녀가 되어 춤을 추는, 비록 몸 크기야 내 두세 배는 족히 되겠지만 나이야 엇비슷할, 늙은 청춘들을 보며 나도 어깨 들썩이며 그들과 함께 청춘이 된 저녁이었다.

엉덩이 들썩이며 일어나려고 하는 아내를 달래고 돌아 오는 길, 혼자 속으로 되뇌어 보는 말 – ‘늙는 게 별 거일까? 그저 일상에서 어쩌다 만나게 되는… 마치 어느 날 문득 만나게 되는 거울 속 내 모습처럼.

그 노인

어느새 스무 해 가까이 흘러간 일이다. 그 노인을 만난 곳은 워싱턴 부근 그의 집에서 였다.

쉰 나이를 넘길 무렵 나는 헛바람이 단단히 들어 뉴욕에서 워싱톤 까지 뻔질나게 오가곤 했었다. ‘아무리 이민이라지만 세탁소에서 내 인생을 다 보내다니…?’라는 물음으로 시작된 헛바람이었다. 그 헛바람은 내 인생 또 하나의 굵은 실패 자국만을 남긴 채 두 해만에 꺼졌다.

아무튼 그 무렵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만났었다. 제법 성공해서 정말 어마어마한 부를 이룬 사람부터 노숙인으로 거리를 헤매는 사람, 숱한 사(師, 事, 士)자 직업군들에서 부터 영어 한마디 쓰지 못하는 사람, 워싱톤 정가는 물론 남북한 고위 관리부터 허망한 헛 기세에 쩔어 사는 사람들 까지, 물론 나처럼 헛바람에 혹 하지 않고 작은 생업에 충실한 이민들 까지 정말 다양한 계층의 여러 사람들을 만났었다.

비록 그 때 그 헛바람의 후유증으로 오래 참 아프게 앓았었다만, 돌이켜보면 그 시절이 아둔한 나를 깨우는 신의 은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지니며 산다.

아무튼 그 무렵에 만났던 그 노인의 이야기.

이북에 고향을 둔 그가 38선을 넘어 이남으로 넘어 온 때는 남북의 경계가 제법 심해진 1948년 가을 즈음이었단다. 그 남하길에서 그는 가족을 하나 잃었단다. 그리고 터진 한국전쟁. 남하 후 포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노인은 이른바 ‘포항 전투’로 잘 알려진 전장에 학도병 막내로 참전하였단다. 71명의 학도병 중 47명이 전사하고 4명이 실종되었으며, 13명이 포로가 된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노인은 어찌어찌 이민을 와서 주류 판매업을 하며 일가를 이루고 살았다.(나는 노인의 긴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몇 차례 그의 집을 찾았었고,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 녹음 테이프에 그의 이야기들을 담아 그 테이프들을 전해 받아 보관하고 있다.)

아무튼 그 노인에게는 이북 빨갱이 놈들은 철천지원수였다.

그리고 1980년 광주 학살을 끝낸 전두환이 미국을 처음 방문 했던 때 전두환을 규탄하는 재미 동포들은 그에겐 쳐 죽여야 할 빨갱이들이었단다. 그래서 노인은 재미 동포들을 규합해 ‘전두환 대통령 방미 경호단’을 자비로 조직하고 경호대장을 자처했단다.(당시 뉴욕에서 그 발대식과 함께 기자회견을 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나를 만나서 이야기를 할 때엔 노인은 그 일을 매우 부끄러워 했었다.(그의 이야기와 기록에 따르면 그 무렵 노인은 당시 전두환의 최측근 이자 이른바 쓰리 허(許)중 한 사람과 매우 밀접한 관계였던 듯 하여, 그의 행위가 자발적이었다는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만 그 무렵 그가 매우 부끄러워 한 것은 내가 느끼기엔 진심이었다.)

노인은 이야기를 다 남기지 못한 채 지병으로 세상을 떳다.

이즈음 한국 뉴스들을 보며 답답한 마음으로 떠올려 본 노인 생각인데 내가 어느새 그 때 그 노인의 나이 즈음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하며 덧붙였던 말,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나 차고 넘친다. 이즈음 한국 뉴스들을 보면.

차라리 삶의 마지막 순간에 부끄러워 했던 그 때 그 노인은 위대했다 라고 할까…

  • 참 좋은 이웃이고, 만나면 웃지 못할 사이가 전혀 아닌데 윤석열을 찍었거나 지지한다는 이들을 보면….  참 아프다.
  • 꽃과 새들에게서 희망을 찾는 까닭 – 바로 부끄러움을 아는 밑바탈 사람(내) 마음 깨우치는 신이 주신 도구들이므로.

스마트폰

이젠 스마트폰 없이는 살 수 없는 듯한 세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마트폰은 내겐 여전히 낯설다. 그만큼 세상 변화를 쫓아가는 내 모습은 더디고 때론 삶의 불편함을 묵묵히 견뎌 내야만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물론 열심히 변화에 적응하려고 애쓰기는 한다만, 그 애씀이 지나치면 노년의 과욕이라는 생각으로 적당한 뒤처짐도 자연스런 일이라는 생각으로 산다.

사실 내 일상에서 스마트폰이 없다고 불편할 일은 거의 없다. 그렇게 시간 다투며 살아갈 일도 없거니와, 다행으로 가족이나 이웃들과의 연계의 끈을 수시로 확인해야 안도할 수 있는 궁박한 처지는 면하고 살 수 있는 감사함 때문이다.

문제는 집을 떠나 있을 때다. 특별히 변화가 빠르게 일어나 옛 기억으로는 적응할 수 없는 대도시 이거나  처음 찾은 곳에서 만나게 되는 낯선 환경이다. 이른바 키오스크(kiosk)라는 무인 단말기 앞에 서게 되거나 앱(App)을 통해 정보를 주고 받아야 하거나 돈 결제를 해야 할 일이 생길 때 일시 난감해 지는 노인이 될 때이다.

딸아이를 만나러 뉴욕에 갈 때면 아이는 나를 물정 모르는 시골 노인으로 알고 다 알아서 챙겨 준다. 속으로 혀는 차지만 이젠 그게 편해 나는 아무 말 않는다.

그리고 내 좋은 친구 한 사람.

한 두어 주 전이었다. “여름도 다 가는데 땀 흘려 걷고 신나게 먹고 그렇게 하루 함께 보냅시다!”라는 그의 권유로 어제 나섰던 길.

참 좋은 하루였다.

그간 살며 숱하게 지나고 오간 길목, 미처 가보지 못한 낯선 곳들에서 넉넉하고 여유로운 하루를 즐겼다. 그리고 친구의 손에서는 거의 온종일 스마트 폰이 떠나질 않았다. 그것이 우리들의 안내자였으므로.

좋은 친구 앞에서도 나는 먼저 노인이 되었다.

돌아오는 길, 뒤늦게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고생했다가 엊그제 음성 판정이 나온 딸아이가 짧은 메세지와 사진들을 보내왔다. 내 스마트 폰으로.

달포전에 사위와 딸이 내 집에 왔을 때 함께 했던 사진들과 어제 함께 했던 내 길동무들의 안녕을 비는 마음과 함께. 스마트 폰으로.

그렇다. 이젠 변화에 두려워 할 나이도, 더딘 적응에 부끄러워야 할 나이도 아니다.

그저 내 삶의 속도에 맞추어 가까이 두고 즐길 수 있으면 좋은 스마트 폰이라는 장난감 하나에 대하여.

*스마트폰 없어도 서로 통할 수 있는 참 좋은 친구들과 보낸 하루에 대한 감사로.

진실에

얼굴 뵈온 지가  십 수 년이 된 사촌형님이 책을 내셨단다. 흔히 노년기에 혹하기 쉬운 자전적 이야기쯤 이겠거니 했는데 자그마치 단편소설집을 내셨단다.

‘현직 의사의 메디컬 미스터리 단편집’이라는 소개 글이 덧붙여 진 소설 <몽상가의 침묵>을 단숨에 읽었다. 단숨이라고 했지만 내 통상의 독서 속도로 보아 거의 세 배의 시간을 보냈다.

의학적 지식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사람의 몸에 대한 내 앎의 수준은 오래 전에 돌아가신 내 할아버지만도 못한지라 형님이 꼼꼼히 달아 놓은 주석과 책 뒷장에 덧붙여 놓은 정답 대조표 같은 집필노트를 번갈아 읽어야 했기 때문이다.

허나 비록 유기체로써의 인간 몸에 대한 이해 능력은 떨어지지만, 내 나름의 맘 곧 정신에 대한 깨달음은 나름 자부를 지닌 터(그래서 아직 유년이지만…). 그리 읽다 보니 사람의 몸과 맘이 결코 떨어진 게 아니라는 깨달음은 이 소설에서 얻은 첫 이득.

필시 자전적 이야기인 듯 싶은 ‘몽상가의 침묵’과 ‘오래된 이야기’는 의사로서의 고뇌와 직업에 충실하였던 삶의 자세에 대한 되새김인데 사뭇 처절하게 다가왔다.

이 책의 중심 이야기인 <아폽토시스(apoptosis)>는 그야말로 추리소설이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지난 몇 년 사이 겪어 낸 이야기다. 하여 단숨에 읽힌다. 아니 겪어 낸 것이 아니라 겪고 있는 사건이다. 나와 아내 그리고 아들이 감염 되었던 그리고 바로 오늘 뒤늦게 딸아이가 감염되어 앓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그렇다.

침묵에 대한 물음은 오늘 내가 마주하고 있는 세상 뉴스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전염병이 우연과 필연이 맞닿아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우치는 이야기는 가히 종교적이기도 하다.

읽으며 내가 밑줄 쳤던 몇 개 문장들이다.

<풀밭 세상에서는 번식과 죽음의 질서가 존재하고 있었다.>

<동물 세포에 적응 된 바이러스가 우연히 인체 감염에 성공한 후 인간 세포에 적응하게 되면 인간계의 전염병이 되어 사람들끼리 전염이 일어난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과거에도 존재했고 앞으로 존재할 미래가 침묵으로 인해 과거가 반복된다면 그들이 소유한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과거를 기억하는 이유는 과거의 경험을 통해 미래를 예측하는 사고 과정에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인간을 병들게 한 것은 바이러스였지만 도시를 병들게 한 것은 강요된 침묵이었다.>

  • 내가 대학을 입학했던 그 해에 형님은 의대 본과생이었는데, 무슨 소설 이야기를 했었다. 나더러 ‘이런 소설을 써 보라’고 했는지, 아님 당신이 ‘이런 소설을 써 보고 싶다.’고 했는지는 정확치 않다. <몽상가의 침묵>을 읽다가 정확해 진 기억 하나. 개미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몽상가의 침묵>속에 전염병의 매개로 개미 이야기가 나온다. 50년이 넘은 옛 적 기억이라 자신은 없다만.
  • 이런저런 이유로 한 해 한 해 미루어 두었던 서울 여행, 올 한 해가 가기 전에 나서 볼 요량이다. 사촌들 얼굴도 보고 그리던 얼굴들도 볼 겸.

***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확인되지 않은 정보나 근거 없는 소문으로 의사 결정을 하기 보다는 근거중심의 의학적 견해를 찾아 보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이 문장을 오늘날 뉴스들을 바라보는 올바른 지침으로 읽었다. <사실에 근거한 진실을 찾으라.>고.

나비 몸짓

참 이상한 일이다. 아주 오래된 옛 기억들의 시점은 거의 정확히 꿰곤 하는데 최근 십 수년 이래 일들은 바로 엊그제 같기도 하고 가물가물 옛 일 같기도 하도 때론 기억조차 희미하기 까지 하다. 쯔쯔, 진짜 늘그막인가 보다.

내 늘그막을 확인시켜주는 이즈음의 또 다른 증상 하나, 세상 돌아가는 일에 혀 차는 때가 자꾸 늘어간다는 사실이다.

입추 (立秋) 지나 처서(處暑)가 코 앞인지라 해는 여전히 따갑다만, 이는 마른 바람에 뭉게구름조차 나른하게 낮잠 졸게 딱 맞춤인 날씨다. 하늘보고 날짜 가는 것과 날씨를 가늠했던 옛 노인들의 지혜라니!

장광선 선생님이 떠나신지 벌써 네 해 째를 맞는다 하여 그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기리려고 여남은 벗들이 함께 했다.

살며 만나 반가운 얼굴들과 함께 조촐히 그를 기린 후 돌아 오는 길에 떠오른 장선생님과의 옛 추억 하나.

생전의 그와 나는 논쟁을 몇 차례 했었다.  그 중 하나가 희망에 대한 논쟁이었다. 그는 희망은 약자들의 무기일 뿐 그것은 허망한 것이라고 하였고, 나는 그 무기로 하여 약자들이 승리할 수 있는 때가 오는 것이라고 했었다.

오늘 돌아오는 길, 생전 그가 무시로 넘나들었던 델라웨어 메모리얼 다리를 건너며 깨달은 사실, ‘그가 옳았다’.

그랬다.

자주 민주 민중 평화 통일을 이룬 세상 나아가 사람들이 서로 참 사람 되어 모두가 평등한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꿈은 따지고 보면 그의 희망이나 이상이 아니었다. 차라리 그것들은 그가 이 땅에서 살아 숨 쉬었던 순간 순간 그저 그가 살아갔던 삶의 방식이었다.

우리들의 꿈과 이상과 희망적인 세상과 점점 멀어져가기 만 하는 듯한 이즈음 세상 소식들은 따지고 보면 오늘 우리들이 살아 갈 까닭들을 깨우치고자 할 뿐이다.

장광선선생, 그가 아직 우리 가운데 살아있음이다.

늦저녁,  요 며칠 사이 내 뜰에서 동무가 된 나비 몸짓을 즐기다 떠오른 말, ‘나비 몸짓으로 태풍이 인다’고…

오늘도 함께 나비 몸짓하는 하는 벗들에게 감사를.

장광선선생을 기리며.

8. 13. 23

한恨의 사제(司祭)

이즈음엔 그리 많이 듣지 못하겠다만 내 스물 나이 시절이었던 1970년대엔 한(恨)에 대한 이야기들이 차고 넘쳤었다.

한을 품고 사는 사람들, 맺힌 한을 부둥켜 안고 죽음의 강을 건넌 사람들, 피를 토하며 쌓인 한들을 외치며 하소연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이른바 유언비어(流言蜚語)가 되어 떠돌던 시절이었다.

흘러간 시간들을 돌이켜 따져보니 오늘날 가짜 뉴스들이라고 일컫는 당시의 유언비어들은 거의가 진실이었으며, 그 시절 맺힌 한들을 푸는 일은 여러 갈래 방법으로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당시 한에 대한 이야기들은 소설, 시 등의 문학적 방법 뿐만 아니라 사회학의 구조로 또는 철학으로 나아가 신학적 방법으로 이해해 보려는 노력들로 이어졌었다.

그런 이야기를 풀어 냈던 한 사람 가운데 서남동 목사님이 계셨다. 그는 살아 생전 한 맺힌 사람들의 응어리를 풀어 주는 일에 온 힘을 쏟았던 사람이다. 학문적으로도 그렇고 삶 속 행동으로  그를 온전히 실천하며 떠난 사람이었다.

오늘 밤, 한국 뉴스 한 꼭지를 보다가 <한의 신학>을 설파하셨던 서남동 목사님을 기린다. 그의 목소리와 그의 주창과 그의 신학적 고뇌와 그의 외침이 2023년 오늘, 한반도 남쪽 대한민국 땅에 절절하게 유효하기 때문이다.

<한(恨)이란 눌린 자 약한 자가 불의를 당하고 그 권리가 짓밟혀서 참으로 억울하다고 생각할 때, 그 호소를 들어주는 자도, 풀어 주겠다는 자도 없는 경우에 생기는 감정상태이다. 그러기에 한은 하늘에 호소하는 억울함의 소리, 무명(無名)의 무고(無告)의 민중의 소리 바로 그것이다.>

사람 조국(曺國)을 바라보는 시각들은 실로 다양할게다. 나는 그에게서 한 맺혀 오늘을 사는 반도 남쪽 민중들의 모습을 본다.

그를 다루는 숱한 이야기들 속에서 비겁, 야비, 질투, 시기, 모함, 집단 린치 등등 오늘날 반도 남쪽의 어둡고 음습한 가진 자들의  모습과 할 수 있는 한 그 가진 자들과 함께 해보려는 그저 그런 이들의 모습들을 보곤 한다.

서남동 목사님은 지식인(지식인을 자처 하는 한)은 민중이 결코 될 수 없다는 주창을 종종 하셨다.

나는 사람 조국이 뱉아 낸  단말마(斷末魔)를 통해 그에게서 오늘을 살아가는 민중을 만난다.

그와 그의 가족들의 한풀이가 이루어지는 날을 위하여! 함께 나아가는 이들과 작은 몸짓일지라도 이어갈진저.

*** 어쩌다 이리 무지, 무식에 야비함과 비겁함을 더한 사기, 도둑, 강도떼들의 전성시대가 되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믿는 구석 하나. 이 땅엔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한을 풀고 이웃의 한을 풀고자 애쓰며 함께 하는 한의(한풀이) 사제들이 늘 함께 한다는 사실 더하여 진실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조국 “차라리 옛날처럼 나를 끌고 가서 고문하라” < 사회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간밤에

어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차에 시동을 걸 무렵, 멀쩡하던 하늘이 까맣게 변하더니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후두둑 차창을 두드리던 빗방울이 순식간에 폭우로 변하더니 하늘 꼭대기에서 쏟아져 내리는 폭포로 변했다. 거센 바람과 번개와 천둥은 운전대를 잡은 내 손과 가히 한 치 앞이 가물가물한 차창 밖을 바라보는 내 두 눈에 온 힘을 모으게 했다.

평소 20분 정도 걸리면 족한 거리를 두 배 넘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비와 바람과 번개와 천둥이 이어졌다. 동네 어귀에 다다르자 커다란 나무가 쓰러져 길을 막고 있었다. 간신히 돌아서 집에 도착하니 내 집은 물론 이웃 집 모두 불빛이 없다.

번쩍하는 번개 빛과 천둥소리 거센 빗소리가 이어졌지만 전기가 나간 집안은 어둡고 고요했다. 무사히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로 아내와 나는 저녁 식사도 잊은 채 그 어둡고 고요함을 한동안 즐겼다.

전기가 다시 돌아올 기미는 없고 빗줄기가 잠시 잦아 들어, 저녁을 때울 요량으로 뒷뜰에 나가 그릴에 라면을 끓이던 중  구름 사이 지던 해가 반짝이더니만 무지개가 떳다.

허나 전기는 밤새 돌아오지 않았다.

간만에 촛불 속에서 아내와 내가 나눈 뚱딴지 연가(戀歌).

“혹시 한국 나가면 뭐 먹고 싶어?”라고 묻는 아내. 그리고 이어진 내 대답. “글쎄…. 선지 해장국…. 연탄불에 구운 얇게 저민 돼지 갈비….” 그래, 나는 이젠 가 보았자 만날 수 없는 내 고향 신촌을 그리워 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늘 아침까지 전기는 돌아 오지 않았고, 가게로 나가는 길목 곳곳에 엊저녁 빗줄기와 바람과 번개와 천둥과의 싸움에서 산화한 나무들이 길을 막고 누워 있는 까닭에 돌고 돌아 일터에 이르렀다.

만 하루 만에 전기가 돌아왔고, 신문은 하루 사이 변한 이웃들의 소식을 사진으로 전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간밤 사이 참 많은 것들이 변했다. 난 그걸 미처 모른 체 하며 여기까지 왔고…. 쯔쯔쯔.

죽음에

햇살은 여전히 따갑지만 마른 바람 불고 기온도 뚝 떨어져 바깥 일하기 참 좋은 날이었다. 오전에 그리 땀 흘리지도 않고 잔디 깍고 뜰 일을 하였는데 만 이천보를 넘게 걸었노라고 셀폰 앱이 알려준다. 어찌 보면 참 이상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오후엔 오랜만에 뜰에 나가 앉아 책을 읽었다. 새소리, 바람소리, 요령소리 들으며 책 속에서 노니는 일은 내가 누리는 사치 중 하나이다.

손에 들고 미처 책장을 덮지 못했던 임철규 선생이 쓴 <죽음>이었다. 이 책을 손에 든 계기는 책을 소개하는 글 때문이었다.

<저자 임철규 명예교수가 ‘죽음’이라는 주제로 이 책을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2009년 5월 23일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의 자살이었다. 2009년 당시에도 이미 칠순의 나이였던 저자는 봉하마을 영전에서 그를 위한 글을 바치겠노라고 약속하고, 방명록에 “아름다운 죽음”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1939년생인 저자가 지금의 내 나이 즈음에 쓴 글이다.

저자가 책머리에 소개한 <나는 이 책에서도 ‘죽음’이라는 주제를 문학, 역사, 신화, 신학, 철학, 정신분석학 등, 여러 영역에서 넓게 조명했다.>는 말처럼 이 책은 죽음에 대해 천착했던 많은 이들의 생각들을 소개하고 있다.

내가 읽으며 가장 많이 밑줄을 그으며 음미했던 곳은 제4장 ‘기억, 망각, 그리고 역사 – 아우슈비츠, 그리고…’이다.

밑줄 그었던 한 대목이다.

<역사는 한때 일어난 사건이다. 기억은 한때 일어난 사건이 현재의 개인이나 집단에 하나의 ‘흔적’으로 남아 있는 것을 말한다. 현재의 개인이나 집단에 일종의 역사의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 기억의 본질이라면, 깊은 상처로 남아 있는 기억의 ‘흔적’, 그 ‘트라우마’는 어떤 형식으로든 치유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즈음 마주하는 뉴스들을 생각하며 곱씹게 된 대목이었다.

그러나 저자가 이 장(章)을 마감하는 마지막 문장은 내가 수긍할 수 없었다.

<치유되지 못한 역사의 비극과 더불어 내면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기억의 폭력성은 인간의 역사를 계속 비극으로 끌고 갈 수 밖에 없다. 역사의 카타리시스는 없다.>라는 것이었는데, 저자가 ‘기억’과 ‘망각’을 지나치게 대립적 언어로 이해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 때문이었다.

이 책 마지막 문단에 나오는 문장들이다.

<지금껏 우리는 ‘죽음’이라는 벅찬 주제를 접근이 가능한 하나의 문제로 다루었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죽음은 ‘문제’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중략- 죽음은 ‘문제’가 아닌 ‘신비’의 영역에 속한다.  -중략- 죽음은 산 자가 전혀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신비’ 그 자체다.>

<우리의 직접적인 경험의 대상인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삶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더 ‘현명한 것’인지 모른다. 삶을 알려고 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벅찬 일이 아닌가.>

암만! ‘오늘’인 것을.

좋은 날, 잘 쉬었다. 내일은 월요일, 나는 또 손님들 빨래하러 세탁소로 나간다. 감사함으로.

살며, 기억할 것은 기억하고 잊을 것은 잊으면서.

주말에

폭염 속에서 한 주간을 보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나이에 맞게 내 노동 환경이 놀랄만치 좋아졌다는 사실이다. 해마다 이맘 때이면 온 몸이 소금에 절여진 채로 파죽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바깥 찌는 열기에 더해 보일러 열로 찜통이 되어버린 내 세탁소의 여름은 늘 그랬었다.

한 오년 되었나보다. 이젠 내 세탁소엔 에어컨이 빵빵 돌아간다. 물론 보일러 열기와 스팀 그 끈끈한 더위를 완전히 식혀줄 만큼 쾌적한 노동 환경은 아니다만, 그래도 땀 흘리며 집으로 돌아오지는 않는다.

한 주간 함께 노동을 끝낸 아내가 물었다. “벌써 한 주가 또 지났네! 뭔 좋은 계획 없으신지?”

“글쎄…필라에 올라가 장(場)도 보고 저녁이나 먹고 옵시다.”하는 내 응답과 함께 나섰던 길이다.

그렇게 장도 보고 우리 동네 음식점에서는 맛볼 수 없는 맛난 한식 한상으로 배 채우고 돌아 오는 길, 하늘이 까매지더니만 폭우가 내려 쏟기 시작했다. 와이퍼를 최대 속도로 올려 차창을 내려치는 빗물을 거두어도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한 십 오분 여 운전을 하였을까? 비가 조금 잦아 들더니만 무지개가 눈 앞에 높은 건물에서  저쪽 하늘 끝까지 크게 다리를 놓았다.

그리고 겪은 신기한 경험, 온종일 붉게 달구어진 해가 하루의 마지막 열정으로 쏟아내는 빛으로 내 눈을 가려 선글라스를 끼게 하였는데 비는 여전히 쏟아져 차창 와이퍼는 쉬지 않고 돌아가야만 했던 일이다.

남들 경험이야 모를 일이다만, 내가 운전을 한 이후 처음 겪는 일이었다.  햇살이 부시어 선글라스를 끼었는데   동시에 비가 차창을 가리며 내려 와이퍼를 돌려야 하는 상황이 길게 내게 남았다.

무릇 삶이 그런 것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삶에서 새로움을 느끼게 하는 신께 감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