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포도 채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애틀란타에 사는 매제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었다. 평소 건강 하나는 자신할만한 사람이었기에 그 소식 듣고도 큰 걱정은 하지 않았었다. 한 주 후에 들려온 소식은 매우 심한 중병 상태로 치료 과정에 들어섰다고 했다. 그리고 또 한 주가 지나자 병원의 모든 치료를 중단했다는 것이었다.
아뿔싸! 큰 일 당하기 전에 가서 얼굴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어제 아침 비행기를 예약 했었다. 그러다 지난 수요일 들려온 소식,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우연이었지만 내 비행기 예약시간은 매제의 장례예배 시간에 딱 맞추어 있었다.
그렇게 매제가 떠나간 모습을 보고 돌아 온 밤이다.
일남 삼녀, 우리 네 형제 부부 여덟 가운데 가장 먼저 떠난 사람이다. 나이 일흔 둘. 이제 우리 세대 차례가 된 모양이다.
오늘 아침, 매제의 손길 하나 하나 가까이 느낄 수 있었던 그가 가꾸어 온 뜰을 걸으며 매제의 삶과 죽음, 그를 떠나 보낸 여동생과 조카 딸, 손녀, 손자 – 그 개개인의 삶에 간섭하시고 함께 하시는 신에 대한 생각에 빠졌었다.
오늘 두어 시간, 조카와 함께 먼저 떠난 아빠와 남은 엄마 이야기,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시간들은 내 일생 귀한 추억으로 남을 듯하다.
그 참 좋은 시간을 허락해 주신 신께 감사 드리는 밤이다.
삶과 죽음은 하나로 연결되어진 과정에 불과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만, 죽음은 여전히 아픔이고 슬픔이다.
떠나는 여름이 부린 심술이었다. 연일 95도를 넘나드는 뜨거운 한 주간을 보냈다. 지친 몸과 맘 추수리라는 위로처럼 어제 오늘 비가 추적인다.
조금은 느긋한 게으름까지 즐기며 읽은 책,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가 쓴 <좌파의 길/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이다. 원제는 그냥 <식인(食人) 자본주의, Cannibal Capitalism>이건만 구태여 ‘좌파의 길’이라고 명한 역자의 의도는 너무 나간 듯 하다. 물론 꼼꼼히 달아 놓은 역자의 주석들은 칭찬할 만하였다.
오늘 내가 사는 세상을 ‘식인 자본주의’체제라고 명명한 저자는 이 시스템으로 인해 인류는 멸종 직전에 놓여 있다고 주창하며, “우리는 끝장 났는가?(Are we toast?)”라는 물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저자는 자본주의를 경제체제로 한정 지어 이해하는 한,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위기와 모순들을 해결할 방안을 찾기 어렵다며, 자본주의를 옛날 봉건체제처럼 ‘제도화된 사회 질서(an institutionalized societal order)’로 이해해야만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은 착취, 수탈, 인종주의, 식민화, 페미니즘, 생태, 자연, 환경, 국가, 금융, 부채, 정치 위기 등등 자칫 머리 아프게 느낄 만한 주제들을 다루면서도 매우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특별히 제3장 <돌봄 폭식가: 생산과 재생산, 젠더화된 위기>는 출산, 육아, 교육, 의료, 노인문제에 이르는 이른바 사회보장에 대한 현 자본주의 체제의 폭식성과 위험들을 잘 이해할 수 있게 이끌어 준다.
또한 이른바 슈퍼펀드(Superfund)로 잘 알려진 미국 내 폐기물 오염 정책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들은 그 정책으로 직격탄을 맞는 내 생업인 세탁업의 현실을 생각하며 고개가 절로 끄덕거리게 하였다. 돌봄 문제와 마찬가지로 비록 진보적인 국가 자본주의적 규제가 자칫 ‘가난한 공동체들(전부는 아니지만 다수는 유색인 공동체였다)’에게 책임을 떠안기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는 것이다.
에필로그인 <펜데믹, 식인 자본주의의 광란의 파티>는 지난 삼사년 간 내 생활현장에서 겪은 일들과 연관되어 있어 저자가 말하는 ‘식인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었다.
저자는 마지막 장인 제6장 <진정한 대안의 이름으로: ‘사회주의’의 재발명>에서 ‘식인 자본주의’를 벗어나 사람들이 자유롭고 민주적으로 사람 답게 살 기회를 만들 제안들을 하지만, 그가 “아직 가설에 머물러 있다.”라고 고백할 만큼 명쾌함은 담지 못했다.
트럼프와 바이든을 벗어 나지 못하는 오늘날 미국을 향한 저자의 개탄과 함께 이런 미국을 쫓지 못해 안달하는 가히 광기에 휩싸인 윤석열 집단까지 생각나 책장을 덮으며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였지만, 이 암울한 시대를 이겨내고자 머리를 맞대고 오늘을 고민하며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들도 차고 넘치니 또 희망을.
**엊그제였다. 해가 쨍쨍 이글거리는 대낮에 내 일터 저편 하늘에 큰 무지개가 떳었다. 신기했다. 잠시 후 가게에 들어선 손님 하나가 하는 말, ‘윌밍톤에는 비가 엄청 내렸다네요.” 내 가게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곳에는 비가 많이 내렸단다. 내가 서 있는 곳에는 해가 쨍쨍했건만.
무지개- 무릇 신과의 약속이란 신이 그렇게 약속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만 현실이 되는 법이다. 하여 믿음이고 신앙인데… 옛사람들 발끝에도 닿지 못할 저열하고 치졸한 욕망들을 믿음으로 치부하는 한, 무지개란 그저 허망한 일시 치장일 뿐.
*** <기나긴 인종주의 역사에서 이 말(식인食人)은 아프리카 흑인들을 묘사하는데 주로 쓰였는데, 실은 이들이야말로 오히려 유럽 제국주의의 식인적 약탈의 희생자들이었다.>- 책 속에서
<아우슈비츠에 갇힌 유대인 집단이 신을 재판에 회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들은 신을 잔혹함과 배신으로 기소했다. – 중략- 그들은 신의 유죄를 선고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랍비가 신의 유죄와 사형 선고문을 발표했다. 그런 후 눈을 들어 재판이 끝났다고 말했다. “이제 저녁기도 시간입니다.”> – 카렌 암스트롱의 <신의 역사>에서
노동절은 공식적으로 여름이 끝나는 날. 그 공식적이라는 말을 비웃듯 따가운 햇살이 내려 쪼이는 기록적 더위가 이어진 연휴였다.
여러날 찔끔찔끔 책장을 넘기던 카렌 암스트롱의 <신의 역사> 정독를 마치며 연휴를 보냈다. <축의 시대>, <마음의 진보>에 이어 읽은 그녀의 세 번째 책인데 이번에도 진하게 남는 말 한마디 ‘compassion’이다. 역자는 이를 ‘동정심’이라고 했다만 카렌이 그 말에 담고 있는 의도는 사랑, 자비, 공감, 연민 등등의 말을 녹여내어 쓴 말 같다.
읽다가 혼자 실없이 낄낄거린 대목이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제 머릿속 생각의 크기만한 신을 믿고 산다.”는 이젠 굳어진 내 고집을 더욱 공고히 한 것이었는데 바로 이 대목이다. -<아일랜드의 사도 성 패트릭의 유명한 기도문 구절. ‘신이 내 머리와 내 이해 안에 있게 하소서.”>
올해 팔순인 카렌 암스트롱과 비슷한 연배의 내 선생이자 신앙의 선배이며 내 삶 속에서 만난 숱한 인연들 가운데 묵직한 끈으로 이어진 이가 있다. 호주에 계신 홍길복목사님이다. 무엇보다 사십 년 함께 살아 온 아내와의 연을 맺게 된 탓(또는 덕?)의 빌미를 제공한 이가 그였으며, 비록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은 참으로 짧았지만 그로 인해 내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신앙의 선생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 들어 가며 꾸는 꿈이 하나 있었다. 사오 십 년 전, 아내와 내 친구들이 십대 이십대 였던 나이에 삼십 대 청년이었던 홍목사의 설교를 들었던 시절을 다시 재현해 보는 꿈이었다. 그저 단지 꿈일 뿐이었다. 다들 그렇겠지만 나 또한 그 때의 신과는 사뭇 다른 신과 이야기하며 지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는 호주에 나는 미국 시골에 아내와 내 친구들 역시 고향 신촌을 다 떠나 있을 터. 그저 꾸어 보는 꿈이었다. 이른바 헛 꿈.
아직은 그런대로 정정하게 누워 계신다만 아흔 일곱 아버지 덕에 먼 길 나들이 나설 엄두가 나질 않았는데 이런저런 연유로 서울 나들이를 작심한 것은 몇 주 전일이었다. 그리고 아마 그 이틀 후 였을 게다. 홍목사의 서울 나들이에 맞추어 옛날 그 친구들이 고향 신촌 그 교회에서 함께 예배를 드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아뿔사! 우리 내외 일정과는 맞지 않았다. 목사님과 우리 내외 일정이 겹치는 시간은 단 이틀 뿐이었다. 목사님께 아쉬움을 전하는 소식을 드리자 그가 전해 온 말이었다. “이틀 중 시간 조율해서 서울서 한번 만납시다.어쩜 이제 부터의 만남이란 늘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말이죠.”
그리고 오늘 아침 아직 신촌을 지키고 있는 옛 친구가 전해 온 말. ‘교회와 여러 삶의 사정으로 인해 홍목사님을 모시고 드리는 예배는 일정이 바뀌었다.’는 소식. 그 바뀐 일정은 바로 목사님과 우리 내외 일정이 겹치는 이틀 중 하루.
해가 따갑고 뜨거워도 여름은 이미 아니다. 가을 볕이다. 그 볕에 이틀 간 널어 둔 호박이 정말 잘 말랐다.
작고 마른 모습이야 타고 난 것, 그게 내 삶을 버텨 준 또 하나의 힘이었는 지도 모를 일이고. 그래도 머리카락은 까매서 그 또한 누리는 복이다 했는데… 엊저녁 느긋한 마음으로 거울 앞에 서니 며칠 사이(?) 반백이로세.
제 아무리 백세 시대 운운해도 이젠 신의 은총을 곱씹어야 할 나이. ‘compassion’과 함께. 무릇 “사랑, 자비, 공감, 연민, 동정심”이란 함(행위)이 뒤따라야 한다는 …
어느새 스무 해 가까이 흘러간 일이다. 그 노인을 만난 곳은 워싱턴 부근 그의 집에서 였다.
쉰 나이를 넘길 무렵 나는 헛바람이 단단히 들어 뉴욕에서 워싱톤 까지 뻔질나게 오가곤 했었다. ‘아무리 이민이라지만 세탁소에서 내 인생을 다 보내다니…?’라는 물음으로 시작된 헛바람이었다. 그 헛바람은 내 인생 또 하나의 굵은 실패 자국만을 남긴 채 두 해만에 꺼졌다.
아무튼 그 무렵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만났었다. 제법 성공해서 정말 어마어마한 부를 이룬 사람부터 노숙인으로 거리를 헤매는 사람, 숱한 사(師, 事, 士)자 직업군들에서 부터 영어 한마디 쓰지 못하는 사람, 워싱톤 정가는 물론 남북한 고위 관리부터 허망한 헛 기세에 쩔어 사는 사람들 까지, 물론 나처럼 헛바람에 혹 하지 않고 작은 생업에 충실한 이민들 까지 정말 다양한 계층의 여러 사람들을 만났었다.
비록 그 때 그 헛바람의 후유증으로 오래 참 아프게 앓았었다만, 돌이켜보면 그 시절이 아둔한 나를 깨우는 신의 은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지니며 산다.
아무튼 그 무렵에 만났던 그 노인의 이야기.
이북에 고향을 둔 그가 38선을 넘어 이남으로 넘어 온 때는 남북의 경계가 제법 심해진 1948년 가을 즈음이었단다. 그 남하길에서 그는 가족을 하나 잃었단다. 그리고 터진 한국전쟁. 남하 후 포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노인은 이른바 ‘포항 전투’로 잘 알려진 전장에 학도병 막내로 참전하였단다. 71명의 학도병 중 47명이 전사하고 4명이 실종되었으며, 13명이 포로가 된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노인은 어찌어찌 이민을 와서 주류 판매업을 하며 일가를 이루고 살았다.(나는 노인의 긴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몇 차례 그의 집을 찾았었고,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 녹음 테이프에 그의 이야기들을 담아 그 테이프들을 전해 받아 보관하고 있다.)
아무튼 그 노인에게는 이북 빨갱이 놈들은 철천지원수였다.
그리고 1980년 광주 학살을 끝낸 전두환이 미국을 처음 방문 했던 때 전두환을 규탄하는 재미 동포들은 그에겐 쳐 죽여야 할 빨갱이들이었단다. 그래서 노인은 재미 동포들을 규합해 ‘전두환 대통령 방미 경호단’을 자비로 조직하고 경호대장을 자처했단다.(당시 뉴욕에서 그 발대식과 함께 기자회견을 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나를 만나서 이야기를 할 때엔 노인은 그 일을 매우 부끄러워 했었다.(그의 이야기와 기록에 따르면 그 무렵 노인은 당시 전두환의 최측근 이자 이른바 쓰리 허(許)중 한 사람과 매우 밀접한 관계였던 듯 하여, 그의 행위가 자발적이었다는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만 그 무렵 그가 매우 부끄러워 한 것은 내가 느끼기엔 진심이었다.)
노인은 이야기를 다 남기지 못한 채 지병으로 세상을 떳다.
이즈음 한국 뉴스들을 보며 답답한 마음으로 떠올려 본 노인 생각인데 내가 어느새 그 때 그 노인의 나이 즈음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하며 덧붙였던 말,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나 차고 넘친다. 이즈음 한국 뉴스들을 보면.
차라리 삶의 마지막 순간에 부끄러워 했던 그 때 그 노인은 위대했다 라고 할까…
참 좋은 이웃이고, 만나면 웃지 못할 사이가 전혀 아닌데 윤석열을 찍었거나 지지한다는 이들을 보면…. 참 아프다.
꽃과 새들에게서 희망을 찾는 까닭 – 바로 부끄러움을 아는 밑바탈 사람(내) 마음 깨우치는 신이 주신 도구들이므로.
이젠 스마트폰 없이는 살 수 없는 듯한 세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마트폰은 내겐 여전히 낯설다. 그만큼 세상 변화를 쫓아가는 내 모습은 더디고 때론 삶의 불편함을 묵묵히 견뎌 내야만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물론 열심히 변화에 적응하려고 애쓰기는 한다만, 그 애씀이 지나치면 노년의 과욕이라는 생각으로 적당한 뒤처짐도 자연스런 일이라는 생각으로 산다.
사실 내 일상에서 스마트폰이 없다고 불편할 일은 거의 없다. 그렇게 시간 다투며 살아갈 일도 없거니와, 다행으로 가족이나 이웃들과의 연계의 끈을 수시로 확인해야 안도할 수 있는 궁박한 처지는 면하고 살 수 있는 감사함 때문이다.
문제는 집을 떠나 있을 때다. 특별히 변화가 빠르게 일어나 옛 기억으로는 적응할 수 없는 대도시 이거나 처음 찾은 곳에서 만나게 되는 낯선 환경이다. 이른바 키오스크(kiosk)라는 무인 단말기 앞에 서게 되거나 앱(App)을 통해 정보를 주고 받아야 하거나 돈 결제를 해야 할 일이 생길 때 일시 난감해 지는 노인이 될 때이다.
딸아이를 만나러 뉴욕에 갈 때면 아이는 나를 물정 모르는 시골 노인으로 알고 다 알아서 챙겨 준다. 속으로 혀는 차지만 이젠 그게 편해 나는 아무 말 않는다.
그리고 내 좋은 친구 한 사람.
한 두어 주 전이었다. “여름도 다 가는데 땀 흘려 걷고 신나게 먹고 그렇게 하루 함께 보냅시다!”라는 그의 권유로 어제 나섰던 길.
참 좋은 하루였다.
그간 살며 숱하게 지나고 오간 길목, 미처 가보지 못한 낯선 곳들에서 넉넉하고 여유로운 하루를 즐겼다. 그리고 친구의 손에서는 거의 온종일 스마트 폰이 떠나질 않았다. 그것이 우리들의 안내자였으므로.
좋은 친구 앞에서도 나는 먼저 노인이 되었다.
돌아오는 길, 뒤늦게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고생했다가 엊그제 음성 판정이 나온 딸아이가 짧은 메세지와 사진들을 보내왔다. 내 스마트 폰으로.
달포전에 사위와 딸이 내 집에 왔을 때 함께 했던 사진들과 어제 함께 했던 내 길동무들의 안녕을 비는 마음과 함께. 스마트 폰으로.
그렇다. 이젠 변화에 두려워 할 나이도, 더딘 적응에 부끄러워야 할 나이도 아니다.
그저 내 삶의 속도에 맞추어 가까이 두고 즐길 수 있으면 좋은 스마트 폰이라는 장난감 하나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