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 – 4, 변화에

변화는 늘 놀라운 것이지만, 내가 적응하지 못할 때는 그저 불편함 뿐이다. 그런 불편함이 자꾸 쌓인다는 것은 내가 늙어간다는 표징일게다. 하여 애를 쓰는 편이다. 변화로 인한 불편함을 최소화 하려는 노력을 최대화 시키는 애씀인데, 그런 모습에 스스로 ‘쯔쯔쯔’ 혀 찰 때가 자꾸 늘어간다. 그럴 때면 스스로 위로하는 한마디, ‘내 노력이 모자란 것이 아니라, 변화가 너무 빨라서…’

서울은 내가 쉽게 적응하기엔 지나치게 많이 변했다. 십 삼 년 만에 나섰던 나들이였는데, 그 변화의 폭은 내 가늠 이상이어서 불편함 보다 먼저 다가선 것은 놀라움이었다.

무엇보다 먼저 다가선 놀라움은 사람들이 건네는 말소리들 크기와 억양이 매우 작고 부드러워진 변화에서 왔다. 지하철이나 버스, 식당이나 거리에서 사람들의 말소리는 분명 내 기억 속 서울사람들의 그것이 아니었다. 이웃에 대한 배려에서 온 듯한 이런 변화는 실로 큰 놀라움이었다. 솔직히 뉴스 속에서 만났던 서울소식들은 매우 거칠게 소리 높은 소음처럼 다가오곤 했었는데, 실제 사람들의 말소리들은 부드럽고 온유했다. 그게 참 좋았다.

지하철 친절한 안내 방송도 좋았는데, ‘발빠짐 주의’나 ‘나빠짐 주의’, ‘하차입니다.’라는 경고 등은 외국어처럼 매우 낯설었다. (불편함, 놀라움이라는 말을 쓰다보니 생각난…)

그 보다 큰 놀라움을 느낀 것은 어디를 가나 잘 꾸며진 조경(造景)을 바라보면서 였다. 얼핏 쉽게 잔상으로 남게 되는 풍경들, 일테면 아파트 공화국이니 콘크리트 공화국이니 하는 말들을 잘 치장해 주는 놀라운 변화는 내겐 실로 경이롭게 다가왔다. 놀랍게 변한 종로통 뒷골목 직장인들의 점심시간 풍경과 그들의 여유로운 걸음걸이를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잘 꾸민 조경 때문이었다. 돌아와 내 가게 손님들에게 자랑할 요량으로  조경과 자연 사진들을 제법 많이 찍었다.  

또 다른 놀라움은 딱 두 시간 오분이 걸린 서울과 속초 간의 거리였다. 아주 오래 전 고등학교 친구들하고 북평해수욕장에서 놀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 때 청량리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밤새워 거의 열시간 넘게 달려 닿던 곳이었다. 터널 예순 세 개로 이루워 졌다는 서울 속초간 도로를 달린 일은 내게 완벽한 시간여행 경험이었다. 아내와 단 둘이 맞았던 속도 앞바다 해돋이 풍경은 우리들의 내일로 품고.

그 동창들을 거의 오십 년 만에 만났다. 졸업사진을 떠올리며 옛 이야기를 나눈 몇 몇은 졸업 후 처음이었으니 만 오십 이년이다. 동창회를 이끄는 친구가 말하길, 졸업 동기들 중 1/4이 먼저 이 세상길 떳고, 1/4 정도는 연락 두절, 1/4 정도는 연락은 닿지만 모임에는 나오지 않고, 나머지 1/4이 이런저런 모임으로 연과 끈을 맺고 늦은 시간들을 함께 걷고 있단다.

실로 오십 년만의 변화인데, 또 다른 놀라움 하나는 바로 모두가 별로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함께 한 동창들 중 몇몇은 그 옛날 북평 해수욕장에서 같이 놀았던 친구들이었는데, 그들은 물론 다른 친구들도 떠들고 즐기는 동안 변하지 않은 옛모습 그대로 둘러 앉았었다.

그랬다. 해 아래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만, 분명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으련다. 바로 나다. 내 마음에 따라.

느긋하게 맞는 추수감사절 아침이다. 해마다 Thanksgiving, 이 맘 때면 읊조려보는 시 한 편이 있다. 언제부터 인지 잘 모르겠으나, 이젠 철들 때도 되지 않았나는 생각이 들었던 내 나이 환갑 전후일게다. Shel Silverstein이 읊은 관점(Point Of View)의 첫째 연이다.

<추수감사절 만찬은 슬프고 고맙지 않다/ 성탄절 만찬은 어둡고 슬프다/ 잠시 생각을 멈추고/ 칠면조의 관점으로 만찬 식탁을 바라본다면.

Thanksgiving dinner’s sad and thankless/ Christmas dinner’s dark and blue/ When you stop and try to see it/ From the turkey’s point of view.>

2013년 추수감사절 아침, 돌아볼수록 그저 감사한 일 하나 꼽는다. 살아오며 보아 온 숱한 변화들 또는 기억조차 못하는 나의 변화들 나아가 옹고집으로 변치 않는 모습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관점의 잣대가 비록 어설프고 부끄러움 투성이지만 예수라는 잣대, 성서라는 잣대라는 믿음을 잊지 않았다는 감사이다.

큰고개(대현) 언덕 옛 친구들이 일깨워 준 감사이다.

<시간여행 – 3, 희망에>

겨울시간은 해가 너무 짧다. 오랜만에 늦잠을 즐기며 느긋하게 시작한 탓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하루 해가 너무 짧다. 여행 전, 미처 다 심지 못했던 히야신스, 무스카리, 알리움 등 구근들을 묻고,  뜰을 가득 덮은 낙엽들을 거두고 난 뒤, 아버지와 함께 잠시 시간을 보내고 온 것 뿐인데 벌써 어두워졌다. 그 짧은 하루, 봄을 기다리며 가꿀 수 있는 오늘에 감사하며.

신촌 대현교회 고등부 3학년 때 일이다. 따져보니 52년 전 일이다. 그 때 우리들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들 가운데 박대위, 이열모 선생님이 계셨다. 두 분 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셨다. 이열모 선생님은 우리 고3  남학생들을 위해 이런 기도를 하셨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아이들이 장차 이 나라의 꿈입니다. 헌데 지금은 고3입니다. 열심히 공부할 때 입니다. 이 녀석들이 공부하다가 쓸데없이 바지 속으로 손 넣고 장난치는 유혹을 이기게 해주시고….”

박대위선생님은 제2한강교와 절두산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양옥에 살고 계셨는데, 당시 우리에게 지나치듯 이런 말씀을 던져 주셨었다. “집에 앉아 멋진 한강 풍경을 내려다 보다가 정신이 번쩍 들 때가 있단다. 과연 내가 지금 여기에서 이런 사치를 누리며 사는 일이 옳은 것인가?하는 물음 때문이지!”

그 시절 참 좋은 선생님들 덕에 크게 엇나가지 않고 이 나이에 여기서 요만큼 이나마 살고 있는 것에 그저 감사다.

박대위 선생님은 내 대학시설 총장이셨던 박대선총장의 동생이셨다.

그리고 내 친구이자 동지인 김규복목사. 대학시절, 박대선총장 사퇴운동부터 박정희 유신 철폐, 전두환 타도 투쟁에 이르기까지 나보다 늘 한발 앞서서 나아갔던 벗, 김규복 목사를 독수리다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이민 보따리를 꾸리고 있을 때 그는 대전 대화동에서 빈민과 노동자들을 위한 교회를 세웠었다.

독수리다방은 이름만 이어져 올 뿐, 옛 모습이라곤 다방안 사진 속에만 남아 있었다.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불편한 걸음으로 다방 안으로 들어섰다. 만 36년 만에 만난 내 오랜 벗 김규복목사였다. 그는 오래전에 겪은 고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앓고 있었다.

우린 짧은 시간 손을 꼭 맞잡았고, 부둥켜 안았을 뿐 긴 말은 나누지 못했다. 그와 그의 아내는 오늘도 옛 모습 그대로, 비록 많이 변한 세상일지라도 여전히 바닥 삶을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하시는 신과 함께 일 하고 있다.

살며 이런 벗 하나 사귀고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누린 은총은 족하다.

목사님 다음에 장로님 이야기.

어느 날 우리 내외는 ‘이것 한 번 먹고 가자!’라는 계획을 세웠었다.  그 저녁에  박성규 장로내외가 초대해 준 저녁식사 자리는 바로 우리가 먹고 싶어했던 그 요리 전문점이었다. 아무렴! 장로님 기도발은 나 같은 얼치기 예수쟁이 보다 세긴 센 모양이었다.

교회 후배이자 대학 후배인 박장로- 일년 터울 후배라긴 보단 그저 친구일 뿐- 그와 함께 공유했던 사람들과 시간들을 되새기며 삶의 아쉬움과 감사함을 조근조근 나눈 참 좋은 시간이었다. 두 내외에게 감사를.

옛날 동쪽 끝인 워커힐 언덕에서  옛날 서쪽 끝 신촌까지 오가며 아직도 한결 같은 모습으로 교회를 지키고 있는 그의 모습에 경외를.

이번 여행에서 꼭 가 보고, 아니 꼭 가 보아야 할 곳이 있었다. 세 곳이었는데 모두 서울 시청 부근 이었다.

그렇게 시청앞으로 가는 지하철을 기다리다 보게 된 시 한 편이었다.

지금 내가 사는 곳에서 함께 삶의 길을 걷고 있는 친구들이 서울 나들이를 하면 반드시 찾게 되는 세 곳이다. 바로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추모와 기억 공간 그리고 윤석열로 대변되는 사람을 계층화 시키는 세력 타도를 외치는 현장이었다.

그렇게 찾아 나선 시청앞 광장에서 나는 절망했었다. 옛 시청 건물인 서울도서관 옥상과 아내와의 추억이 쌓여 있는 정동 세실극장 옥상에서 바라본 토요일 오후 시청앞 광장 풍경은 대한민국 정치 뉴스처럼 절망적이었다.

광장 북쪽 광화문 방면을 점령한 내 또래 이른바 태극기 부대와 남쪽 남대문을 향해 모인 무리들 모두 확성기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소음은 내겐 너무 낯설었다.

확성기로는 절대 역사를 바꾸지 못한다. 웅웅거리는 거대한 침묵의 함성 소리, 바로 지축을 흔드는 민중의 함성이라야 새 세상 열리는 법이다.

멀리 갈 것 없다. 80년 서울역 광장, 87년 시청앞 광장, 2016년 청계광장. 내가 아는 한 모두 확성기가 아니었다. 아직 갈 길 먼 듯 하다만….

허나 나는 그저 희망적이다.

내 친구 김규복과 박성규 같은 굳건한 바닥 단단히 다져 하나하나 반듯하게 세워 이어가려는 이제 칠십 노인들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하여 희망으로.

바라건대 더불어 함께 사랑하며 살아가는 세상을 향한 희망으로.

이 희망! 내가 내 고향 대현교회에서 배운 믿음이다.

시간여행 – 2, 우연(偶然) 또는…

돌아볼수록 신기한 일이다. 치밀한 계획은 커녕 어설픈 밑그림 조차 없이 엄벙덤벙 여기까지 왔건만, 지금 내가 누리는 삶은 온통 감사해야 마땅하다. 오늘 가게 손님 한분이 내게 건넨 말이다. “당신 얼굴이 참 편해 보여요. 휴가를 통해 넉넉한 쉼을 즐기신 것 같아요.”

  1. 고모님을 뵙고 온 지 겨우 한 나절 정도 시간이 지났을 새벽이었다. 사촌동생이 ‘어머님께서 떠나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튿날 아침 고모님을 모신 빈소를 찾았다.

문상을 마친 우리 내외에게 동생이 말했다. “저쪽으로 가시죠”. 동생을 쫓아 따라간 곳은 이웃한 빈소였다. 그곳엔 동생의 부인 제수씨가 상복을 입고 서 있었다.

그랬다. 사촌 동생 내외는 몇 시간 사이로 함께 떠나신 ‘어머니와 장모’ 또는 ‘어머니와 시어머니’의 장례를 함께 치루고 있었다.

2. 여행을 떠나기 전 우리 내외는 얼기설기 어설픈 계획을 세웠었다. 만나야 할 사람들, 가보고 싶은 곳들, 먹고 싶은 것들을 나열한 그저 낙서 비슷한 계획이었다. 어찌어찌 그 어설픈 계획대로 시간을 보냈다만, 전혀 이루지 못한 것들도 있거니와 반면에 전혀 계획치 않았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곤지암 제법 깊은 산골에서 지낸 하루 밤은 전혀 계획치 않았던 우연이었다, 허나 그 우연이 우리 내외에게 베푼 여유로운 쉼은 오래 기억될 듯하다.

아내가 친구를 만나러 곤지암을 간다고 했다. 늦은 시간이었다. 나는 곤지암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찾아보니 우리들이 묵었던 숙소에서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전철을 타고 늦은 시간에 아내 혼자 거기까지 오가는 것이 무리다 싶어 함께 가기로 했다. 그렇게 나섰던 길인데 하루 밤을 거기에 묵게 되었다.

잠자리에 매우 예민한 내가 숙박업소 이외에 누군가의 집에서 하루 밤 묵은 일은 거의 몇 십년 만의 일이었다. 그 밤의 편안함과 이튿날 아침 누렸던 그 상큼함은 오래 간직될 듯. 아내의 오랜 친구 내외에게 깊은 감사를. 우연하게 누린 곤지암의 하루 밤에.

3. 내겐 나이 터울이 크게 뜬 사촌동생이 있다. 계획에 없던 일이었는데 그 동생을 만났다. 처음 만난 동생의 남편 곧 내 매제는 내 여행길 피로를 싹 가시게 하는 참 좋은 인상이었다. 동생 내외와 초등학교를 다니는 두 조카들을 보며 나는 마냥 사람 좋은 웃음을 닫을 수 없었다. 동생 내외가 우리 내외 서울 구경을 시켜주다 내려준 곳이 명동입구였다. 아하! 그렇게 우연치 않게 옛 젊음의 거리 명동을 아내와 팔짱 끼고 걸었다. 참으로 우연한 일이었다. 몇 십년 만에.

4. 따지고보니 신촌 대현교회 홍목사님을 비롯한 옛 친구들을  만나게 된 일도 그저 우연이었다. 우리 내외가 계획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이 나이에  누린 큰 복이었다. 그야말로 우연하게.

돌아볼수록 신기한 일 투성이다. 어찌보면 삶은 우연의 연속이다.

돌아와 생각하니 이젠 그 우연들의 뜻을 새겨야 마땅할 나이가 되었다.

어쩜 이제야 믿음의 첫걸음 내딛고 있는 게 아닐런지.

우연 또는…

시간여행 – 1, 귀향

“어느 쪽이 귀향일까?” 16박 17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서 아내가 내게 던진 물음이었다. “글쎄…” 나는 그 물음에 엉거주춤할 수 밖에 없었다. 서울 나들이는 분명 우리 내외에게 고향을 찾는 일이었지만, 다시 돌아와 수북히 낙엽 쌓인 내 뜰에서 다알리아 구근을 거두는 여기가 오늘의 내 고향일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연애 5년, 결혼 40년 – 그 긴 시간 동안 아내와 보름 넘는 시간을 함께 여행해 본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딱히 우리 내외의 삶이 팍팍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우리 세대 보통 사람들의 경우와 엇비슷한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아내의 물음에 나는 “글쎄…”라고 응답하며 “어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귀향 아닐까?”하는 말장난 같은 헛소리를 덧붙이긴 했었다만, 내 솔직한 마음은 이번 여행이야말로 귀향 여행이자, 반 백 년 이쪽 저쪽을 오가는 멋진 시간 여행이었다.

삶이 늘 그렇듯이, 부모님이 채어주지 못한 허전한 구석을 늘 채워 주시던 하나 밖에 없는 내 고모님의 마지막 길, 생각할수록 웃음이 이어지는 후배의 너무 이른 마지막 길, 멋지게 늙어가는 후배 아버님 부고 까지 슬픔, 아픔, 아쉬움도 함께 한 인생 여행이었다. 왜 또 그리 아픈 이들이 많은지? 소식 들으며 그저 안타까울 뿐. 그저 우리들의 나이를 확인할 밖에. 아하! 성가(聖歌)하면 떠오르던 이름이었는데, 나이 탓이 아니라 병 탓에 더는 노래를 부르지 못한다는 이야기엔 진한 아픔이.

이제 한 두 손가락 꼽을 정도 만큼 남은 나와 아내의 집안 어른들도 찾아 뵙고, 중고등 대학 동창들도 만나고, 만나 그저 반가운 옛 친구와 옛 길을 따라 걷고, 아내와 단 둘이 해돋이 맞는 짧은 여행도 즐기고, 딸과 사위 앞세워 걷고 즐기는 그야말로 꿈 같은 시간이었다.

우리 내외를 이제껏 지켜 준 고향의 정기 랄까, 아님 믿음의 뿌리라 할까? 신촌 대현교회 옛 친구들과의 만남은 이번 여행의 절정이었다.

여행 첫 날,  대현교회에서 만난 옛 친구들 그저 얼싸 안을 만큼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그날 설교를 했던 홍길복목사님 – 그 날 그의 차분하지만 변함없이 단정적인 어투의 설교를 들으며 사십 오륙 전 그가 전했던 설교 제목을 떠올렸었다. 솔직히 설교 내용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날의 설교 제목은 또렷히 기억하고 있다. 그 제목은 ‘사랑, 사랑, 사랑입니다.’였다.

아마도 성서의 정신, 예수의 정신을 강해한 설교가 아니었을까 한데… 어쩌면 성탄절 설교 였던 것도 같고…

아무튼 이번 우리 부부의 시간 여행길에서 얻어 곱씹는 말은 비록 진부하다 할지라도 바로 ‘사랑, 사랑, 사랑’이다.

신에 대한 사랑, 사람에 대한 사랑, 오늘의 내 삶에 대한 사랑.

이 쪽이면 어떻고 저 쪽이면 어떠랴! 무릇 모든 귀향은 사랑인 것을.

조카딸

이틀 먼 길 다녀 돌아온 밤, 삶과 죽음 그리고 신(神)에 대한 생각에 잠겨본다.

달포도 채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애틀란타에 사는 매제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었다. 평소 건강 하나는 자신할만한 사람이었기에 그 소식 듣고도 큰 걱정은 하지 않았었다. 한 주 후에 들려온 소식은 매우 심한 중병 상태로 치료 과정에 들어섰다고 했다. 그리고 또 한 주가 지나자 병원의 모든 치료를 중단했다는 것이었다.

아뿔싸! 큰 일 당하기 전에 가서 얼굴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어제 아침 비행기를 예약 했었다. 그러다 지난 수요일 들려온 소식,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우연이었지만 내 비행기 예약시간은 매제의 장례예배 시간에 딱 맞추어 있었다.

그렇게 매제가 떠나간 모습을 보고 돌아 온 밤이다.

일남 삼녀, 우리 네 형제 부부 여덟 가운데 가장 먼저 떠난 사람이다. 나이 일흔 둘. 이제 우리 세대 차례가 된 모양이다.

오늘 아침, 매제의 손길 하나 하나 가까이 느낄 수 있었던 그가 가꾸어 온 뜰을 걸으며 매제의 삶과 죽음, 그를 떠나 보낸 여동생과 조카 딸, 손녀, 손자 – 그 개개인의 삶에 간섭하시고 함께 하시는 신에 대한 생각에 빠졌었다.

오늘 두어 시간, 조카와 함께 먼저 떠난 아빠와 남은 엄마 이야기,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시간들은 내 일생 귀한 추억으로 남을 듯하다.

그 참 좋은 시간을 허락해 주신 신께 감사 드리는 밤이다.

삶과 죽음은 하나로 연결되어진 과정에 불과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만, 죽음은 여전히 아픔이고 슬픔이다.

매제의 자랑이었던 조카딸을 위해 기도 드리는 밤에.

말표 운동화

운동화를 하나 샀다. 딱히 내가 가난하거나 검소한 때문이 아니라, 입성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는 편인지라 옷이나 신발 등속은 그저 편하면 대만족이다. 한번 좋다 싶으면 다 헤어져 꿰메 입고 걸칠만큼 가까이 두고 사는 편이다.

지금 신고 다니는 운동화는 뒷굽이 거의 달아 없어질 만큼 신었으니  족히 오년은 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도 내가 검소하거나 가난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는 까닭은 그 사이 몇 켤레 새 것들을 사놓고도 신지 않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단지 불편해서다.

오늘 산 운동화는 제법 마음에 들게 편하다.

새로 산 까만색 운동화를 신고 떠오른 아주 오래된 옛 생각이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녔을 때 줄곧 신고 다녔던 운동화는 말표 운동화였다. 고등학교 때는 학생화라고 해서 가죽구두를 신고 다니던 아이들도 있었다만, 나는 줄곧 까만색 말표 운동화였다. 학교에서는 그런 차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문제는 교회였다. 일요일에 교회에서 만나는 친구들은 많이 달랐다. 다니는 학교들도 서로 달랐고, 아무래도 편한 일요일에 만나는 친구들이라 입성들 차이가 눈에 띄곤 했었다.

그 때만 해도 나이키 등속의 외국 브랜드는 커녕 국제상사의 프로스펙트 등의 국산 브랜드도 나오기 전이었다.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겠다만, 그런 브랜드 제품을 흉내낸 유사 제품 운동화를 신고 교회에 오는 친구들이 제법 있었다.

그 무렵 어느 날이었다. 또래 계집아이 하나가 제 친구에게 나직히 소근거리는 소리를 들었었다. “재는 촌스럽게 맨날 말표 운동화야!” 나를 향한 소리였다.

예나 지금이나 ‘촌스럽다’는 말이 내겐 거슬리지 않아, 까만색 말표 운동화를 신고 다니며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그 아이와 같은 대학교를 다니며 때때로 흰색 말표 고무신을 신고 다니곤 했었다.

오십 년 세월도 훨 지난 옛이야기다.

어찌어찌 오십 년 전 그 옛 친구들을 한 번 만날 요량이다.

말표는 아니다만 까만 운동화를 신고.

  • 지난 주일에 거둔 글라디올러스 구근들을 말리고 정리하여 보관하다. 내년 여름을 위하여.
  • 올 늦봄에 거둔 튤립 구근들을 심다. 내년 봄을 위하여.

난국 亂局에

지난 한 주간은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기분 좋게 시작했던 월요일이 지나자 아내가 몸이 좀 이상하다고 했다. 그렇게 아내는 두번 째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앓았다. 일이 꼬이는 데에 특별한 까닭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그저 사람사는 일일 뿐.

아내가 눕자 기계 고장이 동시에 일어나 가게 일이 엉망으로 꼬여 버렸다. 이즈음은 사람 구하기도 힘들고 세탁기계 수리업자들을 제 때 부르는 일도 어렵다.

일은 계속 쌓여 가는데 손님들과의 약속은 제 때 지켜내지 못하니, 일에 대한 강박은 뒤로 미루더라도 불만을 토해 내는 손님들을 감당하는 일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 주간을 보냈다.

두려운 것은 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생각에 이르니 아직 나는 한창 일하고 배울 나이다.

하루 사이 기온이 뚝 떨어져 옷을 껴 입고 뜰 일을 하다. 여름 내내 뜰을 화사하게 꾸며 주었던 글라디올러스 구근들을 거두었다. 다음 주에는 튜립 등 봄을 위한 구근들을 심어야겠다. 신이 날씨를 허락해 주신다면.

아내는 아직 코로나 양성 반응을 보이고 있고, 가게 일도 정상으로 돌아가려면 하루 이틀 더 걸릴 듯하다.

* 오늘 오후에 필라델피아 좋은 벗들이 함께 하는 총체적 난국에 빠진 대한민국 윤석열 정권 타도 모임에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

** 모든 난국이란 끝이 있기 마련!

시월에

시월, 가을이다.

딱히 곰곰 따져 볼 일도 아니다. 모든 계절은 늘 오자마자 가버렸다. 이 가을도 역시 그럴 것이다.

하여, 오늘이야말로 내가 살아있음에 대해 감사하고 즐거워 할 일이다.

이제 누구나 다 겪으며 갔던 길, 늙음, 아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만나게 되는 길목 초입에 들어서는 나이지만, 아직 내 코 앞에 다다른 일은 아니라는 생각으로  꿈꾸어 본다. 그저 이제껏 살아왔듯 두려움보다는 감사함으로 이 길을 걸어갔으면 좋겠다.

오늘,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계절을 맘껏 누리고 사는 하루를 위해  아내와 함께 가을 정원을 걸었다.

이런 날엔 내 일상 속에서 살아 숨쉬며 나와 함께 하는 신을 만나곤 한다. 그래 또 감사다.

내 뜰에도 가을이 내려앉아 머문다.

아름다운 날, 가을이다. 비록 또 떠날지라도.

하늘

아침 하늘이 아름답게 다가오는 날은 참 기분이 좋기도 하기도 하지만, 한 켠으론 왠지 불안한 마음이 꼬리를 달곤 한다. 그냥 늘 그런 기분일 뿐, 매양 평범한 일상이 이어졌다만.

오늘도 그랬다. 참 멋진 내 일터의 아침 하늘이었다. 더더군다나 가을 아침의 상쾌한 아침! 그저 살아있는 것에 대한 감사가 절로 이는 아침이었다.

내 일상은 특별할 것 하나 없이 여느 날과 다름없이 그저 그렇게 일에 빠져 지낸 하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 마치고 돌아온 저녁까지 딱 무어라 찍어 말할 수 없는 즐거움과 기쁨이 이어진 하루였다. 딱히 불안한 기색을 느낄 조차 없이.

아마 뉴스 탓이었을게다.

조국(祖國)의 조국(曺國)선생 가족과 아수라였던 그 성남(城南)에서 제 정신 하나 세우고 살아온 듯한 정치인 이재명 선생 가족이 한가위에 얼굴 맞대는 시간 누릴 수 있다는 소식에.

혹시나 하여 곰곰 따져 본다. 내가 경험했던 시간들과  옛 사람들이 남긴 이야기들에 귀 기울이며.

맞다! 세상은 아름다운 쪽으로 흘러간다.

그저 불안함은 늘 내 몫일 뿐.

무지개

떠나는 여름이 부린 심술이었다. 연일 95도를 넘나드는 뜨거운 한 주간을 보냈다. 지친 몸과 맘 추수리라는 위로처럼 어제 오늘 비가 추적인다.

조금은 느긋한 게으름까지 즐기며 읽은 책,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가 쓴 <좌파의 길/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이다. 원제는 그냥 <식인(食人) 자본주의, Cannibal Capitalism>이건만 구태여 ‘좌파의 길’이라고 명한 역자의 의도는 너무 나간 듯 하다. 물론 꼼꼼히 달아 놓은 역자의 주석들은 칭찬할 만하였다.


오늘 내가 사는 세상을 ‘식인 자본주의’체제라고 명명한 저자는 이 시스템으로 인해 인류는 멸종 직전에 놓여 있다고 주창하며, “우리는 끝장 났는가?(Are we toast?)”라는 물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저자는 자본주의를 경제체제로 한정 지어 이해하는 한,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위기와 모순들을 해결할 방안을 찾기 어렵다며, 자본주의를 옛날 봉건체제처럼 ‘제도화된 사회 질서(an institutionalized societal order)’로 이해해야만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은 착취, 수탈, 인종주의, 식민화, 페미니즘, 생태, 자연, 환경, 국가, 금융, 부채, 정치 위기 등등 자칫 머리 아프게 느낄 만한 주제들을 다루면서도 매우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특별히 제3장 <돌봄 폭식가: 생산과 재생산, 젠더화된 위기>는 출산, 육아, 교육, 의료, 노인문제에 이르는 이른바 사회보장에 대한 현 자본주의 체제의 폭식성과 위험들을 잘 이해할 수 있게 이끌어 준다.

또한 이른바 슈퍼펀드(Superfund)로 잘 알려진 미국 내 폐기물 오염 정책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들은 그 정책으로 직격탄을 맞는 내 생업인 세탁업의 현실을 생각하며 고개가 절로 끄덕거리게 하였다. 돌봄 문제와 마찬가지로 비록 진보적인 국가 자본주의적 규제가 자칫 ‘가난한 공동체들(전부는 아니지만 다수는 유색인 공동체였다)’에게 책임을 떠안기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는 것이다.

에필로그인 <펜데믹, 식인 자본주의의 광란의 파티>는 지난 삼사년 간 내 생활현장에서 겪은 일들과 연관되어  있어 저자가 말하는 ‘식인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었다.

저자는 마지막 장인 제6장 <진정한 대안의 이름으로: ‘사회주의’의 재발명>에서 ‘식인 자본주의’를 벗어나 사람들이 자유롭고 민주적으로 사람 답게 살 기회를 만들 제안들을 하지만, 그가 “아직 가설에 머물러 있다.”라고 고백할 만큼 명쾌함은 담지 못했다.

트럼프와 바이든을 벗어 나지 못하는 오늘날 미국을 향한 저자의 개탄과 함께 이런 미국을 쫓지 못해 안달하는 가히 광기에 휩싸인 윤석열 집단까지 생각나 책장을 덮으며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였지만, 이 암울한 시대를 이겨내고자 머리를 맞대고 오늘을 고민하며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들도 차고 넘치니 또 희망을.

**엊그제였다. 해가 쨍쨍 이글거리는 대낮에 내 일터 저편 하늘에 큰 무지개가 떳었다. 신기했다. 잠시 후 가게에 들어선 손님 하나가 하는 말, ‘윌밍톤에는 비가 엄청 내렸다네요.” 내 가게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곳에는 비가 많이 내렸단다. 내가 서 있는 곳에는 해가 쨍쨍했건만.

무지개- 무릇 신과의 약속이란 신이 그렇게 약속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만 현실이 되는 법이다. 하여 믿음이고 신앙인데… 옛사람들 발끝에도 닿지 못할 저열하고 치졸한 욕망들을 믿음으로 치부하는 한, 무지개란 그저 허망한 일시 치장일 뿐.

*** <기나긴 인종주의 역사에서 이 말(식인食人)은 아프리카 흑인들을 묘사하는데 주로 쓰였는데, 실은 이들이야말로 오히려 유럽 제국주의의 식인적 약탈의 희생자들이었다.>- 책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