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딸

아내는 미역국을, 나는 곰국을 끓인다.

아내는 장모님께 배운 솜씨로, 나는 어머니 흉내로. 어머니와 장모가 우리 내외에게 쏟았던 정성과 기도 위에 우리들의 정성과 기도를 더해 끓인다.

새 생명 품어 낳는 수고에 지친 며늘 아이와, 반쯤 얼이 빠져 있는 내 아들과 우리 내외가 이제껏 누리지 못했던 새로움으로 다가 온 새 아기를 위하여.

아프리칸 코리안 아메리칸으로 신비하게 우리 곁에 손녀딸이 온 날.

*** 선물 받은 모자와 머리띠를 아기가 쓰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쓸모에 – 2

어머니와 딸. 한국전쟁 통에 가족의 반을 잃은 어머니는 기지촌의 아픈 기억을 안고 백인 남편의 고향 미국 서부 아주 보수적인 시골 마을로 이민을 온다. 아버지가 다른 오빠와 함께 한국에서 ‘튀기’로 놀림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 딸은 어머니를 따라 온 미국 땅에서 ‘노랑이 혼혈’ 이민자 취급을 받고 자란다. 오빠는 그래도 ‘한국에서 받은 차별 보다 여기(미국)가 낫다’는 생각을 드러내곤 한다.

꿋꿋하게 새로운 삶에 적응해 나가던 어머니에게 정신병(조현병 調絃病, Schizophrenia)이 찾아온다. 어머니가 정신줄을 놓았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을 돌아보는 딸의 기록이다.

<수십 년이 지난 후 나는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며 이 순간을 내 한(恨)의 시발점으로 여기게 된다. 한이란 “불의에 대한 풀리지 않는 억울함”이자 “맺혀서 풀리지 않는(…) 멍울”, “응어리진 비통함을 가리키는 번역 불가능한 한국어다. 한은 지속되는 트라우마에 대한 인식, 그것이 풀리지 않는 상태를 지칭할 뿐 아니라, 그 풀이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딸은 어머니의 죽음을 세 번 맞는다. 어머니가 정신병이 들었을 때, 어머니가 기지촌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리고 마지막 어머니가 육체적 죽음을 맞았을 때이다.  

딸은 어머니의 첫번 째와 두번 째 죽음을 사회적 죽음이라고 이르면서 그 죽음의 원인를 쫓아간다. 그 이야기를 담은 책 <전쟁 같은 맛>은 한(恨)을 곱씹듯 아리고 쓰리다.

딸이 그 죽음의 원인을 쫓다가 토로하는 단말마(斷末魔)이다. “진실은 너무나도 복잡했다.”고.

어머니와 딸의 교감 통로는 음식 만들기와 식탁이다. 4부 15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새로운 부가 시작될 때마다 그 부에서 이야기하려는 내용을 대신하는 인용문을 소개한다.

제4부를 여는 인용문 중 일부이다. <우리는 이 식탁에서 아이를 낳았고, 부모를 묻을 준비를 했다. 이 식탁에서 우리는 기쁨으로 노래하고 슬픔으로 노래한다. 고통과 후회의 기도를 올린다. 감사를 드린다. 어쩌면 세상은 식탁에서 끝날는지도, 우리가 울고 웃으며 마지막 달콤한 한 조각을 베어 무는 사이에.>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내 가족들을 생각하며 눈물 여러 번 찔금 흘렸다. 삼팔선을 넘은 것은 달랑 오누이 뿐이었다. 전쟁이 나자 오빠는 고향을 찾아 간다며 어린 누이를 지인에게 맡기고 군에 입대한다. 그리고 감감무소식 행방불명이 되었다. 어린 누이를 맡겨 놓은 곳은 접경지역이었던 기지촌 인근. 천만다행으로 어린 나이에 미군 부대에서 일하던 이웃 청년 어머니 눈에 들어 신랑 만나 해로하셨던 내 장인 장모.

아직 다 지우진 못한 우리 내외와 아이들의 이민생활 응어리, 음식 대접하고 나눠 주시길 즐겨하셨던 어머니 역시 당신이 살아계심을 증명코자하는 몸짓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기 까지….  그리고 이즈음의 아버지 식탁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생각이 겹쳐.

딸이자 책의 저자인 그레이스 조가 강단에 서서 학생들에게 묻는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의 개념인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라는….게 무슨 뜻인지 기억나는 사람?’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설명.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란 무력으로가 아니라 문화적 신념이나 실천으로 규범을 규제하도록 설계된 제도를 말해요. 경찰이나 군대 같은 ‘국가기구’는 무력으로 사회를 규제하죠. 반면 언론이나 학교 같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는 생각을 통해 규제해요.”

양공주, 국제결혼자, 이민자, 정신병자 등등 규제되어 버린 생각의 틀에서 정형화되어 따돌림 당하는 예들일 것이다.

이쯤 다시 쓸모있음에 대한 생각들.

그저 내가 사는 곳에서 오늘 부딪치는 일들에서, 어떤 분야에서 건 간에 내 생각의 틀을 옥죄어 나를 통제하려는 힘에 대항하고 항거하고 싸워 이겨 나가는 일, 바로 쓸모 있는 일 아닐까?

내 세탁소에서

쓸모에 -1

몇 해 전 어머님 돌아가셨을 때에도 눈물 나오지 않아 이젠 눈물샘 말랐구나 했었다. 헌데 그게 아니었다. 주말 사흘 눈물 질금질금 흘리며 보냈다.

영화 두 편과 소설 한 권을 읽으면서다. 기자다운 기자(記者) 이상호가 만든 영화 전투왕, 이즈음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서울의 봄’과 그레이스 조가 쓰고 주혜연이 번역한 책 <전쟁 같은 맛>들이다.

영화 전투왕은 기자 이상호가 반란 수괴 전두환을 서른 해 넘게 쫓아다닌 기록과 함께 ‘왜?’ 그가 그리 행동했는가를 그린 영화이다. 이상호가 쫓은 것은 전두환 개인이 아니었다. 전두환이라고 일컬어지는 하나의 큰 세력의 본색을 드러내고자 하는 쫓음이었다. 영화 속 이상호나 현실의 이상호나 오늘도 여전히 큰 벽에 가로막혀 마치 그의 기자 노릇이 허망한 듯 여길 수도 있겠다.

영화 속에서 이상호는 연세대 정문 앞에 놓인 이한열 표석을 설명한 뒤, 이한열 열사가 쓰러진 몇 발작 뒤 당시 그가 도망치듯 서 있던 자리를 지적하며 ‘여기엔 도망자의 표석을 세워야…’라며 아픈 마음을 표한다.

평생 기자다운 기자로 살아가는 정말 쓸모 있는 기자 이상호의 시작은 이한열 죽음의 뜻을 품기 시작한 때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자칫 허망할 듯이 이어져 온 그의 몸짓들이 정말 쓸모 있는, 기록될만한 기자 정신이었음을 기릴 날이 곧 올 수 있기를…

다른 시간, 같은 장소에 서 있었던 추억이 겹쳐 몇 차례 눈물 찔금.

그리고 영화 <서울의 봄>.

왜 필라 나들이만 하면 날이 이리 궂은 지! 영화를 보고 내려오는 길,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비가 쏟아져 자꾸 나이 탓을 하며 내려왔다.

영화는 영화일 뿐.

지나치게 전두광과 이태신이라는 인물 중심으로 흐른 영화적 상상은 자칫 당시 쿠데타 세력과 동조세력, 그리고 눈치 빠르게 권력에 기생하는 집단을 묘사하는 데는 조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태신의 마지막 대사. “넌 대한민국 군인으로도, 인간으로도… 자격이 없어.”

이 영화를 만든 이가 뱉고 싶은 말 아니었을까?

쓸모없는 인간에 대한 규정!

눈물 흘릴 구석 없는 영화인데 두 차례  찔금 찔금.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

그리고 소설 <전쟁 같은 맛>

이 이야기는 길게 써야 마땅하겠다만 단지 “쓸모”에 대하여.

저자 그레이스 조의 어머니가 삶이 무너져 가는 순간에 던진 “이젠 쓸모없다.”라는 한 마디를 되새기는 대목이다.

<여러 해에 걸쳐 나는 무엇이 엄마를 쓸모 없다고 느끼게 했는지. 그 원인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해줄 작은 조각들을 모으고 또 모았다. 사람이 아닌 사물 취급을 받으며, 엄마는 당신 삶이 쓸모 없다는 메시지에 둘러싸여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건 주변사람들이 한국 사회가 심지어 당신의 가족이 보낸 메시지였다. 엄마는 한국을 탈출했지만 미국 사회에서도 당신이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쓸모없다’던 엄마를 통해 ‘쓸모 있는 삶’에 대한 학구적 노력을 하게 된 주인공 이야기에 시간과 공간을 많이 겹쳐 살아온 내 생각으로 여러 번 찔금 거렸다.

첫눈에

눈 내리면 덜컥 앞서는 걱정들,  눈치우는 일과 미끄러운 거리 운전. 지난 해 보다 걱정의 크기가 좀 더 커진 듯.

눈 내리는 날에 약속한 사람도 없고, 만나야 할 사람도 없고, 기다릴 사람도 없고, 그리운 사람도 없고

문득 바람 들어 먼 길 나설 나이도 아니고

그렇다 하여도 첫 눈인 것을.

새참으로 라면 끓여 아내와 뜨거운 국물 후루룩

‘아휴! 시원타!’

옛 이야기

필라델피아에서 영화 <서울의 봄>이 상영된단다. 이 소식을 들은 필라민주동포 모임 벗들이 단체 관람을 하자고 이른바 번개모임을 제안했다. 그 소리 듣고 더듬어 보는 그 시절 옛 이야기다.

내 기억에는 박정희 죽음의 날인 1979년 10월 26일 보다, 이른바 국장이라고 불렀던 그의 장례식 이 있던 날 그해 11월 3일 신문로 사거리 모습이 깊게 각인되어 남아있다.

당시 나는 영세하다는 말조차 호사스러울 만한 아주 작은 출판사를 하면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었다만, 나는 그저 백수였던 시절이라고 말하곤 한다. 박정희의 죽음이 알려진 후 나는 제적을 당해 쉬고 있었던 학교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날 11월 3일, 지금 생각하면 할수록 웃기는 당시 모습이지만 그만큼 유신독재가 얼마나 허약한 지경에 이르렀었냐는 것을 알려주는 한 장면이 되지 않을까? 아직 이십 대 중반 나이였던 내게 툭하면 달라붙어 다니던 담당형사가 있었다. 나이 스물 대여섯인 내가 알면 뭘 알았겠으며 하면 또 무슨 일을 꾸몄겠나? 모두 독재의 허약함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날 이른 아침부터 집을 찾아 온 형사가 ‘오늘 하루는 집에 있어야만 한다’며 내 집 앞을 지키고 있었다. 장난기가 동한 나는 그를 설득했었다. ‘대통령이 떠나시는 역사적 날인데 함께 구경 한번 갑시다. 내가 뭐 형님 따돌리고 도망을 가겠소. 누굴 만나기나 하겠소. 그냥 조용히 함께 장례 구경이나 하고 옵시다. 같이 집에 있었다고 보고하면 끝 아니오? 언제 이런 구경 한번 하겠소.’

그렇게 나섰던 신문로 사거리 풍경에 나는 절망했었다. 내 마음 속은 축제의 날이었건만 거리를 가득 메운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룬 사람들은 마치 제 부모를 잃은 양 통곡을 하고 있었다. 마치 이야기로만 들었던 고종황제 국장을 보는 듯했다.

내게 서울의 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삼월, 복교가 된 학교로 돌아갔다. 당시 학교 영자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었다. ‘학생은 학생으로서, 선생은 선생으로서 모두 제 자리에서 제 할 일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마지막 남은 일년 대학생활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돌아간 학교였다.

3월 하순부터 학교는 들끓고 있었다. 4월 사북 탄광 노동항쟁 소식으로 그 열기는 더해갔다. 5월 들어 이런저런 흉흉한 소식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5월 13일 가두시위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5월 15일 서울역 광장 회군으로 알려진 그 날부터 나는 도망자가 되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언론은 온통 사기질이었다.

돌이켜 볼수록 내가 한 일이라곤 부끄럽기 짝이 없을 정도로 거의 아무 것도 없었다. 성명서 몇 번 쓴 일, 후배들 앞에서 몇 차례 내 의견 표현을 한 일이 고작이었다. 무슨 투철한 이념으로 무장한 혁명투사 또는 새빨갛게 물든 빨갱이는 커녕 그저 좋은 세상,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 꿈꾸며 사는 지극히 평범한 이십 대 청춘이었다. 나이 들어 이제 그 세상의 크기는 점점 작아져 이젠 ‘내가 만나는 사람들 만’이라도 하는 지경이 되었다만…..

그리고 6월 어느 날, 아주 건장한 몸집의 사내 예닐곱명이 내 작은 몸을 까만 세단차에 꾸겨 넣었다. 그렇게 끌려 간 곳이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백열등이 환한 밀폐된 조사실이었다. 건장한 사내 셋에게 완전히 발가 벗겨진 내게 한 사내가 권총으로 내 왼쪽 가슴을 툭툭 겨누며 말했다. ‘너 같은 놈 하나 죽여 파묻어도 아무도 묻지 않는 세상이야!’ 그렇게 치도곤이 시작됐었다.

내 기억 속 그해 서울의 봄이다.

아직도 나는 무지개가 뜨면 홀리곤 한다. 좋은 세상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는 생각으로.

전두환과 그 무리들 보다 못한 윤석열 패거리들이 발호하는 뉴스들을 보면서도 내가 희망을 놓지 않는 까닭이다. 비록 아직도 답답하긴 하다만, 1979년 11월 3일 그 신문로 사거리의 국민들이 자각한 민중 또는 깨어 있는 시민으로 놀랄만한 변화를 이룬 것을 보면 희망은 서서히 이루어져 왔고 또 그렇게 이루어 질 것이다.

다만 그 때 보다 더욱 추해지는 언론 환경은 가히 혁명적 변혁을 요구하고 있다만.

옛 생각하며 영화 ‘서울의 봄’을 보러 가야겠다. 그리고 옛날 처럼 조용히 윤석열 패거리들을 몰아내자는 피켓 하나 들어야겠다.

대나무

농사 짓는 친구 안병덕이 짧게 짧게 가르쳐 주는 식물과 사람살이 강의 재미가 쏠쏠한 이즈음이다. 산업공학과 전산 쪽을 공부하고 이른바 대기업에 입사해 그 계열사 중 한 곳에서 최고위직까지 지낸 그가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게 족히 25년은 되지 않을까?

매사 성실했던 어릴 적 모습 그대로 그는 오늘도 농사 짓는 일에 충실하다. 이제 그는 식물과 사람살이 역사, 나아가 사람과 식물이 더불어 사는 세상을 가르친다.

어제 그에게서 배운 것 하나. 대나무는 나무가 아니라 벼나 밀, 옥수수 등과 같은 벼과에 속하는 식물 곧 풀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그 가르침 읽고 ‘아하! 그랬구나.’하며 몇 년 간 했던 내 고생을 떠올리며 웃었다.

나는 몇 그루의 소나무들과 전나무 그리고 대나무를 키웠었다. 개나리, 진달래와 함께 그들은 내가 마치 서울에 사는 듯한 느낌을 선사하곤 했다. 문제를 일으킨 건 대나무였다. 대나무의 번식과 생장 속도는 생각보다 엄청 빨랐다. 급기야 이 놈들이 경계를 넘어 이웃 집을 침범하고 말았다. 그게 주법(州法)을 위반한 일이었음을 그제야 알았었다. 대나무는 땅 속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서 키워야 한다는 사실을. 부랴부랴 대나무를 다 자르고 그 뿌리조차 없애는데 무려 4년이 걸렸다.

내 친구 안병덕이 대나무의 번식력과 생장속도 그리고 끈질긴 생명력을 다시 생각 하게 했다. “아하 그게 풀이였구나!”

농사 짓는 친구가 또 하나 있다. 경북 봉화에서 각종 농사를 다 짓고 있는 오시환이다. 대기업 홍보파트에서 잘 나간다고 알고 있었던 그를 뉴욕 한인 식당에서 우연히 마주친 게 아마도 거의 이십 년 넘는 일일게다. 그 때 나는 ‘설마?’했었다. 그가 식당 주방을 들락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루 밤 사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또 헤어졌다.

그가 봉화에서 농사 짓고 있는 모습을 본 것은 페북을 통해서였다. 그는 내가 아는 한 삶을 즐기는 참 농사꾼이다. 그는 작가이자 화가, 사진가이자 한글 운동가, 제법 도튼 불자이자 사회 운동가이다. 달 포 전 한국여행 중 봉화를 들리지 못한 게 아직도 아쉽다.

그는 종종 풀과 놀고 풀과 싸우는 모습을 페북에 올리곤 한다. 문득 그가 풀 같은 생각이 든다. 마치 대나무 같은.

땅이 아니라 사람 마음 밭 갈아 좋은 세상 만들어 보자고 밭갈이 하는 친구가 하나 있다. 대전 대화동에서 목회하는 목사 김규복이다.

‘왜 그럴까? 왜 그 젊은 시절 지녔던 생각들 다 버리고 바뀌었을까?’ 그가 세태를 한탄하며 굵은 눈물 한 방울 뚝 떨구었다. 그는 그냥 앓고 있는 병 탓에 떨군 눈물일 뿐이라고 했다만, 가슴에 차마 터트리지 못한 눈물 보따리 하나 안고 사는 듯 했다.

허나 그는 결코 그 보따리 터트리지는 않을 듯. 그 보따리는 그 밭을 일구는 거름인 것을. 이쯤 그는 대나무 농사꾼.

아직은 아닌 듯 싶은데 밤운전으로 이웃 도시 필라델피아를 오가는 일이 버겁게 느껴진 어제였다. 아마 빗길과 짙게 깔린 밤안개 때문일 뿐, 나이 탓이라고 생각하기엔 이르다.

살며 뜻 맞는 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처럼 즐거운 일이 무에 있으랴! 민주, 평화, 통일 나아가 사람사랑 운동으로 반 백년 이민 생활을 일관하고 있는 김경지선생, 이민자들 권익과 다음세대 바르게 터 닦는 일에 전심하는 참 좋은 벗 이종국, 김성규를 비롯하여 세월호,이태원 참사의 아픔을 공유하며 정말 좋은 세상이 되는 우리들의 모국을 꿈꾸는 필라 민주동포 모임의 벗들과 함께 한 좋은 시간을 다시 새기며.

암만, 우리 모두 울타리 필요없이 뿌리 얽히고 설켜 빠르게 세를 키워 좋은 세상 영역을 넓히는 대나무인 것을.

늙막에

늙막에 한 뼘 땅 가꾸며 깨달은 사실 하나. 꽃이든 푸성귀든 밭이 되려면 그저 애지중지 그 땅 곁에서 내 손길 주어야 한다는 거,

쉽다고?젠장! 내겐 그게 그리 힘들더라고.

잠깐 한 눈 팔거나 내 급한 일에 한 순간 정신 쏟다보면 온통 밭은 밭이로되 잡초밭인 것을.

꽃밭, 텃밭 제대로 만드는 일. 그냥 내가 꽃이 되거나 푸성귀 되는 일.

그게 가장 쉬운 것을.

*** 늙막에 대한 느낌은 저마다 다를 터, 이르게 느끼게 해 주신 신께 감사드리며 사는 쪽.

이야기

가을비일까? 겨울비일까? 비에 젖어 처진 잎들이 아직 가지에 달려 있는 것을 보면 가을인데, 이웃집 앞뜰은 이미 성탄인 것을 보면 겨울인 듯도 싶고… 을씨년스런 11월 마지막 일요일도 저문다.

몇 주 전 서울에서 여성 성가 합창곡 악보책을 구한다고 교보문고를 찾았던 아내를 따라 나섰다가 손에 넣어 들고 온 책,  로버트 알터(Robert Alter)가 쓴 <성서의 이야기 기술 The Art of Biblical Narrative>에 빠져 하루를 보냈다.

흔히 구약이라 부르는 히브리성경을 문학비평적으로 해석한 책이라고 하는데, 그냥 나 같은 얼치기도 쉽게 빠져 술술 읽을 수 있는 독자 친화적(?)인 책이다.

번역자는 제목에만 ‘이야기’라고 했을 뿐 본문에서는 ‘내러티브(Narrative)’로 일관되게 사용하면서 친절하게 그렇게 번역한 까닭까지 옮긴이의 말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만 나는 그저 줄기차게 ‘성서이야기’로 읽었다.

저자  로버트 알터(Robert Alter)가 히브리성서의 문학비평적 해석이라는 학문적인 노력을 지속한 까닭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성서 이야기는 인간이 시간이라는 매개체 속에서 변화를 거듭해가며 하나님을 직면하면서 살아야 하고 다른 인간들과 끊임없이 그리고 복합적으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기본적 인식을 구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인간들이란

<성서의 작가들이 그들의 기술을 통해서 알고자 한 것은 분열된 의식을 가진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의 의미이다. 형제를 사랑하지만 미워할 때가 더 많은 존재, 아버지를 원망하고 업신여기기도 하지만 또한 자녀로서 깊은 존경심을 가지는 존재, 형편 없는 무지와 불완전한 앎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존재, 격렬하게 스스로의 독립을 주장하지만 신이 계획한 사건들 속에서 붙잡혀 사는 존재, 외적으로 확고한 성품이지만 내적으로는 탐욕, 야망, 질투, 욕망, 경건, 용기, 열정, 그리고 그 이상의 것들을 품은 불안정한 소용돌이 같은 존재가 인간이다.> 라고 말한다.

이런 인간들과 신과의 관계를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히브리성서(구약)의 문학비평적 접근이 필요함을 강조하는 이 책의 마지막 문단이다.

<히브리 성서의 작가들은 살아 있는 듯한 인물과 행동을 기교 있게 그려내면서 분명히 즐거움을 느꼈고, 그 결과 수백 세대에 걸친 독자들에게 사라지지 않는 즐거움을 줄 자료를 만들었다. 그러나 상상력이 풍부한 이 놀이의 기쁨에는 한편 거대한 영적 절박함이 배어 있다. 성서의 작가들은 복잡하고 때로는 매혹적인, 종종 격렬하게 개성을 고집하는 인물들을 만들어냈다. 그 이유는 각각의 남녀가 하나님을 영접하거나 무시하고, 하나님에게 응답하거나 저항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띠는 것이 고질적인 인간의 개성이기 때문이다. 이후의 종교적 전통은 우리로 하여금 대체로 성서를 즐기기보다 심각하게 대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역설적인 진리는 성서의 이야기를 좀 더 온전히 이야기로서 즐기는 법을 배울 때 그들이 우리에게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위험할 정도로 중요한 역사의 영역에 대해서 말하고자 했던 바를 보다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긴 이야기를 몇 개 문장으로 소개하는 일은 무지, 무엄한 일이 되겠다만 손에 들면 놓지 못할 만큼 흥미로운 책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구약 성서 속  많은 이야기들과 인물들을 나는 성서를 읽기 전 아주 어릴 적에 이야기로 전해 들었다. 유, 소년기에 들었던 그 이야기 속 인물들과 사건들은 머리 굵어진 후 성서를 읽거나, 나름 이런저런 학문적 또는 신앙적 해설서를 읽으며, 나아가 내 삶의 경험과 이웃들의  경험 속에 투영된 모습들을 통해 끊임없이 여러 모습으로 변하며 내게 다가왔다.

저자 알터(Alter)의  말마따나 수백세대를 이어져 온 이야기를 이제 저물어 가는 서녘에 서서 내 이야기로 되뇌어 본다.

마침 오늘 아침, 오랜 옛 벗이 우리들의 어릴 적 옛날 사진 몇 장을 이번 한국 방문을 계기로 만들어진 단톡방에 올려 놓아 내 되뇌임을 도와 주었다.

그렇게 다시 떠올려보는 몇 주 전 한국방문 때 들었던 홍길복목사의 설교 제목과 성서 본문이다.

그날의 설교 제목은 <목표 다시 가다듬기>였는데 영어로는 <Rebuilding our Final Goal>라고 되어 있었다. 이제와 곰곰 생각해보니 <목표 다시 가다듬기>와 <Rebuilding our Final Goal>는 하나로 연결되어야 마땅한 것이었다. 일테면 ‘마지막목표 바로 세우기’정도로.

그날의 성서 본문이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립보서 1:20-21>

그렇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라는 축복을 깨달을 나이가 되었다. 이제 내 이야기가 성서 이야기가 되어야 하고, 성서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비단 내게만 부여된 축복은 아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려는 모든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은총이다.

이쯤 을씨년스럽던 11월 마지막 일요일은 내게 감사다. 다가오는 성탄도. 다시 맞는 겨울도.

시간여행을 끝내며- 황금시대

부일이와 정일이 아버님 최창한장로님께서는 까까머리 고등학생이었던 우리들에게 ‘Golden Age(황금시대)’라는 말을 즐겨 하셨다. 십대 나이야 말로 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멋진 시절이므로 알차게 보내야만 한다는 당신의 속 깊은 충고를 담아 내신 말씀이었다. 허긴 그 나이에 그 충고가 귀에 들어오기나 했었겠냐마는.

이제 노년의 초입에 이르러 대현교회 최장로님의 충언의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어 본다. 바야흐로 내가 서 있는 오늘이야말로 나에겐 ‘Golden Age(황금시대)’가 아닐런지.

여느 해 추수감사절이면 나는 음식하기에 바빴었다. 허나 오늘은 어릴 적 추석 같은 명절이면 어머니가 차려 준 명절상 즐기며 놀 듯, 아이들이 차려 준 감사절 만찬을 즐겼다. 사라진 부모님 자리를 손주뻘 아이들이 채워주었고, 우리 세대는 이제 손 움직이지 않는 처지가 되었다.

허나 혼자 있어 좋은 시간들, 혼자 있어 즐기는 시간들, 혼자 있어 감사한 시간들을 누리는 오늘이야말로 진정 삶의  ‘Golden Age(황금시대)’가 아닐런지.

이 황금시대를 구가할 수 있는 힘의 첫째 원천은 아내다. 돌이켜보면 역사 이래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전쟁회수가 천 번을 넘는다고 한다만, 우리 내외가 이제껏 싸운 회수를 따진다면 족히 그 몇 곱을 될 터. 그 숱한 전투속에 쌓인 것은 미움이 아니라 적과 아군을 넘어선 굳건한 전우애, 바로 그 사랑.

그 사랑의 결실인 우리들의 가족들. 이번 여행 중 두 처남 내외가 베풀어준 가족 사랑에 대한 기쁨과 감사도 꼭 기억해야 할 추억이다.

아내와 연을 맺어 여기까지 오게 된 길목 길목들을 따라 쫓다 보면 그 끝에 서 있는 담장이 넝쿨 뒤덮인 곳, 바로 신촌 대현교회이다.

이젠 넉넉한 맏형이 되어 계신 송영길 형님, 교회의 기둥이 된 김석수, 박성규, 안희주, 김난애 장로님들, 늙막에 들어선 우리들에게 믿음이 함께 하는 새로운 길을 바라 보라고 새 길눈 열어 주신 홍길복 목사님, 그리고 차리기 결코 쉽지 않은 잔치자리 기꺼이 마련해 주신  대현교회 최영태 목사님과 당회원 여러분들께 머리 숙여 속 깊은 감사를.

언제나 꿈속에서 들어도 반가운 병덕, 종석, 종민, 용철, 응복, 성식, 경애, 경자, 영숙, 경희 그 아스라히 언제나 그리운 얼굴들, 멀리 남쪽 진주에서 올라와 긴 이야기 나누지도 못하고 헤어진 병훈이…. 그저 만나 고마움으로.

길환이, 영환이…

그리고 규복이. 그저 끝없는 고마움으로.

우리 모두의 황금시대를 위하여!

2023년 가을에.

시간여행 -5, 함께

옛 벗들과 함께 나섰던 강화 나들이는 우연히 따라 나서게 된 까닭도 있거니와 이번 여행의 마지막 일정이기도 하여 많은 여정(旅情)을 쌓은 하룻길이었다.

그 하룻길 나들이 길잡이를 자처한 김환조목사와 강화 지킴이 송가감리교회 고재석목사님과 그의 부인이자 동역자인 우리들의 옛 친구 손명희사모 그리고 아직도 예전 십대 청춘을 구가하며 사는 듯한 차용철형님 그 모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어린 시절 교회생활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 몇 십 년이 흐른 뒤, 노년의 초입에 들어선 마당에 우연치 않게 만나 하룻길 나들이를 함께 하는 경험을 나눈다는 것은 그리 흔치 않은 일일 터. 바로 그날 우리들이 누린 은총이었다.

강화에 들어서서 첫 번 째 치룬 행사는 <강화 기독교 역사 기념관> 방문이었는데, 기념관 안내와 전시장 해설을 맡아 주신 이의 지나친 친절로 인해 ‘아뿔사! 혹시 오늘 하루는…’하는 염려가 그득히 밀려 왔었다. 허나 고재석목사님으로 하여 내 염려는 다행히 기우에 그쳤다. 지나친 친절은 기념관에서 끝났음으로.

기념관에서 내가 담고 온 두가지 <신학지남 (神學指南)>과 , <죽산(竹山) 조봉암>이었다. 한국 초기 기독교 역사 속, 당시 일천했던 신학 토대의 발판을 자처했던 <신학지남 (神學指南)>의 정신을 오늘의 한국교회와 이민교회가 잇고 있을까?하는 물음을 담고 왔거니와, 조봉암선생이 성공회 신자였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는 것, 그이에 대한 설명이 너무나도 자의적 또는 작의적이었다는 안내자에 대한 아쉬움도 함께.

역사 기념관 빡센(?) 공부를 마치고 이어진 송가 감리교회 고재석 목사님과 오랜 시간을 한국여성의 전화와 함께 사람 평등 운동과 사모 사역을 함께 해 온 손연희사모의 그 날 그들이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느낌으로 담으며 즐긴 강화 여행이었다.   

멋진 카페와 진한 국물의 꽃게탕과 오래 전 추억들을 추려 꾸민 곳에서 이어진 끝 모를 지난 이야기와 오늘을 살아가는 이야기들로 이어진 하루였다.

내게 아주 특별한 경험, 바로 김환조목사의 축도였다. 환조는 늘 밝고 활기 찬 후배인데,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야말로 배꼽이 빠질 정도로 웃음이 이어지게 마련이었다. 허나 그 웃음 뒷끝은 늘 쌉쌀하게 무언가 꼭 곱씹어야 마땅한 뒷끝이 남아 있곤 했다. 그가 목사가 되었고 오늘도 여전히 환조답게 목회를 이어가고 있다.  그날 송가 감리교회에서 엣 친구들과 송가 감리교회를 위해 드린 비나리는 내게 진한 감동이 되어 남아 있다. 김환조목사님을 위하여!

그리고 속히 유물이 되어야 할 망향대 또는 전망대 이야기.

그야말로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땅 북한과 멀리 남쪽 일산의 아파트 촌을 번갈아 바라보며 드려본 기도, 우연히 어느날 문득 여기서 저기까지 이어진 산들이 하나가 되기를… 아님, 내 믿음의 언어인 그의 섭리로.

이번 시간여행길에서 만난 산들은 그저 아름답고 부드러웠다. 한국의 산세이다. 거의 팔십년 가깝도록 아직도 꿈 같은 일이다만, 백두에서 한라까지 그 아름답고 부드러운 산들이 이어 달리는 세상을 아마…

내 어릴 적 대현교회 친구들 몇몇은 할머니 또는 아버지 따라 이북 사투리를 쓰곤 했다. 이즈음도 아내는 종종 “엄마 친척들 만나러 한 번 갈 수 있으려나?’하는 꿈 같은 이야기를 하곤 한다.

이쯤 이제 노회한 노인이 된 나는 기도를 바꾼다.  “정말 산들이 이어지는 게 어려운 일이라면, 반도의 모든 산들에게 벙커와 교통호 없는고요한 평화를…”

그렇게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