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이젠 푸근한 겨울이 좋다.’고 내심 겨울답지 않은 겨울에 감사하며 지냈더니, ‘요놈아! 내가 어디 네 놈만 아는 줄 아느냐!’며 겨울다운 겨울이 매섭게 다가온 어제 오늘이었다.

한 4인치(10센티) 정도 내린 눈이야 그렇다 쳐도 갑자기 9도(섭씨 영하 10도)까지 내려간 매서운 추위에 몸이 한껏 움추러 들었다. 모레는 눈이 4인치 정도 또 내린단다.

‘눈 치우는 일이야 운동 삼아…’하며 한 해 두 해 미루며 살았는데, 추위에 눈 치우는 일도 이젠 좀 되다.

한 서너 해 전 겨울이었나 보다. 눈을 치우는데 앞 집 사는 사십 대  Nathan이 성큼 성큼 내게 다가오더니만 ‘제가 도와 드릴게요.’하며 빠르게 눈을 치워 주었다. 내가 ‘고맙다’ 했더니 그가 맞받은 말, ‘에이고, 뭘요! 아들처럼 생각하세요.’

난 그때 속으로 깜작 놀랐었다.  그 전 해인가 앞집으로 이사 온 Nathan이 젊다는 것은 알았지만, 미국애들 특유의 겉늙은 모습 탓이었지는 나는 그를 친구처럼 생각했었는데, 그는 나를 아버지 뻘로 대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날 이후 나는 가급적 그와 같은 시간대에 눈을 치우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은근히 녀석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었다는….

이젠 우리 두 내외에게 적당한 작은 아파트로 이사할 때나 되었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래도 손녀딸이 걷기 시작하면 함꼐 놀아야 하는데… 아직은…

아이고, 이 촐랑거림이라니. 아직은 매섭게 춥고 눈 내리는 겨울 견딜만한 가 보다.

시 한 편

새해 들어 첫 주문한 책들을 받았다. 예상보다 빠르게 받았다. 손 글씨 엽서들이 동봉된 정경심 시인의 책 <나 혼자 슬퍼하겠습니다>를 먼저 집어 들었다.

첫 번째 시 <고난의 지금을 견딘다>로부터 마지막 시 <나를 울린 영치금>까지 터질 듯 터질 듯 울컥이는 맘 꾹꾹 눌러가며 책을 덮을 즈음, <당신들의 조건 없는 위로와 격려를 생각하며 반드시 살아야겠다고 아니 살아 내고 싶어서 쓴 글입니다>라는 글쓴이의 말에 기어이 눈물, 콧물.

이리 쉽게 책장을 넘기고 책을 덮을 일은 아니다. 가까이 두고 조국, 정경심 두 분과 그들의 가족들 그리고 그들 곁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 소식 들을 때 마다 한 편 한 편 곱씹어 읽어야겠다.

그녀의 시 한 편.


<결국, 사람이다>

죽음의 길을 가지 않은 것은

사람 때문이다

결국 그 길을 가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던

그가 버티고 있었고

나를 그 길로 보내 버릴 수 있었던 아이들이

집요하게 내 죽음의 멱살을 붙잡고 싸워 주었다

자신도 버티기 힘든 각자의 무게 위에 서로의 무게까지

우리는 어깨와 어깨를 맞대어

무게를 떠안고 분산 시켰다

그리고 그곳에 이름 모를 수많은 분들이 어깨를

들이밀고 우리의 어깨가 흐트러지는 것을 막아 주었다

우리를 지탱시킨 것은 우리를 살린 것은

결국, 사람이다.

새해 기도

해마다 연초 며칠은 분주하게 시간에 쫓긴다. 늘 시간이 빠듯한 구멍가게 주인들이 모두 겪는 일 아닐까? 아님 단지 이어지는 내 게으름 탓 일런지도 모르겠다. 지난 한 해 쌓인 이런저런 서류 및 문서 정리와 함께 새해를 준비하는 계획들로 새해 첫 주가 훅 지나갔다.

내친 김에 맞을 거 다 맞고 가라는 것인지, 아내와 내 자동차 등록갱신은 물론 내 운전면허 갱신 더하여 가게 리스 갱신까지 모두 올 일월에 처리하게 되어 있어 마음이 두루 바빴는데 생각해보니 그 또한 감사였다. 무릇 맞을 매란 한꺼번에 맞으면 좋은 법 아닐까?

개인적인 일들을 그러하되, 뉴스들은 지난 해나 새해나 그저 답답하다. 아니 답답함이 새해들어 더해졌다는 표현이 적합할 듯.

그 답답한 마음으로 다시 꺼낸 든 책, 스티븐 핑커( Steven Pinker)가 쓴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이다.

“내가 이 책에서 이해하려는 주제는 가정에서, 이웃에서, 부족 간에, 무장 세력 간에, 민족과 국가 간에, 그야말로 온갖 차원에서 진행되어 온 폭력 감소 현상이다.”라는 저자의 말처럼 뉴스로 답답해진 마음을 풀어주는 책이다.

어제 오늘, 이 책의 진수라 할 8장(내면의 악마들)과 9장(선한 천사들)을 꼼꼼히 음미하며 정독했다.

읽으며 되씹고 싶은 대목 중 일부이다.

<인간의 폭력은 대부분 비겁하다.>

<양측(가해자와 피해자)은 경쟁적인 시점에서 정보를 왜곡할 뿐만 아니라, 역사를 측정하는 달력도 서로 다르고 역사적 기억에 부여하는 중요성도 서로 다르다. 피해자는 근면한 역사가이자 기억의 육성자이다. 가해자는 실용주의자이고 현재에 굳게 뿌리 내린다. 우리는 보통 역사적 기억을 좋은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기억되는 사건이 채 아물지 않은 상처라면, 그래서 시정이 요구되는 일이라면, 기억은 폭력에의 호소가 될 수 있다.(이 때 폭력은 대개 가해자에 의해 발생) >

<폭력의 첫 번째 종류는 실용적, 도구적, 착취적, 포식적 폭력이라고 불러도 좋다. 두 번째는 우세 충동(제 잘 남에서 일어나는) 세 번째는 복수심, 네 번째는 가학성, 다섯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폭력의 원인은 이데올로기이다.>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사람들 보다 그들을 연구하는 학자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가해자들은 늘 자신의 행동을 남에게 자극 받은 것, 정당한 것, 비자발적인 것,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포장하는데 쓸 갖가지 변명의 술책들을 갖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완곡어법이다.(이른바 말장난… )>

<도덕감각을 못 쓰게 만드는 방법 중 하나는 피해자를 헐뜯는 것이다. 어떤 집단을 악마화하고 비인간화하면 그 구성원들을 쉽게 해치게 된다.>

<이데올로기에는 치료약이 없다.>

<온 나라가 유해한 이데올로기에 전염되는 현상을 확실히 막을 방법은 없지만, 예방책은 하나 있다. 바로 열린 사회다.>

<정치 지도자와 정부 관료가 감정 이입에 따라 행동한다면, 그래서 친척과 벗에게만 다정하게 특권을 나눠 준다면, 낯선 사람들에게 냉정하게 분배할 때보다 사회에는 큰 해가 된다.>

<자신이 최대의 이득을 얻고자 남들을 해치는 일은 아무리 작은 피해라도 추한 짓이라는 것을, 바로 그가(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이성, 원칙, 양심, 짐승 속에 거하는 존재. 내면의 인간. 자신의 행동에 대한 위대한 재판관이자 결정권자) 우리에게 알려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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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게 리스를 연장한다고 해도 몇 년을 더 일할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다. 제 아무리 백세시대를 노래한들 그게 내 노래는 결코 아닐테고, 이제부터는 신의 은총에 기댈 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깊어지므로.

다만 내 내면의 악마들과 싸워 이기고 내 마음 속 선한 천사들의 힘에 기대어 세상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그렇게 사람들이 더불어 함께 사는 좋은 세상을 위해 기도라도 할 수 있다면…그 때까진 살아도 좋지 않을까?

기도처럼 조금이라도 흉내 내며 사는 한 해가 되었으면.

아버지의 덕담(德談)

새해 인사드리러 갔더니 아버지는 한 밤중이셨다. 아내와 나는 한 동안 아버지가 깨어나시길 기다렸다. 점심 식사 나올 시간이 다가와 아무래도 잠을 깨워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아버지, 저희들 왔어요.” 몇 번을 큰소리로 똑 같은 말을 외친 뒤에야 아버지는 눈가리개를 벗으시며 떠지지 않는 눈을 조금 여셨다. 그리곤 “워러, 워러”를 찾으셨다. 요양원 직원일 줄로 알았나 보았다. 아버지에게 물을 건네며 나는 조금 더 큰 소리로 “아니, 우리 왔다니까!” 더하여 아내가 높은 소리로 물었다. “아버님, 저 모르세요?”그제야 잠에서 깨어나신 아버지가 환한 미소 얼굴에 담으며 하신 말씀. ‘에이! 내가 너희들을 모르면… 정말 가야지!’

그리고 이어지던 아버지의 꿈 이야기.

“너희들 마침 잘 왔다. 이건 아주 심각한 얘기다. 꿈 이야기가 아니야! 내가 실제로 겪은 얘기야. 잘 들어라! 먼저 궁금해서 내가 물어볼 게 있어요. 니들 솔직히 대답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이즈음 아버지가 나를 볼 때마다 먼저 입을 떼시는 도입부로 대체로 내 귀에 익은 대사다. 대개 이 다음을 잇는 아버지의 대사는 당신의 손자 손녀 특히 내 딸아이의 근황이 궁금하셔서 이어지는 내용이었다. 이 대사에 대한 내 응답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한울네는 애기 나서, 한나네는 일이 있어 오늘은 못 와요. 다들 잘 살아요.’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달라도 아주 달랐다.

“너희들 이거 알어?  그거 그거 … 통일이 어떻게 됐니?…. 이거 이거 꿈 이야기 아니야! 내가 직접 본거야. 통일이 됐어 통일이. 그 잔치 자리에 내가 초대를 받았어. 내가 그 세상 보고 왔는데 천국이야 천국! 잔치자리에 산해진미가 차려졌는데 어찌나 정갈하고 맛있던지 내가 하루에 여섯 끼씩을 먹었어. 여섯 끼를. 거긴 가난한 사람들도 왕처럼 살어, 모두가 왕처럼. 이거 꿈 이야기 아니다. 내가 직접 보고 온거야!”

아버지는 똑 같은 이야기를 세번 반복하셨는데, 단 한 단어만 계속 바꿔 쓰셨다. 바로 ‘천국’이었다. 처음 이야기에선 ‘천국’이 두 번째는 ‘극락’으로 세번 째는 ‘파라다이스’로 바뀌었다.

그리고 덧붙이셨던 말씀. “내가 왜 그 자리에 초대됐는 지는 아직도 모르겠어. 왜 나를 초대했는지? 나를 초대했던 사람은….정씨였어, 정씨.” 나는 속으로만 아버지에게 응답했었다. ‘계룡산 정도령이었나 보다.’고.

아마 아버지는 신년 첫 날 꿈자리에서 아버지가 생각하시는 모든 하늘나라를 두루 다 돌아보셨나 보다.

그 이야기를 이제 봄이 오면 만 아흔 여덟, 옛 우리 나이로 치면 아흔 아홉 이른바 백수(白壽)를 맞으시는 아버지가 우리 자식들에게 던지시는 새해 덕담으로 받았다. ‘올 한 해 좋은 세상 누리며 살아라!’는 축복으로.

이윽고 나온 아버지의 점심 식탁. 곱게 으깬 닭 요리 한 줌과 우유 반 팩, 요거트 반 컵쯤을 맛나게 오래 즐기시던 아버지가 숟가락 내려 놓으시며 하시는 말씀. “됐다. 고맙다. 이제 가라”

*** 새해 꿈꾸는 한가지. 가게에서 일하는 시간도 좀 많이 줄이고 나 혼자 즐기는 시간을 더 많이 누렸으면 하는 꿈. 그 꿈으로 오늘 혼자 즐긴 일. 말린 나물 불려 나물을 무친 일. 도라지, 취나물, 무말랭이, 말린 호박, 시래기 등.

정월 대보름 나물 무치는 일은 한 해의 풍요와 건강을 위한 비나리였다든가? 나물무침을 딱히 음력 정월 대보름에만 해야 하는 일은 아닐 터. 무릇 기도란 언제 어디서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법.

그저 내가 아는 이름과 얼굴들 하나 하나 떠올려 보며 올 한 해 넉넉한 풍요와 건강을 누리는 한 해가 되길 비는 마음으로. 그렇게 나 혼자 즐겨보는…

아버지의 덕담을 받아.

2023, 그 감사에 -2

살며 문득 문득 쳐다보는 하늘은 언제나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 아름다움이 그야말로 황홀지경에 이를 때도 있거니와 때론 무서움이 극에 달할 만큼 노엽게 다가 올 때도 있다. 그 어떤 경우에건 하늘을 바라 보노라면 내가 살아있음을 맘껏 누릴 수가 있다.

구름들이 만들어내는 언제나 다른 그림들과 , 해와 달 그리고 별과 무지개가 보여주는 빛의 향연, 뿐만 아니라 바람과 새들이 추는 언제나 새로운 춤사위와 소리들, 문득 쳐다보는 하늘에서 보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그 중 가장 아름다운 하늘을 꼽자면 해 저물녘  서쪽하늘이다. 빛의 아름다움이 절정인 순간이기도 하고, ‘그 즈음에 노래하는 새소리만큼 평안한 소리가 어디 있을까?’ 할 만큼 감사가 절로 일어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황혼(黃昏) – 2023년은 내 삶의 길에서 그 황혼 속으로 첫 걸음을 떼는 한 해였다. 딱히 나이를 따져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맘의 상태와 내가 처한 여러 환경에 비추어 이젠 저무는 때가 되었다는 자각(自覺)을 곱씹는 한 해였다.

하여 이제부터라도 나도 조금은 아름답고 싶다는 생각이 다가 온 한 해였다.

올 한 해 깨달은 또 한가지.

지난 수 년, 지나치게 겉늙어 버린 나는, 사람보다는 자연, 하늘 바람 꽃 나무 무지개 별 달 해 들에게서 사는 재미를 찾으려 했지 않았나?하는 자각이다.

누군가는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라고 했지만 내겐 틀린 노래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사람이었다.’

오늘도 내 방 사진 속에서 함께 숨쉬는 어머니 아버지, 장모 장인을 비롯해 목소리 들으면 편안하게 하루를 감사케 하는 아들 딸 내외, 지금 내가 사는 곳에서 세상 바라보는 눈 높이 맞추어 함께 이야기 나누는 좋은 친구들.

사 오십 년 건너 띄어 만났던 듣기만해도 설레고 반가운 내 어릴 적 동무들. 병덕, 종석, 경애, 경자….열 손가락 두 번 세 번 꼽아도 모자랄 신촌 대현교회 옛 신앙의 벗들.

규복, 길환, 영환, 진황… 비록 옛 얼굴에 주름 깊게 새겨 놓았으나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맘으로 살아가는 옛 친구들.

아내 역시 마찬가지일 터.

선희, 경림, 동훈, 강언… (말 한번 터지면 끝없이 이어질 아내의 손 꼽음 이쯤 막으며)

홍목사님을 비롯한 숱한 선생님들은 잠시 접도라도.

돌이켜 그저 감사 뿐.

저녁 해질 무렵 새소리 듣노라면 어렵고 모질고 슬펐던 기억들은 사라지고, 그저 이어지는 건 감사 뿐. 사람에게.

그 이어짐을 확실히 믿게 하는 손녀딸의 가르침까지.

감사에.

2023년 마지막 날 밤에.

 (오늘 산책길에서)

2023, 그 감사에-1

지난 주일 교회에서 마주친 그가 건넨 말, ‘그러지 않아도 세탁소로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이 해 넘기기 전에 밥 한끼 꼭 합시다.’. 내 대답, ‘뭘 다 바쁜데… 감사하고요. 해 바뀌는 게 뭐 그리… 그래요, 언젠가 한 번 뵙죠.’

오늘 낮에 그가 내 세탁소를 찾아와 나를 끌어 근처 식당에서 밥 한 끼 하며, 지난 이 십 수년 동안 서로가 살아 온 이야기 나누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 동문 모임에서 였을게다. 워낙 그런 모임과는 연이 먼 내가 그 무렵 몇 번 참석하곤 했을 때다. 그는 당시 동문회장이었고, 필라델피아에서 미주 동아일보를 발행하고 있었다.

그 때가 아마 20세기가 막 문 닫을 즈음이었으니 이십 사 오년 전 쯤일 것이다. 이민 와서 한 십 여년 세탁소일에 파묻혀 살다 보니, 먹고 사는 일에 좀 자신감도 붙었고 일에 지치기도 했던 내가 헛바람 들어 동네 일 앞장 서던 때였다.

그러다 어찌어찌 그가 하던 신문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 일에 빠지기 시작했었다. 내 어릴 적 꿈을 이룰 기회일 듯도 싶었다. 정말 웃기는 이야기지만 한국에서 오늘날 뉴스 포탈의 첫 선구자는 바로 나 아니었을까?(누구에게나 허풍 섞인 소설이 있듯) 1979년 그 한 해 내가 했던 작업이었다. 당시만 해도 전국에 일간지라고 해 보았자 사 오십을 넘지 못했다. 그 모든 일간지들 한 달치를 정리하는 책을 발간하는 출판사를 운영했던 내 푸르렀던 스물 중반이었다. 신문의 행간을 읽는 내 노력에 당시 내노라 하던 언론인들이 매달 추천사를 이어 주시는 관심도 받았었다.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그 때의 흔적들을 보면 얼굴 후끈 달아 오르는 부끄러움 뿐이지만.

아무튼 논설위원, 주필 등으로 그 신문에 글을 쓰다가 이런 저런 까닭으로 그와 헤어져 주간신문사를 운영하였었다. 점점 헛바람이 단단히 불어 내 능력 밖 일을 벌이다가 그만…

몇 년 동안 고생 엄청 했었다.

그도 바뀌는 세상을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사이 병이 들어 그 신문사를 접었고, 필라를 떠났었다.

그리고 오늘 그의 이야기를 듣고 안 일이지만 팔 년이 되었단다. 그가 우리 동네로 이사해 내가 적을 두고 있는 교회에 나온 지 벌써 그리 되었단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성실한 주일 교인이 아니라서 일 년에 서너 차례 얼굴 내미는 이른바 ETC(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교인이다.  아마 지난 일요일 성탄 예배 참석은 올들어 내가 한 첫 교회 나들이였을 게다.

아직 팔순에 이르지도 않은 그와 그의 아내는 건강이 그리 좋지 않은 편이다. 그가 오늘 내게 건넨 말들이다. “우리가 이 교회에 오고 처음에 당신 얼굴은 안 보이고 권사님(내 아내)만… 해서, 혹시 나 때문인가? 걱정도 했었고….”, “내가 죽기 전에 김회장에게 미안하고 고맙다는 인사는 꼭 한 번 해야 되는데…. 하는 생각으로… 오늘…”

나는 그에게 대답했다. “장로님! 뭔 말씀을… 전 장로님께 정말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는 오늘도 옛날처럼 나를 ‘김회장’이라고 불렀다만, 나는 그의 옛 호칭인 ‘선배님’ 이나 ‘사장님’이 아닌 ‘장로님’으로 그를 대했다.

내 ‘고맙다’는 인사는 내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난 진심이었다. 내가 신문을 할 때 썻던 글들은 날카로웠었다. 내 글의 대상이 되었던 누군가는 매우 아팠다는 이야기들을 종종 들었었다. 심지어 글 때문에 소송을 당한 적도 있었고, 칼침을 놓겠다는 협박을 받았을 때도 있었다. 그게 또 당시 내 자랑이었다.

신문을 접고 난 후, 모진 고통 속 시간을 보낸 뒤에 내가 쓰는 말과 글들은 삶에 대한 감사, 이웃에 대한 고마움 등으로 바뀌었다. 상대도 대중이라는 다수가 아닌 ‘내가 마주 대하는 단 한사람만 이라도’ 로 바뀌었다.  나는 그런 내 변화에 대해 정말 크게 감사하며 산다. 신의 모습으로 내게 다가온 사람들 덕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그도 그 중 하나였다.

나는 그런 시간의 흐름들을 이야기하며 그에게 말했다. “이게 다 장로님 덕입니다.”

그가 헤어지면서 말했다. “해 넘기기 전에 내 소원 다 풀었네. 참 고마워요! 김회장.”

그와 헤어진 뒤, 세탁소 도와주는 이들에게 가게를 맡긴 후 아내와 함께 어머니와 장인 장모 계신  곳을 찾아  한 해를 보낸 감사 인사를 드렸다.

생전에 매사 ‘감사하다’를 잇던 어머니와 ‘고마워’를 자주 말하시던 장모가 우리 내외에게 던지신 말씀. ‘그래, 그래 또 한 해 감사다!’, ‘고마워요, 고마워, 우리 한울이가 애도 낳고…’

겨울비

온 종일 추적이는 겨울비로 손님 발길 뚝 그친 하루도 저문다. 그 하루 쫓아 한 해도 따라 저물 즈음 가로등불 번쩍, 으스스하던 스산함 몰아낸다.

등불 아래 금가루 되어 내리는 빗방울들. 아무렴, 저 작은 빛조차 세상을 바꾸거늘.

새해 아침 기다리는… 아직은 좋은 나이다.

살아남기

성탄 연휴 책 한 권 읽으며 보냈다. 비엣 타인 응우옌(Viet Thanh Nguyen)이 쓴 장편소설 ‘동조자(The Sympathizer)’다.

나는 베트남에 가본 적도 없고, 베트남 역사에 대해 깊은 지식도 없다. 다만 베트남 통일에 대한 관심이 조금 있는 편이어서 지난 세기 베트남이 겪은 세월에 대한 이야기들은 제법 읽었다 할 수도 있다. 특히 월남이라고 부르던 남베트남이 망한 1975년 4월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또렷하다.

그 무렵 아직 열혈청년이었던 나는 베트남식 통일에 대한 막연한 기대도 있었다. 그 때 나는 논산 훈련소 수용연대에 있었다. 보통 징집된 병력들은 그곳에서 사나흘쯤 대기하다가  피복과 장비들을 수령한 후 훈련소로 가기 마련이었는데, 나는 그 곳에서 꽉찬 한 달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입대할 때 입었던 옷을 한 달 동안 입고 있었으니 그 옷이 오죽했으랴!. 나중에 그 옷을 받아든 어머니는 한참을 우셨단다. 나는 그곳에서 몇 차례 보안사의 심문을 받았었다. 하여 그 사월과 오월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이즈음 내 가게와 인접한 네일 샵의 주인인 리와 종업원 피터와는 가깝게 인사하며 지낸다. 모두 사십 대 베트남계 미국인들이다. 내가 나이들었다고 ‘썰, 썰(Sir)’이라고 부르는 그들에게 그냥 ‘영’이라고 하라고 했더니 요사이는 ‘미스터 김’으로 고정 되었다.

여기까지가 베트남 하면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의 전부다.

소설 ‘동조자’는 분명 베트남과 베트남인들의 이야기인데, 소설은 내게 전혀 낯설지 않은 내 아버지 세대와 내 세대 나아가 내 아이들 세대의 이야기처럼 다가왔다.

소설의 첫 문장이다.

<나는 스파이, 고정간첩, CIA 비밀요원, 두 얼굴의 남자입니다. 아마 그리 놀랄 일도 아니겠지만 , 두 마음의 남자이기도 합니다.>

프랑스인 신부(神父)를 아버지로 십대 초반 어린 나이 베트남 여인(?)을 엄마로 하여 태어난  주인공 ‘나’는 이야기 내내 이런 모습을 유지한다. 두 얼굴의 남자, 두 마음의 남자로.

이야기의 무대는 1975년 남베트남 패망 또는 베트남 통일 시점부터 1979년 사이 베트남과 미국, 필리핀, 태국 등이다.

그런데 전혀 낯설지 않게 우리들의 이야기로 다가온다. 다만 시점은 뒤죽박죽인 채로. 마치 1920년 이후 오늘까지 어쩌면 우리들의 미래까지 겹쳐지는 한반도를 무대로 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읽으며 포스트잇을 붙여 기억하고픈 대목들 중 몇 개.

<비극은 옳음과 그름이 아니라 옳음과 옳음 사이의 갈등이었고, 이것은 역사에 참여하고 싶은 우리 중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딜레마였습니다.>

<나는 흰색이 단순히 순수나 순결과 관련된 색상만은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애도와 죽음의 표시이기고 했습니다.>

<심문은 정신적인 것이 맨 먼저이고, 육체적인 것은 그 다음이야. 여러분은 신체의 멍이나 어떤 흔적을 남길 필요조차 없어. 언뜻 납득이 잘 안되는 소리처럼 들리지, 안 그래? 하지만 사실이야. 우리는 실험실에서 그걸 입증하느라 지금껏 수백만 달러를 썼어.> – CIA 미국 고문관의 말

<그들은 나한테는 예쁘지 않았지만, 그녀에게는 예뻤습니다.>

<내가 그의 아픈 곳을, 양심이라는 명치를 쳤고, 그곳은 모든 이상주의자가 상처 입기 쉬운 부분이었으니까요. 이상주의자를 무력하게 만들기는 쉽습니다. 이상주의자에게 자신이 선택한 특별한 전투의 최전방에 가 있지 않은 이유를 묻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다는 사실 자체였습니다.>

<대개 우리가 스스로를 보는 방식과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는 방식이 똑같지 않은데도, 우리는 거울에 비친 우리의 모습이 진짜로 우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문장.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걸고, 이 한가지 약속을 지킬 것을 맹세한다.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몇 해 전 먼저 세상 뜨신 장광선선생을 떠올리게 한 대목.

<여러분께 제 ‘아메리칸 드림’이 무엇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아메리칸 드림’은 죽기 전에 내가 태어난 땅을 보는 것, 다시 한번 떠이닌(서울 아님 내 장모의 고향 정주, 그도 아님 장선생의 고향 장흥)에 있는 우리 집안 정원의 나무에서 잘 익은 감을 맛보는 것입니다. 제 ‘아메리칸 드림’은 조부모님의 무덤에서 향을 피울 수 있게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그토록 아름다운 우리 나라가 마침내 평온해지고 총성이 환호성에 가려 들리지 않게 될 때 온 나라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제 ‘아메리칸 드림’은…… 전쟁에 대해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남자 아이들과 여자 아이들이 큰소리로 웃으며 노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책장을 덮고 바라 본 하늘은 2023년 성탄을 안고 저물고 있었다.

자그마치 2023년이 지났는데 얼마나 더 가야할까? 내가 볼 수 있는 세상은 어디까지일까?

이쯤 왈 예수쟁이로서 자답(自答).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 아니라 ‘살아남아 이어가는 우리들을’ 믿기에.

또 다시 희망찬 새해를!

  • 좋은 때 좋은 책 읽게 깨워 주신 내 오랜 스승에게 감사를.
  • 2024년에 박찬욱감독이 영화화한 ‘동조자’가 나온다 하니 뜻 맞는 이들과 함께 이 책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좋을 듯.

동지에

동지(冬至)란다. 팥죽 생각나서 찾아보니 아이 낳은 산모에게 좋은 음식이란다. 내친 김에 팥죽을 끓인다. 얼굴 까만 내 며늘아이가  가장 확실하고 또렷하게 하는 한국말 – ‘아버님’. 그 이쁜 며늘아이 생각하며 팥죽을 끓인다.

새알심 만들다 연탄 아궁이에서 팥죽 끓이시며 새알심 만드시던 어머니 생각이 났다.

시간은 직선으로만 흐르지 않고 돌기도 한다.

지난 일요일에 변해가는 세상을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보며 사는 동지(同志)들인 희망재단 벗들과 함께 조촐한 시간을 함께 했었다.

헤어질 무렵 이사장을 맡고 있는 벗이 밭에서 산채로(?) 뽑아 온 무 한 꾸러미 씩을 선사했다. 무가 어찌 그리 이쁘던지!

어제 소금에 절여 두었던 무로 동치미도 담구었다.

밤이 긴 동지(冬至 )에는 봄을 꿈꾸고, 뜨거운 여름을 알리는 하지(夏至)에는 넉넉한 가을 바라며 함께 살아가는 동지(同志)들이 있어 내게 세상은 아직 살만한 곳이다.

비록 팥죽 한 그릇이지만 며늘아이에게 영양식이 되었으면, 아직도 얼떨떨한 모습인 아들녀석에겐 정신 버쩍 들 시원한 동치미 국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 이즈음 소식 주고 받으며 감사와 기쁨을 나누고 있는 멀리 사는 옛 벗들에게 팥죽 한 그릇, 동치미 한 사발 보다 더 큰 사랑을 보내며.

2023. 동지에

숨쉼

겨울비 내리면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 “얘야, 얼마나 감사하냐! 이게 눈이 아닌게. 눈 오면 그저 걱정 아니냐? 너희들 장사 걱정, 미끄러운 길 운전 걱정. 그저 이 비가 감사다.”

연 이틀 비가 제법 내렸다. 쏟아지는 빗길에 필라 오가는 길, 아직 나는 괜찮다. 걱정은 어제 갓난 아이 안고 퇴원해 집으로 돌아갈 아들 며느리 걱정이었다. 참 운도 좋아라. 퇴원 한 시간 전쯤 비가 뚝 그쳤다. 그래 해본 어머니 흉내. “얘들아, 얼마나 감사하냐?”

오늘 이른 아침, 서울 사는 어릴 적 친구가 안부를 물었다. “너 사는 곳 인근에 비가 많이 왔다고 하는데 괜찮냐?”. 고마운 마음 우스개로 답했다. “비는 제법 왔지만, 숨 잘 쉬고 있다.”고.

오후엔 의사의 권유에 따라 병원 침대에 한 시간 반 여 누워 있었다. ‘큰 문제는 아닌 것 같지만 MRI 테스트를 해 보는 게 좋겠다’하여 예약해 둔 검사였다.

‘숨 들이 쉬고, 멈추고…내쉬고…’ 반복되는 명령에 따르며 누워 있던 긴 시간 동안 간만에 숨쉬기 명상을 하며 스쳐 지나간 생각 하나.

한 동안 집에서 가까운 퀘이커 모임에 함께 했던 때가 있었다. 그땐 내게 딱 안성맞춤인 종교모임 이었다. 번잡스럽지 않은 예배의식과 친교, 명상을 통해 내 숨소리 들으며 신을 찾는 시간들, 평화를 갈구하는 이들, 그런 것들이 참 좋았었다.

삶에 단순함을 추구하며 가족을 중시하고 비폭력과 평화를 갈구하되 그 모든 행위를 내 자신의 삶 속에서 이루어 나가자는 그 모임에 한껏 빠졌던 때가 있었다.

그런 생각하며 따르던 명령.  ‘숨 들이 쉬고, 멈추고…내쉬고…’

그래 그저 감사다. 아직은 누구의 명령 받지 않고 내가 느낄 틈도 없이 스스로 쉬어지는 숨을 누리고 산다는 감사다. 숨을 쉬는 감사다.

게다가 가족들이 있고, 아직은 기억해 주는 누군가가 있고. 숨쉼의 기쁨을 누리고 있고.

바야흐로 가히 은총의 계절이다.

MRI 검사 통에 누워 잠시 도튼 흉내 내던 날.

숨쉼의 감사를 일깨워 준 내 오랜 친구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