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 성(聖)과 속(俗) -7

바티칸 박물관(Musei Vaticani)은 지나치게 과한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어쩜 이번 여행 내내 곱씹어 본 사람살이 모습이었지만 종교, 정치,경제, 과학, 문화 이즈음엔 스포츠까지 모든 영역에서 권력이란 예나 지금이나 너무 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들을 잠시 하였었다.

그 어마어마한  전시물들을 한 곳에 모을 수 있는 그 재력과 힘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부질없는 생각이 오갔지만 박물관을 도는 내내 떡 벌어진 내 입을 닫지 못한 채 구경에 빠졌었다. 안내자 Alfredo는 전시물들과 교황청 또는 바티칸을 설명하면서 꼭  ‘우리(We)’ 또는 ‘우리의(Our)’ 라곤 했는데, 그게 또 내겐 제법 권위적으로 다가오곤 했었다. 족히 180센티를 넘었을 녀석의 키와 몸매 그리고 잘 생긴 얼굴도 녀석의 안내에 신뢰를 더하기도 했을 터였다.

모두가 다 허상인 줄 알면서도, 무릇 모든 권위와 그에 대에 허상은 ‘혹’하는 터무니없는 믿음의 크기를 더하는 법일게다.

그렇게 박물관 구경을 하다가 다다른 마지막 장소는 시스티나 성전 (Aedicula Sixtina)이었다. 안내자 Alfredo는 성전으로 들어가기 전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했었다. “이 성전 안에서는 절대 사진을 찍지 못하고요. 말하지 말아야 한답니다. 그저 조용~”

박물관 뜰에서 설명을 들었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의 천장화가 있는 곳, 물론 조용하라는 것은 그 보다 더 종교적 의미를 더했기 때문이었겠지만…. 그 너른 성전 안엔 이미 사람들이 차고 넘쳤었다. 그리고 조용히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들…. 그 소리들의 크기가 조금씩 더해지자 어디선가 낮고 묵직하게 들리는 소리, ‘쉬잇~’. 그 소리에 성전 안은 잠시 고요한 듯 하더니만 이내 다시 웅성웅성, 그리고 다시 ‘쉬잇~’, 조용, 웅성웅성이 되돌이표 처럼 이어졌었다.

이젠 내 나이 탓인지, 밀폐된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리는 곳에 있으면 갑자기 멍해지며 졸음이 오가나 어지러운 증상이 오곤 한다. 그 순간 또 그런 증상이 밀려왔었다.

나는 사람들이 뜸한 성전 맨 뒤쪽 어느 문 앞에 사람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금줄을 쳐 놓은 곳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러다 금줄을 쳐 놓아 사람들이 드나들 수 없는 문이 열리더니 사제복을 입은 내 또래 사내가 미소년 세 명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왔다. 사제복 사내(노인이 맞겠다)는 한참을 미소년들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더니(내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였기에) 이내 문을 다시 열고 그 안으로 사라지려 했었다. 나는 신기하기도 했고,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도 몰랐기에 그저 호기심으로 그들을 바라 보고 있었고, 금줄을 넘지 않는 가장 가까운 거리로 내 몸을 숙여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 사제복 사내가 나를 바라보며 이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잠시 멍해서 가만히 서 있었는데, 사내는 내게 다가와 내 소매를 끄는 것이었다. 잠시 멈칫 거리고 있는데 안내자 Alfredo가 어느새 다가와 ‘With him!’하고 속삭였다.

그렇게 그를 쫓아간 곳은 텅 빈 거대한 응접실 같은 방이었고, 그곳엔 사진으로만 보았던 건장하고 젊고 멋진 바티칸 근위병이 조각처럼 서 있었다.

아주 짧은 시간 그 구경을 하고 성전 안으로 돌아온 내게 Alfredo는 내게 말했었다. “어휴 이런 경우는 제가 처음 보내요. 그 문 안으로 들어 가려다 쫓겨나는 사람들은 많이 봤지만, 초대 받은 사람을 보기는 오늘 처음이네요. 거긴 교황이 계시는 곳이거든요.”

그저 내 호기심을 가여이 여긴 은총으로 잠시 바티칸 시민이 되었었다는….

나 같은 속인이 단지 호기심으로 이른바 성전에 발도 디뎌 보았다는….

하여  성(聖)과 속(俗) – 그 여행에.

여행 – 성(聖)과 속(俗) -6

피렌체에서 로마로 향하는 열차안에서 바라본 농촌 풍경은 아기자기한 모습으로 내게 낯설지 않은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느긋하고 조금은 여유로웠던 마음이 로마에 이르러 완전히 분주해 지기 시작했다. 로마는 뉴욕이었고 서울이었다.

우선 숙소를 찾아 가는 길부터 헤매기 시작했다. 온전히 구글신에게 의존하여 길 찾기에 나선 여행이었고, 거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방향과 거리와 시간을 알려주는 구글신이였지만, 때론 길 찾는 신도의 아둔함으로 인해 방향을 잃고 헤매기도 하는 법. 로마에 이른 우리 일행의 모습이었다.

어찌어찌 구글신과 사람들에게 물어 지하철과 버스를 타는 티켓을 구매하고 숙소로 향하는 지하철 입구로 향했다. 그렇게 지하철 입구로 향하다가 낯익은 얼굴들을 만났다. 뉴욕에서 리스본을 거쳐 베네치아로 오던 비행기에서 만난 두 노인들이었다.

우리들은 그 노인들이 친구 사이인 줄로 알았었다만, 알고보니 아버지와 아들 사이였다. 두 부자는 보스톤에 살고, 가늠컨대 아버지는 팔십 대 초 중반, 아들은 육십 전후 또는 초반의 나이인 인도계 미국인들이었다. 아들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하다 얼마 전에 은퇴 하였다고 했다.

그들 부자와 함께 전철을 타기 위해 입구에 다달았을 때였다. 입구에 서있는 경찰에게 혹시나 해서 물었었다. 이 입구가 우리들이 가려는 숙소를 향해 가는 것이냐고. 그는 친절한 어투로 ‘그렇다’고 대답하며. ‘소매치기 조심하시오. 돈과 여권이 들은 가방은 앞으로 향하게 매시고 꼭 잡고 있으시오!’로 정말 친절히 알려 주었다.

그렇게 두 노부자와 우리 일행은 입구를 통과해 전철을 타기 위해 걸었다. 많은 사람들과 휩싸여 걷고 있는데 누군가 역무원 비슷한 처자가 우리들을 엘리베이터 쪽으로 안내를 했다. 사단은 바로 거기에서 일어났다. 어디선가 젊은 처자들 서넛이 갑자기 나타나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었는데, 엘리베이터는 고작 대여섯명이 타기에도 부족한 공간이었다. 더더군다나 우리들은 모두 끌고 다니는 짐들도 하나씩 가지고 있던 터였으니, 다같이 타기엔 무리였다. 갑자기 나타났던 젊은 계집들이 ‘밀어 밀어’하며 웃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우리 일행은 다음에 타자고 내렸고, 두 노부자와 젊은 아이들이 타고 내려갔다.

잠시후 엘리베이터가 올라왔는데 그 계집 아이들이 그대로 있었다. 그때 눈치를 챘어야만 했었다만 … 우린 몰랐었다. 그렇게 다시 꽉찬 상태로 탄 엘리베이터 속, 나는 도둑 방지용 가방이라는 선전을 듣고 산 가방을 앞으로 매고 있었고, 그 가방안에는 우리 일행 네 명의 여권과 내 신용카드와 아직 환전하지 않은 우리들의 여행 경비가 들어있었다. 계집아이 하나가 나를 밀치는 통해 싸한 느낌이 들어 밀어내며 가방을 꼭 움켜 잡았었다.

이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는데 문 앞에 서 있던 경찰 두 명이 물었다. ‘안전하신가요? 문제 없으신가요?’ 그 순간 계집아이들은 후다닥 튀였고 바닥엔 아내의 빨간 지갑이 떨어져 있었다. 내가 꼭 쥐고 있었던 도둑 방지용 가방은 약 1/3 쯤이 열려 있었다. 잠시 식은 땀이 주욱~  다행히 잃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만, 그 노부자는 현금 이백달러를 그 엘리베이터 안에서 잃어 버렸다고 하였다.

그리고 전철을 타기 전 그 짧은 시간에 비명 소리를 지르는 피해자와 앞에 있는 이의 등짐 속에 손이 들어 갔다 나오는 현장을 목격하기도 했다. 참 주저 않고 싶은 현장이었다.

로마역에서 내려 내 눈길을 처음 끈 것은 멀리 언덕 위에 있는 황금빛 예수상이었고….. 그리고 소매치기였다.

숙소에 짐을 풀고 바티칸 박물관(Musei Vaticani)을 향하면서도 우리들은 그 소매치기 현장을 이야기하며 그저 조심 조심이었다.

우리는 박물관을 안내하기로 한 안내원을 기다리며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초입 사거리에 위치한 식당 야외 테이블에서 늦은 점심을 마치고 차와 맥주를 즐기고 있었다.

갑자기 아내가 ‘어머~ 어머 !’를 연발하며 ‘저거 좀 보라!’고 다그쳤다. 우리 일행의 눈길이 닿은 곳은 바티칸 박물관으로 올라가는 사거리 한쪽 끝에서 마치 소처럼 굵은 오줌발을 내갈기고 있는 사내였다. 사거리엔 오가는 차량 뿐만 아니라 박물관을 드나드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우리처럼 식당이나 카페 바깥 테이블에서 앉아 있던 사람들은 그냥 녀석의 튼실한 고추를 직관할 수 있는 거리였다. 차마 사진을 찍진 못했다만 녀석의 그 늠름한 못난 표정은 내 기억 속에…. 놈과 같은 놈들 소식을 뉴스 속에서 매일 매일 얼마나 많이 보고 사는지…

그야말로 댄디한 회색 양복 차림에 썬그라스를 낀 녀석은 오줌을 갈기며 사방을 천천히 휘둘러 보기도 했는데, 마치 제 놈이 다윗상인 듯 놀며 그 짓을 끝낸 녀석은 아우디 차를  몰아 휑하고 떠났던 것이다.

옛사람들은 벌거벗은 아름다움을 돌에 새겼건만, 그걸 보고 자란 이즘 애들은 추한 것들만 보고 몸에 익혔나보다. 무엇보다 화장실에 너무 노랭이 짓 하는 문화 탓일 수도 있겠고….

삼천 년 이어 온 이야기의 도시 로마를 만나기 전에 우리들은 우리들만의 이야기들을 겪었다.

아하! 로마! 그 성(聖)과 속(俗).

여행 – 성(聖)과 속(俗) -5

정식 명칭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이란다. 젠장! 문을 잠그고 집을 나서 한참을 가다가 ‘잠궜었나?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에이!’하며 오던 길 되돌아 보는 일이 잦아지는 내게 그 이름은 너무 길었다. 피렌체 대성당(Duomo di Firenze)으로 줄이면 아직은 기억할 만하다.

두오모(Duomo)라는 뜻이 대성당 또는 하나님의 집이란다. 하루 온 종일 하나님의 집 근처를 열심히 걸어 다녔다. 피렌체 대성당을 비롯해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Museo dell’Opera del Duomo), 아카데미아 미술관(galleria dell’accademia), 재래시장인 중앙시장(Mercato Centrale) 등 이었는데 그야말로 꽉찬 하룻길 걷기였다. 신기하기도 하지. 거기에다 두오모 성당 꼭대기 까지 460여개 계단을 오르 내렸건만 우리 모두 멀쩡했다는 사실이다. 아내나 나나, 최권사 내외나 아직은 괜찮은 나이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날 극도로 대비되는 두가지 모습들에 대한 생각은 아직 정리 중이며, 좀 공부를 해야겠다.

뭐 대단한 게 아니다. 대리석 한 장에 바들바들하는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그 수많은 대리석들로 이루어진 그 거대한 건축물들과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뭔가 뜻과 이야기가 있는 듯한 미술품들과 곧 숨을 쉴듯한 조각들, 도대체 상상할 수 없는 듯한 작업으로 이루어진 천장화와 벽화들…. 도대체 어떤 열정과 무슨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일까? 하는 의문들.

그리고 충격적이었던 유물 하나. 그 거대한 구조물을 세우는데 사용되었다는 정말 열악하기 그지 없는 도구들. 그 가늠할 수 없는 사이를 메꾸어 나간 노력은 오로지 누군가 바로 사람이 인내하지 못할 극도로 험한 노동이었을 터.

그렇게 피렌체는 내게 무겁게 다가 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피렌체가 준 마지막 절정, 바로 미켈란젤로 그리고 다윗상(David of Michelangelo). 가히 창조에 버금 가는 듯한 사람의 솜씨. 쯔…. 내가 뭘 알까만.

대성당과 시장은 겨우 몇 걸음 떨어져 있었을 뿐. 하나님의 집은 늘 사람 사는 세상 가까이 있듯.

뿐이랴! 천재나 바보나 신의 잣대에 올라타면 다 거기서 거기일 터.

하여 피렌체 공부는 좀 해야할 터.

여행 – 성(聖)과 속(俗)-4

화분이 아닌 땅에 뿌리를 내린 화초나 나무 한 그루 찾기 힘든 돌의 도시 피렌체.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갈릴레오의 도시이며 마키아벨리의 도시이기도 했던 피렌체. 피렌체는 돌의 도시이자 ‘거대한 돈과 권력의 도시’, 그 돈과 권력에 항거하는 ‘풍자의 도시’로 내게 다가 왔다.

우피치 미술관(Uffizi Gallery, Galleria degli Uffizi)을 안내해 준 RaFael은 그야말로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다. 단지 우리 일행 네 명을 위해 그는 정성껏 피렌체와 우피치와 메디치 가문과 르네상스와 신이 된 종교와 돈과 권력 나아가 그것들을 풍자하는 예술에 대한 설명에 온 열정을 다했었다. 그는 피렌체를 휴머니티(humanity)와 휴머니즘(humanism)의 도시로 소개하려고 많은 애를 썻다.  나는 그런 그의 노고 덕에 종교와 돈과 권력의 역사 그리고 그에 항거하는 사람 사랑 곧 진정한 신의 역사를 이루고자 한 옛 사람들의 노고를 맛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참 재밌었던 사내 RaFael을 만난 것은 이번 여행에서 맛 본 은총 중 하나다.

미술관에서 내려다 보이는 베키오 다리(Ponte Vecchio)를 설명하던 RaFael의 말이었다. “저기 가면 금, 은, 다이아몬드 등 보석상들과 유명 시계점들이 저 다리를 차지하고 있는 걸 보실거예요. 근데요. 처음에 저 다리엔 정육점 등 서민들이 찾는 음식점들이 많았다고 해요. 그런데 어느 날인가 그런 가게들이 모두 문닫고 보석상과 시계상으로 바뀌었데요. 왜냐하면요. 도시의 돈을 다 움켜잡고 있는 메디치 가문에서 그랬데요. ‘돈 많은 우리 가문 사람들만 이용할 수 있는 가게만 장사하게 하자’고요.” 물론 우스개 소리였겠다만 나는 사람사는 세태를 풍자한 그의 우스개가 단지 우스개로만 들리지 않았었다.

미술관과 베키오 다리 등을 구경 한 후 저녁식사를 위해 어느 골목의 그럴싸한 식당문을 두드렸었다. 바깥에서 보기에 작지만 잘 꾸며진 식당이었다. 분명 영업시간 중이었는데 가게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문을 흔드니 종업원이 문을 열며 물었다. “예약 하셨나요?” ‘아니’라는 우리들의 응답에 잠시 난색을 표하는 듯 하더니, “몇 분이지요?”라고 물었다. ‘넷’이라는 응답에 또 잠시 멈칫 하더니만 “들어 오시지요.”했다.

그렇게 들어 간 식당엔 우리들이 첫 손님인 듯 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었다. 들어오는 손님들 마다 우리와 똑 같은 대화와 종업원의 표정과 몸짓이 똑같이 반복되는 것이었다. 작은 가게 안은 이내 만석이 되었는데 내가 들은 한, 딱 한 팀만 예약 손님이었을 뿐, 나머지 모두는 우리처럼 지나가다 들어 온 손님들이었다. 참으로 뻔뻔한 상술이었늗데, 면벌부(또는 면죄부) 상술로 도시를 이룬 후예들 답다는 생각으로 그냥 많이 웃었다. 그 날 저녁 음식도 참 맛있었다.

여행의 참 맛은 밤거리에 있다던가. 그 날 피렌체의 밤거리에서 우리 일행은 잠시 청춘이었다. 거리의 악사들 연주에 맞추어 무리 지어 춤을 추던 한 떼의 젊은이들을 보며 몸에 시동을 걸던 아내가 그 무리에 섞여 춤을 추고 악사들과 함께 북을 두드렸고 우리는 한껏 즐거웠었다.  

허나 참 바보같기도 하지. 기껏 사진을 찍다가 흥에 취한 아내 모습을 담을 생각 못하고 그냥 서있기만 했으니. 쯔쯔…본래 바보였는지도.

하여 잊지 못할 피렌체의 밤.

여행 – 성(聖)과 속(俗)-3

여행을 떠나며 날씨 때문에 걱정이 많은 최권사에게 내가 한 말이었다. “뭐 어때 비오면 비오는 대로. 구경 못하면 못하는 대로. 그냥 천천히…. 맛있는 거 먹다 옵시다. 그게 여행이지 뭐.” 나이 들어 좋은 점 하나 꼽자면 무언가 움켜쥐려 하는 욕심이 나날이 줄어든다는 것 아닐까? 편하게 주어진 시간 천천히 즐기는 여행이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한 말이었다.

꽤나 쏘다니던 젊었던 한 때가 있었다. 쏘다닌다 한들 비행기는 언감생심 꿈도 꾸어 보지 못했던 시절이었으니 고작 기차나 버스 타고 반도의 남쪽을 헤맬 뿐이었다. 쌀 두어 됫박과 고추장 된장 김치 소금 등속과 모포 한 장, 버너와 취사도구들을 바리바리 꾸린 배낭 짊어지고 산을 찾아 바다를 찾아 떠돌았던 그 시절엔 잡아야 할 무언가가 꼭 있는 듯 했었다.

거의 반 백 년이 흐른 오늘도 호기심은 여전하다만, 무언가 잡으려고 하는 욕심은 없다. 그저 주어진 시간을 감사히 즐길 수 있다면, 누리는 그 여유에 감사할 뿐.

맛을 탐하는 편은 아니다만, 그래도 이젠 적당히 즐길 수 있는 나이엔 이른 것 아닌가하는 생각으로 산다. 이번 여행은 그런 내 생각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충족시킨 시간들이었다. 단 한 곳이 기대를 저버렸지만, 그 식당에서 바라 본 멋진 바깥 풍경이 준 만족함이 그 덜한 맛을 메꾸어 주었으니 맛 여행이라는 면에서는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아직 음식 사진 찍는 일엔 서툴어 음식 사진들은 하나 엄마(미세스 최권사)와  한나 엄마(아내) 몫이었다.

기차 – 내 어린 시절 바람기는 기차소리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이학년 여름 중앙선 열차, 그 해 가을 경부선을 타고 떠돌던 바람기가 먼춘 것은 서른즈음이었다. 그 무렵 남도를 두루 가르던 모든 열차는 다 타 보았을게다. 지금도 기차를 보면 설레기는 그 때와 마찬가지다만, 마음만 탈 뿐 쉽게 몸을 싣지는 않는다.

베네치아에서 피렌체까지 두 시간여 기차 여행은 내 긴 삶의 여정을 짧게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완전한 우연이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책 한권을 꾸려 넣었었는데, 정말 아무 생각없이 손에 잡았던 책이었다. 이미 두 번을 읽었던 책이어서 비행기에서 가볍게 책장을 넘길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넣어 온 책이었다. 하비 콕스(Harvey Cox)의 ‘신이 된 시장(The Market As God)’인데 뉴욕에서 리스본, 리스본에서 베네치아까지  여덟시간 조금 넘는 비행 시간은 콕스의 생각을 정리하는데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최권사 내외와 아내가 함께 한 열과는 멀리 떨어져 앉은 내 자리는 독서 조건에 최적이었다.

그 책에 나오는 한 문장이다. <악명 높은 메디치 가문 출신 교황 레오 10세는 동생에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황자리를 주셨다. 이제 그 자리를 즐기자.”>

돌의 도시 피렌체는 바로 콕스가 말한 ‘신이 된 시장(The Market As God)’ 의 시초였으며, 신의 자리에 오른 자본주의의 전형이었다.  허나 관광지로써는 최상이었다.

성(聖) 속에서 속(俗)을, 속(俗)에서 성(聖)을 발견할 수 있는 도시, 피렌체. 돌 속에서 돌을 밟으며 많이 걸었다.

여행 – 성(聖)과 속(俗)-2

여행을 떠나기 전날 급하게 준비한 물건들은 우산과 우비와 방수 처리된 옷들이었다. 우리들의 여행코스 내내 비가 함께 할 것이라는 일기예보 때문이었다. 그것도 약간의 비, 간혹 비 정도의 예보가 아닌 온종일 비였다.

날씨는 예보대로 였다. 경유지인 리스본만 하여도 화창한 날씨였건만 첫 도착지 베니스에 이르니 그야말로 우중(雨中)이었다. 허나 거기까지 였을 뿐, 이후 여행 내내 비는 이따금 오락가락 했지만 줄곧 우리들을 피해 다녔다. 나는 “운이 좋았다”며 친구들에게 카톡으로 전했는데, 친구 하나가 이르길 “야! 그걸 은총이라고 하는거야!”라며 나무랐다. 나는 흔쾌히 그 말을 수긍했다. 예보와 달랐던 날씨는 여행중 우리들이 누린 은총이었다.  

베니스가 베네치아로 다가오면서 내 상상 속 베니스는 힘없이 무너졌다. 사실 베니스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베니스의 상인’의 무대라는 것, 아름다운 물의 도시라는 막연한 상상이 모두였다.

이번 여행을 알차게 만든 이들은 곳곳의 박물관 안내자들이었다. 그들과의 예약은 모두 최권사 몫이었다. 안내자들은 모두 매우 뛰어난 이야기꾼들이었다. 그들의 이야기 화법에 혹한 까닭은 그들이 전달자가 아닌 소개하는 작품이나 유물, 기념물 속 주인공이 되어 말하기 때문이었다.

첫번 째 안내자를 만난 곳은 ‘도제의 궁전(Doge’s Palace)’으로 알려진 Palazzo Ducale(두칼레 궁전) 앞 날개 달린 사자상 앞이었다. 안내자는 ‘유럽을 걷다(Walks in Europe)’이라는 팻말을 들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들의 걷기 여행은 시작되었다.

숙소에서 그곳에 도착하기 까지 버스를 타고 로마광장을 거쳐 수상버스로 갈아 타야 했는데, 그 모든 과정들이 우리 일행에겐 도전이었고, 제법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안내자를 따라 두칼레 궁전(Palazzo Ducale)과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의 유골이 안치 되어 있다는 산마르코 대성당(Basilica di San Marco)을 돌아 보았다. 안내자는 궁전에 입장하기전 꽤 오랜 시간 동안 역사 강의를 시전하였다. 궁전과 성당을 보기 위해서는 마땅히 베네치아의 역사 곧 이탈리아가 아닌 베네치아 공화국의 역사를 알아야만 한다는 열정을 다한 강의였다. 그녀의 독특한 억양으로 그 날 수없이 들었던 ‘originally’라는 말이 아직도 귀에 맴맴 돈다. 그녀는 위대한 베네치아 공화국의 시민이었다.

궁전과 황금빛 성전 구경을 마치고 산마르코 광장(Piazza San Marco)과 뒷골목 풍경들을 두루 눈에 담은 뒤 광장 맞은 편 코레르 박물관(Museo Correr)을 섭렵하니 한나절이 휙 지나갔다.

골목 – 비단 곤돌라가 다니는 베네치아 뿐만 아니라 여행 내내 도시의 골목들은 박물관 못지않게 그곳을 살다 간 사람들의 어제와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의 오늘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이었다.

베네치아 섬 속에도 성(聖)과 속(俗)은 그렇게 어우러져 예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저녁엔 산마르코 대성당(Basilica di San Marco)의 바이올린 연주자의 아들로 이 곳에서 태어났다는 비발디(Antonio Lucio Vivaldi)를 기념하여 열린다는 음악회를 즐겼다. 비발디 교회(Vivaldi Church)로 알려진 피에타 성당(Maria della Pietà)에서 있었던 사계 연주회(Four Seasons Concert)였다.

내가 음악에 대해 뭘 알까마는 때론 이런 사치와 허영 정도는 누려도 과하지는 않을 터. 그 피곤함에도 졸지 않고 즐겼으니 비발디에게 미안함은 없었고.

사족 – 여행 내내 느낀 것이지만(몇 해 전 파리에서도 마찬가지였고) 도대체 화장실에 대해선 끔직히도 베니스 상인 샤일록만큼이나 구두쇠적인 문화는 도대체 이해를 못하겠다는…. 연주회를 마치고 주체할 수 없어 화장실을 찾는 내가 들었던 말. “교회내 화장실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없이 가까운 카페에서 싸고 다시 채우느냐고 맥주 한 잔! 며칠 후 로마에서는 거금 일 유로를 주고…. 여행은 때론 참 불편해! …. 그 구두쇠 문화의 끝판을 확인한 것은 며칠 후 로마에서.

여행 – 성(聖)과 속(俗)-1

한 두어 주 전 일이다. 까닭 없이 왼쪽 발바닥이 아파 걸음걸이가 불편할 정도였다. 한 이틀 심하게 이어지던 통증이 조금은 가라 앉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발 앞꿈치로 바닥을 밟긴 불편했다. 계속 통증이 멎지 않으면 의사를 찾아 보면 될 일이었지만, 문제는 오래 전에 계획한 걷기 여행이 코 앞으로 다가 온 것이었다.

그렇다고 걸음을 전혀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어서 여행을 취소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걱정은 함께하는 친구 내외와 아내에게 행여 부담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여드레  걷기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마치 내가 여행 전 며칠 동안 엄살을 떨었던 듯이, 떠나던 날까지 이어졌던 통증이 비행기를 타며 슬금슬금 사라지더니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땐 말끔히 가신 것이었다.

그렇게 걷다 온 곳들이 물의 도시 베네치아, 돌의 도시 피렌체, 이야기의 도시 로마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걸어 다녔던 곳들은 여섯 곳의 박물관과 미술관, 음악회 한 곳, 몇 곳의 성당들과 시장 그리고 맛집들과 숱한 유적들이었다.

사진 인화비 염려 없는 디지털 세상덕에 마구 셔터를 눌러 찍은 사진들이 거의 천 장에 이르렀으니 걷긴 참 많이도 걸었다. 그 걷기 운동 덕에 내 발바닥 통증이 절로 사라진 듯 하다.

지나온 이야기들을 일컬어 ‘족적(足跡)’이라 하는 걸 보면 걷는다는 게 곧 사람살이 일 터이다.

그렇게 걸으며 옛 사람들이 걸어 온 이야기들을 보고 들었다. 그 이야기 속에는 사람들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자연의 이야기, 사람과 자연을 품은 신의 이야기들이 넘쳐 났다. 그 모든 이야기들을 안고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움은 그저 덤이었다.

짧은 걷기 여행 동안, 순간 순간 내 속 깊은 곳에서 차오르던 감사의 기도가 있었다. 나 혼자 걷지 않고 함께 하는 이들이 있음에 대한 감사였다. 바로 최권사 내외와 아내에 대한 감사 그리고 집을 나서서는 좀처럼 디지털 대화는 커녕 전화조차 하지 않던 내가 카톡 대화를 나누던 옛 친구들에 대한 감사….

어찌 이번 여행 뿐이랴! 때론 성급한 걸음으로 어느 땐 누구보다 뒤처진 걸음으로 걸어 온 내 인생살이 모든 걸음걸음 마다 함께 했던 이들에 대한 감사, 끝내 신에 대한 감사에 이르기 까지…

그 맘으로 이어보는 사진 정리와 여행 이야기. 이름하여 “여행 – 성(聖)과 속(俗)”

아침 그리고 저녁

종종 신비로운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오늘 같은 날이다.

1.

아침 눈을 뜨고 제일 먼저 마주친 것은 호주에 계신 홍길복목사님께서 보내주신 설교문이었다. 은퇴후 그가 행한 <죽음 – 제 3의 이민>라는 주제로 이어지는 설교문 중 하나로 <끝이 좋아야 합니다>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양 옆에서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 이야기를 주제로 한 설교였다. 설교문의 마지막 문단 중 몇 개의 문장들이다.

<인생의 마무리는 죽음입니다. 잘 죽어야합니다. 우리 모두 다 잘 죽기를 바랍니다. 끝내기를 잘해야 합니다. ……. <유종의 미>를 영어로는 Crowning glory, <면류관을 쓰는 기쁨>이라고 표현합니다. 맨 나중에 웃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인생의 최고 정점, 최대의 peak time은 죽음입니다. 죽을 때 잘못 죽으면 일생을 망치게 되고, 죽을 때 아름답게 마무리 하면  그의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지만 끝이 나쁘면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우리는 이제 점점 죽음의 순간을 가까이 대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갑니다. 주 나를 외면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갑니다> 찬송하면서 이 땅에서의 삶을 가장 아름답게 마무리 할 수 있기를 기도 드립니다.>

2.

오전엔 아내가 읽어 보라고 권한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가 쓴 장편소설 <아침 그리고 저녁>을 손에 들었다.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며 아내가 건네 주었던 책인데 그 이유 때문에 차일피일 내 독서목록에서 밀려 있던 책이었다. 무슨 수상자나 수상작품이라는 치장이 달린 글들은 내게 썩 다가오지를 않는다.

말이 장편이지 고작 135쪽일 뿐인 중편으로도 짧은 축이었다. 그저 잠시 훑을 요량으로 들었던 책인데 책장을 덮을 때까지 엉덩이를 떼지 못하고 단숨에 읽어 내린 마치 단편 같은 소설이다.

소설은 주인공 요한네스가 태어나던 날 몇 시간과 그가 죽던 날 하루에 대한 기록인데 그의 할아버지부터 손자에 이르기까지 오대에 걸친 이야기들이 녹아있다. 하여 단편인 동시에 장편이다.

생명의 탄생에 대한 두려움과 신비로움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죽음의 일상성이랄까 죽음이란 마치 평범한 삶들이 평범한 일상 속에서 겪는 일 가운데 하나의 과정인 듯 이야기한다.

요한네스를 다음세상으로 데려가기 위해 잠시 이 세상으로 돌아온 먼저 죽은 그의 절친 페테르가 전하는 다음세상을 설명하는 말이다. <자네가 사랑하는 것은 거기 다 있다네. 사랑하지 않는 건 없고 말이야>

3.

오후에 누워 계시는 아버지를 찾아뵙다. 나를 보자마자 하시던 말씀.

“아이구, 내가 너를 기다렸어요. 이제 내가 떠날 준비를 해야되요. 내 장례식때 말이야… 니 엄마가 해 준 한복을 입고 가려고 했는데…. 그게 아무래도 오줌 눌 때 아주 불편할 거 같애서… 그냥 양복하고 …여름철 거든 겨울철 거든 철은 따질 거 없어요…. 그거 입히고 니 엄마가 해준 반코트 있어… 그거 좀 입혀 줘.”

이즈음 들어 많이 오락가락하시는 아버지의 부탁이었다.

날은 여전히 쌀쌀한데 햇볕은 아주 따스한 날이다. 내 뜰에는 어느새 수선화 튜립  등이 싹을 틔어 오르고 크로커스는 이미 활짝 웃고 있다. 보라색 크로커스의 꽃말이란다. ‘누군가를 후회없이 사랑한다’라던가….

살아가는 날까지 끊임없이 사랑하고 볼 일이다. 그게 가는 날까지 천국에서 사는 일이고, 떠나서 만나는 이들은 어차피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들 뿐이기에.

죽음을 논하는 아침에서 삶을 노래하는 저녁까지…

오! 이 신비한 하루에 감사.

홍목사님을 비롯한 모든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며 살아가는 내일을 위하여….

내 쉬는 날 일상의 하나… 오늘은 달콤한 사과빵을 만들어 아내에게 맛보이다.

겨울 하루

아무 계획도 없이 하루를 보내는 맛도 괜찮다. 좀 걷자고 공원을 찾아 나서기엔 너무 춥고, 아직 눈도 녹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 조차 느끼지 않고 그저 마음 가는 대로 하루 해를 보냈다. 집안 정리도 하고, 도토리 국수 삶아 동치미 국물에 말아 먹은 후 눈이 감겨 낮잠 한 숨 달게 잤다.

이런 날엔 마음 다스리는 글 한 귀 찾아 나서는 맛이 괜찮을 듯해서 손에 들었다. 1961년생. 스물 여섯에 다국적 기업 임원이 되었다가 홀연히 태국 밀림 속 사원을 찾아가 스님이 된 스웨덴 사람. 2022년 루게릭 병으로 예순 하나에 입적한 사람. 비욘 나티코블란드가 쓴 책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I may be wrong>

읽으며 마음은 차오르는데 배속이 허전해 고구마 감자 구워 헛헛한 속을 채우며 읽었다. 책 속 이야기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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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귀를 기울이는 사람에게 마음을 터놓을 땐 얼마나 좋은지요. 잠시라도 제 입장에서 생각하고 뒤를 받쳐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으로 든든합니다. 그와 같은 경청은 그 자체로 치유효과가 있습니다. 그렇게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지요.>

<아잔 스님은 영국인이었지만 어느 나라 말을 사용해도 언변이 뛰어난 분이었지요. 그날 밤에도 뜻밖의 말로 우리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오늘 밤엔 여러분에게 마법의 주문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갈등의 싹이 트려고 할 때, 누군가와 맞서게 될 때, 이 주문을 마음 속으로 세 번만 반복하세요. 어떤 언어로든 진심으로 세 번만 되뇐다면, 여러분의 근심은 여름날 아침 풀밭에 맺힌 이슬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자, 다들 주문이 뭔지 궁금하시죠?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책의 저자 비욘이 어느 강연해서 한 말.

<예전에 한 강연에서 이 마법 주문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 강연엔 마침 제 아내인 엘리사베트도 참석했었지요.

다음 날 아침, 우리 내외는 아침 식사를 하면서 가볍게 언쟁을 벌였습니다. 그 때 아내가 한 말이었지요. “비욘, 당신이 어제 강연에서 말했던 그 주문 말인데… 지금이 그 주문을  사용할 적기 아닐까?”

그러자 제가 한 대답이었습니다. “아니, 난 지금 다른 주문을 사용할거야. 당신이 틀릴 수 있습니다.”>

  •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가 지은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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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깨달은 자 또는 앞서 가는 이가 전하는 해답을 옮기는 일은 멈출란다. 내겐 여기까지가 적당함으로.

어느 새 밤이다. 이런 날엔 와인 맛 깊게 느껴도 좋을 듯.

잘 쉰 하루

며칠 전부터 4인치 정도 눈이 더 내린다는 예보는 어제 오후부터 호들갑을 더해 6인치 정도를 예상한다는 문자로 전해졌다. “에이, 핑계 김에 우리도 하루 쉬어 갑시다.”

그렇게 하루 가게 문 닫기로 하고, 조금은 게으르게 맞이한 아침은 참 고요했다. 어쩜 이 고요함은 늘 이어 왔을게다. 다만 아침 분주한 소리를 만들어 이 고요함을 느끼지 못한 것은 분명 내 탓일 터였다.

눈 내리는 소리에 귀 기울여본 게으른 아침에 감사를!

쉰다고 아직 늘어질 나이는 아니어서 이 땅에 살기 위해 최소한 해야만 하는 서류 정리들도 좀 하다가, 아내와 내 입을 위하여 손품 파는 재미도 누려본다.

꾸준한 놈 당할 재간 없다더니 쌀가루 뿌리듯 내리는 눈이 온종일 내려 족히 6인치를 채울 모양이었다.

눈은 그치지 않았지만, 더 쌓이기 전에 좀 치워 놓아야 내일이 좀 편할 터. 이젠 삽질도 쉬엄 쉬엄 그냥 즐기듯 해야 할 나이.

건너 건너 집 snow blower로 눈 폭포 만들며 눈 치우는 사내를 보며 혼자 중얼 거려 보는 소리, ‘에이, 이사람아. 눈 치우는 건 그냥 운동인데. 암만 그냥 삽질이지. 뭔 snow blower람!’

근데 이건 또 뭐람! 이웃 집 나이 들어 장가 안 간 아들 걱정 들을 때면 함께 안타까워 했던 나였는데, 오늘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눈 치우는 것이 그렇게 부러웠다는.

머리 흔들며 정신 차릴 때마다 혼자 해보는 소리다만 내 맘은 왜 이리 간사한 것인지? 왈 종심(從心) 나이라 했거늘, 정신적 자람이 아직 내 맘 따라 갈 나이엔 이르지 못했나 보다.

그런데 몸은 이미 나이를 다 쫓아가, 아니 어쩜 더 나아 간 지경에 이른 것인지 몰라 그저 천천히 땀 식혀가며, 어둠 찾아 들기 전 쉴 곳 찾아 빠른 날개 짓 하는 새들에게 응원도 보내면서 천천히 천천히 눈을 치웠다. 눈은 이내 그 치운 자리를 또 다시 덮었지만.

저녁에 이즈음 몇 장씩 넘기던 책을 마무리해 읽었다. 역사학자 나타샤 티드가 쓴 <세계사를 바꾼 50가지 거짓말>이다.

이 책에 나오는 역사적 거짓말들을 만든 주체들은 대개 당대의 권력자들이다. 정치, 경제, 군사, 종교, 문화의 권력자들, 19세기 이후로 그보다 더 큰 권력자로 등장하는 언론까지.

이 거짓말들이 낳은 후과(後果)는 슬프게도 사람들의 죽음이었다. 그것도 한 두명의 죽음이 아니라 작게는 수백, 수천에서 많게는 수 백만, 수 천만에 이르는 당대 사람들이 겪은 이른 죽음이었다.

그 거짓이 거짓으로 드러나는데 걸린 시간은 길게는 이천 년에서 수 백 수십년 또는 오늘도 이어지는 일이란다.

단, 이 책의 허점 한가지. 바로 그 거짓을 드러내기 위해 몸부림치며 삶을 바쳤던 사람들이 이끌어 온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는 것.

오늘도 세상 곳곳에서 쓰여지고 있는 이야기들, 거짓말과 그에 대항하여 싸우는사람들을 생각하며 읽어야 좋은 책 한 권.

잘 쉰 하루. 오늘을 허락해 주신 신께 감사하는 밤에.

*** <이제 신문사는 자신들의 편견을 뒷받침하는 선정적인 기사를 만들기 위해 사실을 왜곡할 뿐이다.>  – 이 책 ‘제4장 19세기’를 여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