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

아무 수식 없이 제 이름을 그대로 불러 줄 사람이 더는 없을 줄 알았습니다. ‘영근아’. ‘영근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제가 사는 동네에선 이젠 없습니다.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누워 지내시는 아버님이 유일한데, 아버지도 이젠 제 이름을 잘 부르지 않습니다.

이젠 제 이름 앞뒤로 이런 저런 수식들이 늘 따라 다닙니다. 하다못해 ‘미스터’나 ‘씨’가 따라 다닙니다. 여기 친구들이 ‘Young’이라고 저를 부르곤 합니다만, 솔직히 ‘영근아’라고 부르는 것과는 사뭇 느낌이 다르답니다.

제 맨 이름 ‘영근아’나 ‘영근이’를 듣기 위해선 이젠 한국에 나가 어릴 적 친구들을 찾아 나서야만 되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나! 이런 행복이 어디 있을까요?

반 년 전에 정말 오랜만에 만난 어릴 적 내 고향 신촌 친구들, 더더욱 대현교회라고 하는 신앙의 울타리 안에서 함께 자란 옛 친구들과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들을 나누며 서로의 맨 이름들을 부르고 듣는답니다. 저는 친구들을 경자야, 경애야, 병덕아 라고 부르고 친구들은 저를 영근아 라고 부른답니다.

앞뜰 체리나무 꽃이 만개한 날, 여름에 꽃피는 구근들을 심었습니다. 그렇게 흙과 함께 놀다 문득 바라보니, 어느새 꽃잎 떨구며 지는 튤립들이 눈에 밟혔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한철 아름다움을 뽐냈던 아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녀석들이 제 각각 제 아름다움들이 다르더군요. 색깔과 모양들이. 튜립조차 다 같은 튜립들이 아니었답니다. 저마다 다 이름 하나씩 지어 주고 싶었답니다.

이제 저물어 가는 때에 진심으로 서로 이해하고 서로를 인정하며 옛날 어릴 때처럼 제 맨 이름, ‘영근아’, ‘영근이’를 불러주는 친구들이 있어 참 좋습니다.

오늘, 내가 누리는 행복에.

어느 덕담에

평생 동남아 선교 사역을 이어 오신 아니 지금도 이어 가고 계신 허춘중 목사님께서 제 가족 사진을 보시곤 덕담 한마디를 얹혀 주셨다. ‘두 분 옛날 70년대 모습이 있군요.’라고.

내가 그리 살지 못한 탓 때문일 터이지만, 젊었을 때 잠시라도 함께 했던 이들이 오롯이 한길, 외길을 변치 않고 걸어가며 늙어가는 모습을 보거나 듣노라면 그저 존경의 맘이 앞서곤 한다.

그이가 말한 ‘70년대’라는 말에 꽂혀 오늘 뜰 일을 하는 내내 내 스물 무렵이었던 70년대를 생각하며 잡초를 뽑고 꽃을 심었다. 신촌과 종로 5가, 서소문 거리과 골목을 헤매면서.

1970년대와 오늘 2020년대, 참 많이 변했다.

그 무엇보다 내 자신이 엄청 많이 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옛날 그나마 푸르고 맑았던 우리 내외의 70년대 모습을 기억해 주시는 허목사님께 감사를.

70년대나 칠십 대 나이 오늘이나 <세상엔 사랑이 가득한 것 같지만 우린 여전히 외롭고 허전합니다.>, <사랑, 친절, 섬김의 본질과 순수성을 잃어버>린 현실 속에서 늘 깨어 살아가야 한다고 깨우쳐 주시는 호주의 홍길복 목사님.

세상 모든 것 다 변해도 <바닥이 하늘인 세상>에 대한 믿음은 변치 않을 것이라고 오늘도 외치고 사는 내 참 벗, 대전 대화동의 김규복목사님.

필라델피아에서 80년 광주를 알리기 시작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월호 가족, 이태원 가족들과 이 땅의 이민자들을 생각하며 사람사랑, 이웃사랑을 외치며 사는 김경지선생을 비롯한 오늘 이 땅의 내 친구들.

어느덧 우리 세대도 저무는 때를 맞는다만….

비록 오락가락 비틀거리며 살아온 나이지만, 변치 않고 오직 신에 대한 믿음, 사람살이 올곧은 방향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온 이들과 생각을 나누고 살아온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 뿐.

두어 주 전 작은 텃밭에 마구 뿌려 둔 상추 싹이 트기 시작했다. 꽃보다 아름답다던가? 새 싹을 바라 보노라면 늘 설렌다.

70년 대처럼. 암만, 화단엔 가을 국화도 새 싹이 올라오거늘, 내일에 대한 설렘만은…

족보(族譜)에

손님 하나가 가게 한 쪽 벽면에 걸린 사진들을 보다가 내게 던진 물음이었다. “가족인가 봐요? 이 사람은 누군가요?” 유독 얼굴 까만 내 며늘아이를  가르키며 던진 말이었다. 그 물음을 던진 이도 얼굴이 까맸다.

“제 며늘아이지요. 그 옆에 제 아들, 그리고 이 쪽 옆으로는 제 딸과 사위랍니다. 제 가족들입죠.”

이어진 손님의 물음, “며느님 고향은 어딘가요?” 잠시 주춤거린 내게 그녀는 다시 물었다. “며느님이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요?” 순간 나는 찔금하며 한 동안 말문이 막혔었다. 간신히 대답한 내 응답, “글쎄요? 며느리는 조상들이  이 땅에 온 지 몇 세대가 지난 아이라…” 그녀가 가게 문을 나서며 내게 던진 말, “한번 물어 보세요. 며느리께. 고향이 어딘지?”

나는 공연히 얼굴이 화끈거렸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 아들 내외에게 물었다. 며늘아이의 고향을.

내 우둔한 물음에 대한  아이들의 대답이자 가르침이었다.

<아빠! 이미 몇 세대가 지난지도 몰라. 다만 조상의 누군가가 노예로 이 땅에 와서 뿌리를 내렸어. 아마 그 무렵 아프리카엔 나라라는 경계가 없었을지도 몰라. 어느 나라에서 왔냐는 질문은 틀린거야! >

순간 나는 많이 아팠다. 진보 흄내 내며 사는 내가 얼마나 가짜였는지…..하는 부끄러움으로.

파묘(破墓)에

간만에 속 ‘시원한 혁명적’ 한국 뉴스를 만나는가 했다. 결과는 분명 압도적이었건만 ‘시원한 혁명적’ 지점엔 도달하지 못했다.

‘시원답답’한 마음으로 필라에 올라가 영화 <파묘>를 보고 왔다. 아직 우리에겐 ‘뽑아 버려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그 중에 가장 앞에 서는 것 바로  ‘말’ 아닐까? 누군가의 ‘말’로 널뛰는 세상이 바로 정치요, 말이 세상을 세우는 명분이기도 하고, 때론 세상을 망치는 요설이 되기도 하므로. 그 위에 장난질 치는 으뜸 꼭두각시는 이른바 언론.

<언어가 없는 인간들에게 공동체도, 사회도, 계약도, 평화도 없다는 점은 동물세계와 다를 바가 없고 인간이 언어를 가진다는 것은 축복이자 저주이다. 합리적 사고와 과학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축복이고 일시적인 욕망과 기호에 따라서나, 산만하게 언어를 사용하여 재앙을 초래하기 때문에 저주이다.> –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가 리바이어던(Leviathan)에 남긴 말이다

하여 이제 다시 시작이다. <일시적인 욕망과 기호에 따라서나, 산만하게 언어를 사용하여 재앙을 초래하는> 저주들을 찾아 파묘하는 일에 나서는 일. 바로 요설들에 혹하지 않는 사람들의 연대를 넓혀 가는 일.

사람들이 그 일에 매진하는 세상을 꿈꾸며.

영화 <파묘> 잘 보고 돌아온 날 밤에.

미술(美術)에

미술-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세계다. 물론 아는 바도 관심도 전혀 없다. 어쩌다 미술 작품들과 마주할 때면 그저 내 느낌으로 받아드릴 뿐, 알고자 노력해 본 기억도 없다.

내 마지막 미술 교육 수업은 고등학교 일학년 때였다. 상업고등학교라 교과목도 미술이 아닌 상업미술이었다. 내겐 참으로 재미없는 수업이었다. 게다가 학기 초 수업시간에 옆에 아이와 장난을 치다가 걸려 선생에게 오지게 맞았었다.

미술 선생의 수업은 독특했다. 그림에 대한 주제를 설명한 뒤 그림을 그리게 했다. 해당 시간에 다 그리지 못하면 그걸 완성해 오는 게 숙제였다. 그리고 그 다음시간 선생의 평가가 바로 내려졌다. 평가방식이 참 독특했다. 1번부터 10번까지 우루루 교단 앞으로 나가서 열명의 학생이 자기가 그린 그림을 가슴높이로 들고 서 있다가, 1번부터 한 명씩 순서대로 한 발 앞으로 나아가 자기의 그림을 얼굴 높이로 들면, 교실 끝에 서서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림을 쳐다보던 선생이 평가를 내린다. 우수, 가작, 입선, 낙선, 선외 등으로 차례차례….

선생은 그림을 보는 것인지 학생 얼굴을 보는 것인지 나는 번번히 낙선 아니면 선외 평가를 받았었다. 나는 장난을 쳐 보기로 했다. 몇 안 되는 중고 대학 동창인 친구 하나가 이웃 반이었는데 그는 늘 우수 판정을 받곤 했다. 다행히 그 친구 반수업이 내 반 보다 먼저여서 그 친구가 우수 판정을 받은 그림을 빌려 들고 내가 판정을 받아 보았던 것이다. 결과는 영락없는 낙선이었다.

그날 이후 미술선생은 더는 내게 선생이 아니었고, 소심한 내 복수는 그날 이후 미술과는 영영 담벼락 쌓고 지내는 일이었다.

그런 내가 이 나이에 미술사 책을 읽었다. 그것도 정말 재미있게 꼼꼼히 곱씹을 곳에 포스트잇을 붙여가며 말이다. 이따금 책이 소개하는 그림들과 설명에 전율까지 느끼며 책에 빠졌었다. 김태진이 쓴 <미술사 결정적 순간에서 창조의 비밀을 배우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이라는 긴 제목의 책이다.

고전주의,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추상, 전위 등등 살며 한번쯤은 들어 보았던 이야기들에 홀렸던 것인데, 신기하게도 내가 들어 본 화가들의 이름이 제법 많다는 사실에 내 삶이 그리 팍팍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감사도 일었었다.

아무튼 이 책의 마지막 에필로그 글을 작자는 이렇게 마무리한다. <눈을 들어 당신만의 밤하늘을 보라. 그리고 시대가 정해준 삶이 아니라 당신의 영혼이 이끄는 삶을 향한 여정을 시작해보라. 오직 통찰을 향해 나아가면 된다. 그 모든 순간 재미가, 그 좋은 재미가 늘 함께 하길 바란다.>

작자는 이 맺음 말 전에 예술과 가까워지기 위해, 통찰을 얻기 위해 책을 권한다. 그것도 무조건 재미있는 책을 권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정말 재미있는 책이다.

미술사는 곧 사람살이 성장사였다. “예술은 곧 인간 사랑이다.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도록 하니까.”라는 쿤스의 말처럼 책을 읽으며 나에 대한 사랑, 사람 사랑 마침내 신의 사랑을 만나게 되는 법을 안내에 준다. 무릇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

미술 역시 인공지능의 시대를 맞게 된 오늘을 이야기하며 이 책은 이런 물음으로 끝난다. <이제 미술은 어디로 흘러가게 될까.>

단편적으로는 내 삶의 내일, 나아가 내 자식들과 이웃들의 내일에 대한 물음에 가 닿을 수 있는 물음이었다.

** 재밌는 머리 속 그림 하나. 내 고등학교 일학년 상업미술시간 그 학급 모습. 킬킬거리며 얻어내 보는 은총 하나. 그가 참 미술선생이었는지도 모를 일. 그게 1969년도 일 터이니, 55년 전인데. 이제라도 미술사를 읽고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어쩜 그의 덕일수도.

이 책을 권해 준 내 스승께도 감사를.

***개나리와 튤립에 길고 따스한 봄빛 내리며 저무는 하늘에 감사가 이는 저녁에.

관점에

오늘 손님 하나 가게로 들어서며 연신 내 뱉던 말, “Strange!  Strange! Unbelievable!

난 그의 말을 ‘이런 옘병할!’로 듣고 있었다.

하늘에 구멍이 난 것도 아니고, 사월에 장마도 아닐 터인데… 지난 일요일부터 오늘까지 줄기차게 비가 내린다.

어제 밤엔 심하게 바람이 불더니만, 내 가게와 멀리 않은 곳으로 회오리가 지나가 곳곳에 심한 피해를 입었다는 뉴스가 떳다.

손님의 날씨 불평이 어찌 그의 것이기만 하랴.

저녁에 비가 잦아든 창밖을 보니 그 빗속에서 튤립들이 배시시 얼굴들을 내밀었다.

하여 삶은 늘 익숙하고 믿을만한 것들의 연속이다.

기억에

한 시간 반을 달려가 두 시간 동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두 사람은 그들이 겪어 온 그리고 오늘도 겪어내는 이야기들을 들려 주었다. 지난 십 년 쌓이고 쌓인 두 사람의 한(恨) 맺힌 이야기들이었다.

다시 한 시간 반을 달려 돌아오는 길, 곰곰 두 사람의 이야기를 곱씹어 보니, 그들의 이야기는 맺힌 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네들이 아픈 마음으로 토해낸 이야기들은 한을 푸는 이야기들이었다.

십년 전 그야말로 허망하게 먼저 떠난 아이들을 가슴에 품고 살며 그네들이 걸어 온 이야기들은, 생명을 생명으로 귀히 여기며 사는 공동체야말로 그들의 한을 풀어내는 세상이라는 고백이며 선언이었다.

멀리 한국에서 여기까지 그 피곤한 몸과 맘으로 지난 십년 그네들이 한풀이로 이루고자 하는 세상을 꼼꼼히 기록하고 정리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자리에 함께 모인 내 오랜 벗들이자 반가운 얼굴들.

나는 다시 신(神)의 긴 호흡을 믿으며, 그 자리에서 불렀던 노래를 웅얼거리며 내려왔다.

“잊지 않을게 잊지 않을게/ 절대로 잊지 않을게/ 꼭 기억할게 다 기억할게/ 아무도 외롭지 않게”

신의 호흡

신(神)의 한 호흡은 몹시 더디고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길다. 이미 노년의 길에 들어선 내 지난 세월을 돌아보아도, 신이 과연 숨을 쉬기나 할까?라는 의심이 그칠 날이 없었으니…. 그 모두 내 무도와 무지 탓.

그 눈트임을 가져다 주는 이는 언제나 나보다 앞서 신 앞에 서있는 사람들.

겪은 아픔과 겪고 있는 아픔을 이야기하는 사람들과 그 이야기를 자신의 일처럼 듣고 있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란 신 앞에 드리는 기도. 나와 우리들이 겪었거나 지금 겪고 있는 아픔을 알 수 없는 누군가들이 다시 겪지 말았으면 하는 소망.

천년 같았을 그들의 십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더디고 긴 신의 호흡을 함께 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잠시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내 짧은 쉼에 매달리지 않고 신의 긴 호흡을 느끼는 은총의 자리일 듯.

여행, 그 후

이따금 내 마음이 아주 편안함을 느낄 때가 있다. 이런 저런 잡다한 잡념도 없고, 이렇게 저렇게 얽힌 걱정들도 없이 나아가 세상사에 대한 공연한 분노도 없이, 말 그대로 텅 빈 편안함을 느낄 때 말이다. 이럴 때면 무언가 해 내야 한다는 욕심조차 일지 않는다.

그야말로 이따금 맛보는 순간들인데, 그런 순간들을 꼽아보니 내 일터인 세탁소에서 내가 일에 빠져 있을 때가 첫째요, 손에 든 책에 빠져 들 때가 둘째 그리곤 뜰에 나가 앉아 새소리 바람소리 들을 때 그런 순간들을 맞았던 듯 하다.

그런 순간들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절로 우러나는 마음은 바로 감사다. 이젠 이따금에서 종종으로 그런 순간들을 맞이하곤 하는데 아마 이게 나이 들어 늙어가는 징조일게다.

어제 오늘, 이틀 저녁 내게 그런 편안함을 누리게 해 준 책,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이며 <아트인문학>강연으로 이름 값이 꽤나 높다는 김태진과 전자공학을 하고 사진 석사를 마치고 미술예술학 박사를 수료했다는 사진작가 백승휴가 함께 쓴 <아트인문학 여행, – 이탈리아를 거닐며 르네상스 천재들의 사유를 배우다.>이다.

이 책을 읽게 된 까닭이다.

한 석주 전쯤 짧은 이태리 여행을 다녀왔다는 소식을 호주에 계신 내 스승께 전했더니만 그가 내게 했던 말이었다.

<지난해 10월 인문학여행 때는 33명의 인문학친구들과 같이 “아는 것 만큼 보인다”라는 주제를 가지고 여러 권의 책을 소개했었는데 그 중에 인상 깊은 책, 두 권을 소개할게요. 시간 될 때 천천히 한번 읽어보세요.  1. 아트 인문학 –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 김태진지음, 카시오페아, 2. 아트 인문학 – 틀 밖에서 생각하는 법, 김태진지음, 카시오페아>>

성정 급한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그 책들을 검색하였는데, 내 눈에 딱 들어온 것은 그 두 권 이전에 <아트인문학 여행, – 이탈리아를 거닐며 르네상스 천재들의 사유를 배우다.>였다.

그렇게 나는 전문가들의 안내를 받으며 내 짧았던 이태리 여행을 다시 곱씹어 천천히 음미하며 다시 걷는 그야말로 편안한 시간여행을 즐겼던 것이다.

실제 여행 중에 내가 보고 느낀 것은 한 시대를 지배하는 돈과 종교라는 권력과 그 시대를 이름없이 살았던  나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 책은 그 시대를 지배했던 권력자들도 아니고 아직 문자보다는 그림으로 세상사를 읽는 게 편했던 나 같은 사람들도 아닌, 그 시대의 천재적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피렌체의 브루넬레스키와 보티첼리, 밀라노의 다빈치, 로마의 미켈란젤로, 베네치아의 티치아노 등 당시 천재들의 삶과 그들의 예술적 작품을 소개하는데, 그 방면엔 아주 캄캄한 내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이야기와 사진으로 나를 홀렸다. 아주 편안하게.

읽으며 내가 밑 줄 쳤던 몇 개 문장들이다.


<(그림에는) 더 이상 종교에 지배 당하지 않겠다는 예술가의 선언이 담긴 것이다…… 그림 속에는 등장 인물이 오직 신앙의 증거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추울 땐 춥다고 하고, 의구심이 들 땐 의심하고, 괴로울 땐 오열한다.>- 피렌체의 화가 마사초의 그림 설명하며

<사람들은 높은 산과 바다의 거센 파도와 넓게 흐르는 강과 별들을 보며 놀란다. 그러나 정작 스스로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 르네상스 시대를 연 시인이라고 평가받는 이태리 시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다가 크게 깨달음을 얻은 문장이란다.

<“모든 대리석 안에는 조각상이 깃들어 있다. 조각가의 임무는 그 현상을 드러나게 하는 것 뿐.”, “가장 고심해야 할 점은 엄청난 양의 노동과 땀으로 작품을 제작해야 하지만 작품이 완성된 뒤에는 마치 일순간에 매우 손쉽게 만들어진 듯이 보여야 한다는 점이다.”, “예술이 존재하는 한 예술은 세월을 초월하는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술을 더욱 완전하게 만들 것이다. >– 미켈란젤로가 한 말들이란다.

“나는 신과 인간에게 죄를 지었다. 주어진 재능에 걸맞은 작품을 만들지 못하고 낭비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 이건 레오나르도 다빈치 말이고.

<바라보다는 ‘바라다’와 ‘보다’의 합성어이다. 바라보는 건 그냥 보는 곳이 아니라 간절한 바람으로 보는 것이다.> 사진작가 백승휴가 말하는 사진찍기에 대하여


내가 이 나이에 옛 천재들을 흉내낼 까닭도 없거니와 오늘날의 권력자나 천재들에게도 마찬가지 일 터.

다만 나보다 먼저 이 세상을 살다간 이들이 경외하던 신 앞에, 내가 내게 솔직한 모습으로 한 번 서 보는 일, 한 번 흉내라도 내야 하지 않을까? 이젠.

미켈란젤로의 말, “모든 대리석 안에는 조각상이 깃들어 있다. 조각가의 임무는 그 현상을 드러나게 하는 것 뿐.”  – 신에 내게 던진 대리석은 바로 나였고, 그 대리석을 조각하는 조각가도 나였을 터이니.

자신없는 지난 모습들은 말고 다만 그 앞에 서는 오늘 만이라도… 편안하게.

여행, 그 후에.

여행 – 성(聖)과 속(俗) -그 마지막 이야기

이른 아침 숙소를 나선 우리는 로마 구시가지로 향했다. 그리고 해가 질 때까지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오후 두어 시간은 골프 카트를 타고 안내자인 Willy에게 그 거리 구석구석에 담긴 이야기들 들으며 로마의 옛 모습들을 눈에 담았다.

비록 짧은 지식이지만 로마의 신화와 전쟁, 권력 암투, 정복, 제국이 품은 종교 또는 종교가 품은 제국에 대한 역사들을 떠올려 보며 그 거리들을 걸었다. 때론 영화 벤허와 로마의 휴일 등을 떠올리기도 했었다. 비록 그 유적지는 가보지는 못했다만 사람 베드로와 바울의 여정을 떠올려 보기도 했었다.

로마는 그야말로 이야기의 도시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트레비 분수(Fontana di Trevi) 앞에서 겪은 일이다. 우리 일행은 사진도 찍고 남들처럼 분수를 뒤에 지고 분수 연못에 동전을 던지기도 하며 그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아주 애띤 얼굴의 젊은 한 쌍의 동양 아이들이 우리들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한국분들 이시지요?” 누구랄 것도 없이 “예’라고 응답했더니, 아이들이 하던 말, “저희들 사진 좀 찍어 주실 수 있어요?” 사진을 찍어 준 후 물었었다. “어디서들 오셨나요? 서울 아님 다른 곳?” 그들이 한껏 웃음을 띠고 했던 대답이었다. “저희들은 일본사람이예요. 일본에서 왔어요.” 깜작 놀라 우리들이 물었다. “아니 어떻게 한국말을 그렇게 잘해요?”  아이들의 이어진 대답. “한국 드라마 보며 배웠어요.” 그 순간 아내의 뜬금없이 빨랐던 반응, “아! 겨울연가?” 아이들이 웃으며 답했다. “아니 그건 오래 된 것이라 잘 모르고요…. 이즈음 거.”

그랬다. 한국 드라마와 K-pop의 위세는 최근 십 수 년 사이 한국을 새롭게 각인 시키는 촉매였다. 아내가 삼십 수년 이어오고 있는 우리 동네 한국학교의 큰 변화도 바로 한국 드라마와 K-pop이 만든 것이다. 이즈음 아내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은 한국계 다음세대들이 아니라, 한국 드라마와 K-pop에 반한 비한국계 미국인들이므로.

“감사합니다”하며 떠나는 일본 아이들이 더 예뻐 보였다. 이즘 애들은 계집아이나 사내녀석이나 어찌 모두들 그리 예쁜지.

나는 그 분수 연못에 동전을 던지며 빌었었다. ‘그저 이 순간이 고맙고 감사합니다. 봐주실 수 있다면, 우리들이 몇 번은 더 이런 여행을..”

카트를 운전하며 우리들을 안내했던 멋진 사내 Willy는 이태리인 아버지와 이집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단다. 그는 이태리에 대한 사랑 못지 않게 이집트에 대한 자부가 크게 드러나는 이야기들을 하곤 했다.

우리들의 여행의 준비자이자 이끄는 대장이자 일꾼인 최권사는 다음 여행 예정지로 이집트를 꼽곤 했었다. 그 말이 생각나 Willy 앞에서 내가 한 말이었다. “우리들의 다음 여행 예정지는 이집트라오!”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요리강습 이었는데,  그것이야말로 최권사의 뛰어난 발상이었고 우리들의 여행을 오래 간직할 수 있게 된 경험이었다.

그날 저녁 우리들에게 파스타 만들기를 가르쳐 준 Romina 선생댁은 바티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아파트였다. 학생들은 우리 일행 넷과 뉴욕에서 영화배우를 꿈꾸며 공부하고 있는 학생 한 명, 그렇게 다섯이었다.

우리들은 Romina 선생의 시범을 보며 밀가루 반죽을 하고 반죽을 밀대로 밀어 국수를 만들거나 만두를 빗듯 라비올리를 만들었다. 그렇게 멋진 저녁상을 함께 만들고 나누는 멋진 시간들을 즐겼다.

나는 어린 시절 교회에서 많은 영향을 받고 자랐다. 그 시절만 하여도 교회는 ‘거룩함(聖)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 주었었다. 머리 굵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거룩함(聖)’과 ‘사람살이(俗)’가 구별되어 따로인 것으로 생각하며 살았었다.

그 이후 참 오랜 세월 ‘사람살이(俗)’하며 줄곧 부대끼며 여기까지 왔다.

이제 노년의 초입, 성(聖)과 속(俗)은 그저 늘 함께 하는 것임을 배운 여행이었다.

하여 또 감사! 오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