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아픈 사월

필라세사모 벗들 가운데 한국현대사를 깊게 공부하신 이가 추천해 주어 여러 해 전에 읽었던 책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를 다시 꺼내 들어 책장을 넘겨본 밤이다.

제주 시인 허영선이 전해주는 <제주 4.3> 이야기를 읽다보면 한(恨)이 어찌 쌓이는지, 그 쌓인 한이 가슴을 어찌 매이게 하는지, 그 사월의 처절한 아픔이 내 것이 된다.

그 사월을 겪어내며 일본으로 피신해 살았던 시인 김시종은 그 사월을 이렇게 읊는다.

<내 자란 마을이 참혹했던 때,/ 통곡이 겹겹이 가라앉은 그 때/ 겨우 찾은 해방마저/ 억압에 시달려 몸부림치던/ 그 때,/ 상처 입은 제주/ 보금자리 고향 내버리고/ 제 혼자 연명한/ 비겁한 사나이/ 四.三이래 六十여년/ 골수에 박힌 주문이 되어/ 날이면 밤마다/ 중얼거려온 한 가지 소망/ 잠드시라/ 四.三의 피여/ 귀안의 송뢰되어/ 잊지 않고 다스리시라/ 변색한 의지/ 바래진 사상/ 알면서도 잊어야했던/ 기나긴 세월/ 자기를 다스리며/ 화해하라/ 화목하라

흔들리는 나무야/ 스스로 귀 열고 듣는 나무야/ 이렇게 아무 일 없이 뉘우침 흩날리며/ 봄은 또다시 되살아 오는구나.> – 김시종의 시 <사월이여 먼 날이여> 중에서

허영선이 이 책의 마무리 글에서 한탄하며 남기는 말이다.

<살기 위해 이 땅을 떠나 일본으로 향하던 이들, 그들은 떠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캄캄하고 불안한 항로, 똑딱선을 타고 가며 얼마나 떨었는가. 쓰는 내내 그 시국을 살아내야 했던 그 해의 눈빛들이 떠올랐다. -중략-

이것이 인간의 이야기인가. 수십년 동안 슬픔을 슬픔이라 말하지도 못했던 그들의 입을 대신해 이러한 방식으로 밖에 쓸 수 없었다. 이 광범위하고 거대한 비명을 어떻게 다 전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제 2023년 사월.

자유민주주의라는 헛된 구호로 오직 제 뱃대떼기 불리기 바쁜 도둑떼들이 판치는 다시 아픈 사월 소식들을 보면서….

그래도 한풀이 희망을 품고 또 살아가야 할 터. ‘제주 섬의 봄날이 그냥 그대로의 봄날이 되는’ 그 날까지.

다시 아픈 사월에.

삽질


어제 저녁 델라웨어주 남부를 휩쓸고 지나간 토네이도로 목숨을 잃은 이가 있다는 소식과 함께 전하는 신문 기사 내용이다.

바람에 집이 날아가 버린 이의 이야기란다. 이웃 도시에서 주말 저녁식사를 즐기던 중 이웃의 전화를 받았단다. “당신의 집이 다 날라가 버렸어요!.” 그녀는 이웃이 전하는 다급한 목소리가 만우절 농담인 줄 알았단다. 그렇게 모든 것이 사라졌단다. 회오리 바람으로.

그 여파로 간밤 내내 바람이 심하게 불더니만 내 뒤뜰 만개한 꽃들과 함께 나무가지 하나 부러져 땅에 누운 채 아픈 아침 인사를 보냈다.

원치 않는 아픔을 겪지 않고 사는 삶이 어디 있겠느냐만, 대개 그 아픔을 낫게 하는 힘은 더불어 함께 그 아픔을 나누는 이들에게서 비롯되지 않을까?
이어지는 신문 기사 내용들이 그랬다. 그 아픔을 함께 하는 이들의 소식들.

바람이 채 잣지 않아 쌀쌀한 이른 아침부터 온 종일 삽질을 하며 지냈다. 뒷뜰 소나무와 전나무 뿌리를 덮는 복토 작업과 잔디 평탄 작업을 위해 흙과 더불어 놀았다.

삽질을 하다가 문득 떠오른 아주 오래된 옛 일 하나. 군대 말년이었던 시절이었으니 46년 전 일이다. 예비사단 말딴 보병들의 봄 가을은 노역의 계절이었다. 해 마다 이맘 때나 가을이면 전곡 일대 야산에서 벙커 작업을 하곤 했었다.

말이 벙커 작업이지 나나 우리 부대원들이 하는 일은 산 밑에서 산 위에까지 자갈이나 시멘트 아니면 뗏장을 등짐으로 나르는 일이었다. 아침 먹고 서너 번 등짐지고 산을 오르락 내리락 하다 보면 점심 때가 되었고 똑같은 오후를 보내곤 했었다. 그야말로 막 노가다였는데 그렇게 보낸 내 젊은 시절 삼년에 대한 안타까움은 아직도 아리다.

아무튼 말년이었던 나는 적당히 눙치고 산 아래 막사에서 뒹굴 수 있는 방법은 많았으나 그저 등짐 지고 산을 오르고 내리는 일이 맘 편해 ‘시간아 가라’하며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 때 상병 둘이서 이병과 일병 세 명을 엎드려 뻗쳐를 시켜 놓고 이른바 빠따를 내려 갈기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니, 왜들 그래?” 나는 상병들에게 물었다. 그들의 대답이었다. “아니 다들 세 번 째 올라가는데 이 눔들이 요령 피면서 두 번 째 잖아요, 그래 군기 잡느나고….”

그 말에 내가 왜 그리 화가 치솟았는지는 지금도 잘 모를 일이다만 , 나는 그 때 그 상병 두 놈들에게 심한 욕설을 퍼부었고 ‘그런다고 사람을 때리냐?’며 그들 손에서 몽둥이를 뺏어 그들에게 몇 차례 빠따를 쳤었다.

군대 생활 뿐만 아니라 내 평생에 누군가를 때려 본 유일한 경험일게다. 내게 매를 맞은 두 상병들은 배 타고 기차 타고 군에 온 울릉도 출신이었다.

그리고 곧 나는 제대를 했고 이듬해 제대를 한 그 상병들이 내게 연락을 해 왔었다. “우리 고향 구경 시켜 드릴게요. 저희가 매 많이 맞아 봤는데요. 김상병님(나는 까닭없이 꽉찬 만기제대 상병이었다) 매는 정말 간지러웠다구요. 마음은 쪼매 아팠지만…” 아무렴 내 몸의 두배는 족히 될 건장한 이들이었으니….

그렇게 나는 그들 덕에 아직 개발단계에 들어서지 않았던 원초적 울릉도의 아름다움을 만끽했었다. 그들이 작살로 잡아 온 생선회와 물질로 따온 열합(홍합)으로 지은 열합밥 등등… 영화 속 어느 바닷가도 그 해 울릉도 바다보단 아름답지 못했나니, 내겐.

삽질하다 떠올린 옛 삽질 생각으로 그저 웃으며 흙과 노닌 하루였다.

멀리 뉴저지까지 올라가 세월호의 아픔을 함께 하는 오늘 내 참 좋은 이웃들과 함께 하지 못한 미안함으로 하루를 접는 밤에.

참으로 터무니 없는 삽질을 전하는 뉴스들이 넘쳐나지만 모든 삽질이 부질없는 일은 아닐 터.

함(실천)에

브라질 교육학자 파울루 프레이리(Paulo Freire)라는 이름과  그의 책 “페다고지”(Pedagogy of the Oppressed ; 피억압자의 교육학) 그리고 그가 강조했던 말 ‘프락시스(praxis)’는 내가 젊었던 시절 선생님들께 많이 듣고 고민했던 추억이 되었다.

생각과 일 곧 뜻과 함이 일치되는 삶의 행태를 일컬어 ‘프락시스(praxis)’라는 프레이리의 사상은 70년대 젊음을 보낸 내 또래들에게 우상이었다.

그리고 어제 늦은 밤, 철학자 강신주 선생의 책 ‘철학이 필요한 시간’의 책장을 넘기다 만나게 된 다산 정약용의 가르침으로 예나 지금이나 함(행동) 없는 뜻(도덕 또는 윤리 아님 정치 사회적 구호 등)이 얼마나 헛된 것임을 되씹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할 때 ‘측은지심’이 생겨도 가서 구해주지 않는다면 그 마음의 근원만을 캐들어가서 ‘인(仁)이라 말할 수 없다.” – 사람의 본성이 제 아무리 착하고 어질고 정의롭고 등등 선한 말들로 치장한다 하여도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행위가 따르지 않는다면 뜻이 없다는 정약용선생의 가르침이란다.

내가 아직도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이들의 행렬 제일 꽁무니에 서서 함께 뒤쫓아가는 일이나, 떠나온 땅이지만 언제나 고향인 모국이 진정 사람사는 세상으로 진보해 나아가는 일에 깃발든 이들을 뒤쫓는 까닭이랄까.

비록 부끄러울지라도 흉내라도 내며 살 수 있음에 그저 감사!

봄, 2023

며칠 비가 내리더니 내 뜰에 그 비 타고 봄이 내려 앉았다. 이른 아침엔 쌀쌀 하더니만  삽질 몇 차례로 이내 땀이 배는 봄이다.

여름에 꽃피는 구근들과 나무 몇 그루를 심었다.

이렇게 누리는 오늘 하루가 참 좋고 감사하다.

오늘을 감사할 수 있음을 나는 성서로부터 배웠다. 내가 배우고 이해하는 한, 성서는 철저히 오늘 내가 서 있는 세상을 이야기한다. 하여 어떤 조건이든 오늘을 누릴 수 있음은 그저 감사이며 은총이다.

저녁 나절,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이 오늘의 한국 현실을 고뇌하며 발표한 성명이 내게 은총으로 다가온 까닭이다.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 – 1974년 내 젊음을 뜨겁게 달구던 이름 가운데 하나다. 그 이름이 이제 내게 은총으로 다가섰다.

감사와 은총은 언제나 행동으로 이어지게 마련.

밭 가는 이들의 봄은 땅을 뒤엎는 일부터 시작할 터.

봄이다.

그믐달

아침 일터에서 만난 그믐달에 잠시 홀렸었다. 그 잠깐 사이에 스치듯 지난간 세월들, 자그마치 서른 세 해다.

언제 이 일터의 아침 그믐달에 취했던 적이 있었던가?

일터 한 켠엔 오랜 공사를 마친 아파트의 아침이 열리고 있다.

그믐달이 어찌 딱히 저무는 뜻만 품으랴! 또 다른 시작을 예비하라는 전령인 것을.

동무에게

시간이 바뀌어 낮시간이 사뭇 길어진 날, 흙과 함께 놀았다.

비록 두 내외가 일구는 농원이지만 내겐 대농장 주인인 벗이 한 번 심어 보라고 건네 준 묘목들을 심었다. 매화, 무궁화, 배나무, 블랙베리, 오미자 등속들이다.

‘비록 작은 텃밭이지만 흙과 놀 때 잡념이 없어 참 좋다’는 내 말에 벗이 내게 건넨 가르침이다. ‘진짜 잡념을 없애려면 잡초를 뽑아! 그게 잡념 떨쳐버리는 지름길이지!’

오늘 흙과 놀다가 문득 그의 교훈을 되씹어보니 그게 삶의 진리였다.

곡식이든지, 푸성귀든지 아님 꽃이나 나무든지 일테면  그게 사는 멋 또는 맛이라고 한다면 그를 방해하는 잡초의 훼방은 얼마나 끈질기고 강하더냐!

그저 무심히 그 잡초 없애는 일을 동무 삼는 일, 그게 바로 흙과 진정 어울려 노는 일이 아닐까?

그 한 해의 동무 찾아 텃밭에 올해 첫 씨앗도 뿌렸다. 상추, 케일, 시금치, 고들빼기 등이다.

늘 함께하는 깨동무가 있다는 생각으로 걱정없이 씨뿌리는 하루 하루를 누릴 수 있기를…

벗에게 그리고 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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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일기

“젊은이들이 일본 군대에 끌려 가거나, 군수품 공장이나 탄광으로 보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던 중 마침내 나도 일본에 있는 탄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1943년 봄이었습니다.”

“배가 시모노세키 항구에 닿자 우리 일행을 인솔하던 일본인들의 태도가 싹 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부산항을 떠날 때만 하여도 상냥했던 그들은 매서운 눈초리로 우리를 감시했고 말투도 갑자기 사나워졌습니다. 우리 일행은 그들의 감시를 받으며 후쿠오카에 있는 탄광으로 가서 석탄 캐는 일을 시작했지요. 나는 그곳에서 숱한 동포들이 힘겨운 중노동에 시달리며 혹사를 당하는 것을 보았고, 이내 그들과 함께 나 또한 힘에 붙이는 중노동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나는 그 혹독한 생활 속에서 오직 그 곳을 빠져나올 궁리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날 그들의 눈을 피해 결사적인 탈출에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일장춘몽이었습니다…..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 그 탄광으로 되돌아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조국 해방 소식을 들은 지 두 달쯤 지나 그리던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몇 해 지나지 않아 일어난 전쟁으로 나는 군에 입대했습니다…. 1951년 6월 2일 새벽에 김화(金化)지구에서 있었던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팔과 다리에 수류탄 파편을 맞고 야전 병원으로 후송되었습니다…. 그 전쟁통에 첫아기였던 귀염둥이 딸이 죽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이에 큰딸이 된 둘째 아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다니던 대학의 부속병원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한국에는 해외로 진출하려는 사람의 수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였고, 내 큰 딸도 해외 진출에 뜻을 두고 아무 연고조차 없는 생소한 땅인 미국으로 떠났답니다.”

“그리고 곧이어 대학에 다니고 있던 하나 뿐인 아들이 긴급조치법 위반으로 경찰에 끌려가 곤욕을 치루는 것을 보며 벙어리 냉가슴 앓듯 말조차 못하고 가슴만 조였지요.  그 당시 자식이 그렇게 된 것을 보며 그저 가슴 아파하기만 했던 부모가 어디 한둘일까마는 나는 그 때 큰 딸이 미국으로 훌쩍 떠난 지 얼마 안되는 데다가 아들마저 영어의 몸이 된 사실에 얼마나 서글펐던지 모른답니다.”

1996년에 내 아버지가 당신의 회고 일기로 펴낸 책 ‘한울림’에 담겨 진 이야기들이다.

아버지 속 꽤나 썩였던 아들이 모처럼 자식 노릇 한답시고 그 책 만드는 일을 도와 드렸고 제법 크게 아버지 칠순잔치로 동네 잔치도 벌렸었다.

그 때만해도 칠순이 잔치가 되었던 시절이었다.

내가 이제 그 나이에 이르렀으나… 여전히 나는 잔치 생각은 꿈도 못 꾸는 그저 철없는 아이다.

어제 오늘 한국 뉴스들에 분기탱천 하다가 넘겨 본 아버지의 오래 된 일기다.

망집(妄執)에

망상으로 일어난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고집하는 일 곧 망령된 고집을 일컬어 망집(妄執)이라 한다.

누군가의 망집은 반드시 이웃들에게 파문을 일으키게 하기 십상 이거니와. 자기 스스로가 무너지는 가장 큰 까닭이 되는 법이다.

뿐이랴! 그 망집으로 하여 남들에게 자신을 꼴 사납게 내보일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 나아가 공동체 이웃들을 망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법이다.

제 분수를 모르는 이들, 또는 아둔함과 과욕이 그 망집을 부르곤 하는 법인데, 문제는 그 공동체에서 제일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놈들이 이런 망집에 빠지기 십상이라는 게 지난 사람살이 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다.

사람에 대한 생각이 깊이 성숙하지 못한 놈들이 권력이나 돈에 환장하여 망집에 빠지면 그 사회는 아수라(阿修羅) 세상으로 변하는 법.

이즈음 한국 뉴스를 보며 드는 생각이다.

생각할수록 기괴한 윤석열, 김건희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을 내세워 제 뱃속 챙기기 바쁜 오랜된 망집에 사로잡힌 욕심에 사로잡힌 때론 선량해 보이기까지 하는….

마침내 사는 세상을 아수라판으로 만드는…

그 망집에 빠져서는 안될 일이기도 하고, 사는 날까진 그 망집과 싸울 수 있어야.

사는 것처럼 살다 가는 일.

경칩에

지난 삼 년 기승을 부릴 때도 잘 넘어 갔건만 이젠 막판 이라고들 하는데…. 아내가 덜컥 그 떠나가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만나 열흘간 고생을 하였다. 이젠 코로나 바이러스는 독감처럼 우리와 함께 가려나 보다.

아내가 털고 일어난 날, 나는 나무 묘목 몇 그루를 심었다.

겨우내 계획했던 일로 특별한 능력이나 경험도 없거니와 이렇다할 취미도 없고 더하여 넉넉하게 부를 쌓아 놓지도 못한  내가 이제 본격적으로 맞이하게 된 노년의 첫 걸음이었다.

아무리 백세 시대라고들 하지만 그게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누린다들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그 나이에 이를 수 있는 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 그저 여기까지 이르러 다만 몇 년 앞날을 준비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신에게 넘치는 감사를 드려야 마땅할 터.

그 맘으로 목련, 백일홍, Redbud 그리고 수국 몇 뿌리를 심었다.

내 노년의 봄, 경칩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