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일기

“젊은이들이 일본 군대에 끌려 가거나, 군수품 공장이나 탄광으로 보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던 중 마침내 나도 일본에 있는 탄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1943년 봄이었습니다.”

“배가 시모노세키 항구에 닿자 우리 일행을 인솔하던 일본인들의 태도가 싹 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부산항을 떠날 때만 하여도 상냥했던 그들은 매서운 눈초리로 우리를 감시했고 말투도 갑자기 사나워졌습니다. 우리 일행은 그들의 감시를 받으며 후쿠오카에 있는 탄광으로 가서 석탄 캐는 일을 시작했지요. 나는 그곳에서 숱한 동포들이 힘겨운 중노동에 시달리며 혹사를 당하는 것을 보았고, 이내 그들과 함께 나 또한 힘에 붙이는 중노동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나는 그 혹독한 생활 속에서 오직 그 곳을 빠져나올 궁리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날 그들의 눈을 피해 결사적인 탈출에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일장춘몽이었습니다…..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 그 탄광으로 되돌아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조국 해방 소식을 들은 지 두 달쯤 지나 그리던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몇 해 지나지 않아 일어난 전쟁으로 나는 군에 입대했습니다…. 1951년 6월 2일 새벽에 김화(金化)지구에서 있었던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팔과 다리에 수류탄 파편을 맞고 야전 병원으로 후송되었습니다…. 그 전쟁통에 첫아기였던 귀염둥이 딸이 죽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이에 큰딸이 된 둘째 아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다니던 대학의 부속병원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한국에는 해외로 진출하려는 사람의 수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였고, 내 큰 딸도 해외 진출에 뜻을 두고 아무 연고조차 없는 생소한 땅인 미국으로 떠났답니다.”

“그리고 곧이어 대학에 다니고 있던 하나 뿐인 아들이 긴급조치법 위반으로 경찰에 끌려가 곤욕을 치루는 것을 보며 벙어리 냉가슴 앓듯 말조차 못하고 가슴만 조였지요.  그 당시 자식이 그렇게 된 것을 보며 그저 가슴 아파하기만 했던 부모가 어디 한둘일까마는 나는 그 때 큰 딸이 미국으로 훌쩍 떠난 지 얼마 안되는 데다가 아들마저 영어의 몸이 된 사실에 얼마나 서글펐던지 모른답니다.”

1996년에 내 아버지가 당신의 회고 일기로 펴낸 책 ‘한울림’에 담겨 진 이야기들이다.

아버지 속 꽤나 썩였던 아들이 모처럼 자식 노릇 한답시고 그 책 만드는 일을 도와 드렸고 제법 크게 아버지 칠순잔치로 동네 잔치도 벌렸었다.

그 때만해도 칠순이 잔치가 되었던 시절이었다.

내가 이제 그 나이에 이르렀으나… 여전히 나는 잔치 생각은 꿈도 못 꾸는 그저 철없는 아이다.

어제 오늘 한국 뉴스들에 분기탱천 하다가 넘겨 본 아버지의 오래 된 일기다.

망집(妄執)에

망상으로 일어난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고집하는 일 곧 망령된 고집을 일컬어 망집(妄執)이라 한다.

누군가의 망집은 반드시 이웃들에게 파문을 일으키게 하기 십상 이거니와. 자기 스스로가 무너지는 가장 큰 까닭이 되는 법이다.

뿐이랴! 그 망집으로 하여 남들에게 자신을 꼴 사납게 내보일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 나아가 공동체 이웃들을 망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법이다.

제 분수를 모르는 이들, 또는 아둔함과 과욕이 그 망집을 부르곤 하는 법인데, 문제는 그 공동체에서 제일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놈들이 이런 망집에 빠지기 십상이라는 게 지난 사람살이 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다.

사람에 대한 생각이 깊이 성숙하지 못한 놈들이 권력이나 돈에 환장하여 망집에 빠지면 그 사회는 아수라(阿修羅) 세상으로 변하는 법.

이즈음 한국 뉴스를 보며 드는 생각이다.

생각할수록 기괴한 윤석열, 김건희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을 내세워 제 뱃속 챙기기 바쁜 오랜된 망집에 사로잡힌 욕심에 사로잡힌 때론 선량해 보이기까지 하는….

마침내 사는 세상을 아수라판으로 만드는…

그 망집에 빠져서는 안될 일이기도 하고, 사는 날까진 그 망집과 싸울 수 있어야.

사는 것처럼 살다 가는 일.

경칩에

지난 삼 년 기승을 부릴 때도 잘 넘어 갔건만 이젠 막판 이라고들 하는데…. 아내가 덜컥 그 떠나가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만나 열흘간 고생을 하였다. 이젠 코로나 바이러스는 독감처럼 우리와 함께 가려나 보다.

아내가 털고 일어난 날, 나는 나무 묘목 몇 그루를 심었다.

겨우내 계획했던 일로 특별한 능력이나 경험도 없거니와 이렇다할 취미도 없고 더하여 넉넉하게 부를 쌓아 놓지도 못한  내가 이제 본격적으로 맞이하게 된 노년의 첫 걸음이었다.

아무리 백세 시대라고들 하지만 그게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누린다들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그 나이에 이를 수 있는 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 그저 여기까지 이르러 다만 몇 년 앞날을 준비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신에게 넘치는 감사를 드려야 마땅할 터.

그 맘으로 목련, 백일홍, Redbud 그리고 수국 몇 뿌리를 심었다.

내 노년의 봄, 경칩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