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신화 – 왕국 12

(당신의 천국 – 스물 일곱 번 째 이야기) 

하느님께서 솔로몬에게 대답하셨다. “부귀영화를 청하지도 않고 원수의 목을 청하지도 않으며, 오래 살도록 해 달라고 청하지도 않고 내가 맡겨 준 이 백성을 다스리는 임금으로서 갖추어야 할 슬기와 지식을 달라고 청하다니, 네 뜻이 갸륵하구나. 슬기와 지식 뿐이랴? 내가 너에게 부귀와 영화도 주리니, 너와 같은 임금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다시 없으리라.” – 역대기하 1 : 11-12, 공동번역 

아주 오래 전 중국에 제자백가(諸子百家, Hundred Schools of Thought) 또는 백가쟁명(百家爭鳴, Contention of a Hundred Schools of Thought)의 시대가 있었지요. 공자, 맹자, 노자, 장자, 순자 등이 노닐던 시절 이야기 말입니다. 이름하여 춘추전국시대의 일이었지요. 춘추시대가 시작한 것이 기원전 770년 경 쯤으로 알려져 있고, 우리들이 이제 이야기할 솔로몬시대가 기원전 1000년 전후의 일이니 그 보다는 약 250년 뒤에 일인 셈입니다. 공자가 기원전 500년 경의 사람이니 그렇게 따진다면 솔로몬 이야기는 공자보다도 500년 전의 일인 셈이군요. 

공자(孔子)보다 약 300년 뒤에 살았던 사람으로 진시황제(秦始皇帝)로 알려진 사람이 있지요. 진(秦)나라의 첫번 째 황제라는 말이지요. 그의 본명은 영정(嬴政)이었답니다. 이 양반이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중국을 통일시켰지요. 

이천 여 년이 훨씬 지나서 중국의 언어를 통일시킨 마우쩌둥(모택동)이 좋아했던 인물이 바로 이 진시황이라고 합니다. 만일 진시황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중국은 유럽의 여러 나라들처럼 갈라져 있지 않았을까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답니다. 

아무튼 그 전까지는 나라의 임금을 왕(王)이라고 불렀답니다. 나라들이 많았으니 왕들도 많았겠지요. 진시황은 천하통일을 이룬 후 자신은 왕으로 불리우는 게 싫다고 황제(皇帝)라고 부르라고 했답니다. 진나라의 첫 황제일 뿐만 아니라 중국의 첫 황제가 된 것입니다. 이 황제의 의미에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있지만 신과 동일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었답니다. 

역사기록인 진시황본기(秦始皇本記)에는 이런 기록이 있답니다. “짐은 시황제이다. 후세는 숫자로 계산한다. 이세부터 삼세, 만세까지 영원무궁하도록 전해지도록 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자신의 자식들이 진이세황제,…진만세황제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지요. 

그는 또 불로장생 곧 늙지 않고 오래 사는 약을 찾았던 것으로도 유명하지요. 

그의 나이 39살이었던 기원전 221년에 통일업적을 이룬 진나라 초기에는 여러 개혁정치가 성공하면서 빠르게 제국을 안정시켜 나갔답니다. 그 전까지 봉건제로 왕과 봉건군주들이 나라를 다스렸던 체제를 버리고 군과 현을 만들어 모든 관리를 중앙에서 파견하는 중앙 집권체제를 세움으로 황제권을 강화시켰답니다. 또한 화폐, 문자, 도량형 등의 통일을 시도하기도 하였답니다. 

그러나 지나친 사상 개혁으로 인해 생긴 분서갱유사건을 비롯하여 아방궁, 진시황릉, 만리장성까지 과도한 토목사업 등으로 인한 민심의 급격한 이반이 일어났답니다. 

결국 황제의 자리가 자신의 자손 만대까지 이르리라는 그의 호언은 고작 이대황제에서 끝나버린답니다. 자신이 황제가 된지 만 15년 뒤에 일어난 일이랍니다. 

그리고 불로장생의 꿈도 그의 나이 쉰 살에 그만 마치고 말았답니다. 불로장생 약으로 믿고 먹었던 수은중독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죽기 전 말년에는 미신에 빠져들어 정신도 오락가락 했었답니다. 

들꽃

이제 솔로몬보다 천 년 후에 가나안 땅 갈릴리 바닷가를 걸으며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입지 못하였다. 너희는 어찌하여 그렇게 믿음이 약하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나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마태복음 6 : 29-30)라고 한 예수의 선포를 곱씹으며 솔로몬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솔로몬의 뜻은 샬롬 곧 평화라고 합니다. 워낙 아버지인 다윗이 전쟁터에서 피를 보고 살아 온 탓에 지어진 이름일 것입니다. 물론 야훼 하나님께서 그리 하라고 명하시기도 했고요.그러나 솔로몬이 왕이 되는 일은 그리 순탄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평화스럽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열왕기상 1장과 2장의 기록들을 보면 당연한 일들이 순서적으로 일어난듯이 보이지만 아마 솔로몬 당시의 상황은 그렇게 여유롭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배다른 형제인 아도니야와 사무엘과의 왕위 계승 쟁탈전이 결코 만만치 않은 싸움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은 다윗왕의 가신들 면면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평생을 다윗의 오른팔 심복으로 전쟁터를 누볐던 요압 대장군 – 그는 밧세바의 전 남편인 우리야를 죽이는 일에 가담했던 다윗의 심복이었던 것을 기억하시길, 또한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하여 다윗과 대적했을 때 다윗의 아들을 죽이고서도 다윗의 신임을 잃지 않았던 다윗 권력의 핵심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과 제사장 에비아달 – 이 사람은 다윗이 왕국을 통일하고 제사장 임명의 권한까지 틀어 쥐었을 때 첫번 째로 임명된 제사장임을 기억하시길 -, 등이 아도니야편에 서서 그를 왕위에 앉히려고 합니다. 

반면 솔로몬쪽에는 나단 선지자와 사제 사독, 그리고 어머니 밧세바 등이 함께 합니다. 

열왕기상 1장 초입의 기사에 따르면 솔로몬을 따르는 쪽의 세가 좀 약했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답니다. 

나단과 바셋바의 계략이 성공하여 마침내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한 첫번 째 일들은 바로 정적을 과감히 제거해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형제 아도니야와 아버지 다윗의 오른팔이었던 요압을 죽여버립니다. 에비아달은 죽이지는 않았지만 사제직에서 영원히 쫓아버리는데 이는 사제직을 담당하는 가문을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엘리 가문에서 사독 가문으로 제사장의 권한을 바꾸어 버리는 어찌보면 당사자의 죽음보다 더 큰 보복이었던 셈입니다. 

그렇게 이름처럼 평화롭지만은 않은 왕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솔로몬의 초기 통치 시절은 아버지 다윗처럼 승승장구의 세월을 누리게 됩니다. 

우선 영토에 있어서 아버지 다윗보다 영역도 넓히고 왕권의 권위도 높히게 됩니다. 특히 아버지 다윗에 비해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세움으로써 왕권을 더욱 강화시키게 되는데, 다윗시절까지 있었던 전통적인 부족개념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12개 지방관리 체제로 전환하고 그 관리들을 중앙의 왕이 통제하는 체제를 세운 일입니다. 

이 체제 아래에서의 솔로몬 제국은 그야말로 태평세월이었고, 모든 군사와 말들까지 배부르던 시절이었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유프라테스로부터 불레셋 땅을 지나 이집트 국경에 이르는 지역 안의 모든 왕국을 지배하였다. 그들은 솔로몬이 살아 있는 동안 조공을 바치며 섬겼다. 솔로몬의 하루 양곡은 고운 밀가루 삼십 섬, 거친 밀가루 육십 섬, 기름진 소 열 마리, 목장 소 스무 마리, 양 백 마리였고 그 밖에 수 사슴, 산양, 수노루, 날짐승이 있었다. 

그는 답사에서 가자에 이르기까지 유프라테스 서쪽 전지역을 다스려 사방으로 평화를 유지하였다.

이렇게 솔로몬이 다스리는 동안, 유다와 이스라엘은 단에서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마음놓고 살면서 저마다 자기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두 발 뻗고 잘 수 있었다. 

솔로몬에게는 병거를 끄는 말을 둘 마굿간이 사천 간 있었고 말이 만 이천 마리있었다. 그리고 이들 관리들이 솔로몬 왕과 솔로몬 왕의 식탁에 참석하는 이들을 위하여 각기 한 달씩 부족함이 없게 양곡을 내었다. 그들은 병거 끄는 말과 짐 나르는 짐승들이 먹을 보리와 밀짚을 지정한 곳으로 가져왔다.> – 열왕기상 5 : 2-8, 공동번역 

그의 영화는 이런 부(富)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이런 인간적 부에 속한 일로 치부한다하여도 야훼 하나님께서 머무르시는 성전 역시 그가 지었다는 일입니다. 

솔로몬 초기의 영화스런 모습은 성공신화의 최절정이었습니다. 

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