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는 이야기 1

사사시대 이야기를 마치고 이스라엘이 국가가 되고 왕을 세우는 왕권시대와  예언자 시대 이야기로 넘어가려다 잠시 쉬다 가려고 합니다. 

성서 사사(판관)기와 사무엘서 사이에 끼어 있는 룻기 역시 쉬어가는 이야기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뭐 성서 그러면 신구약 합본책을 말하고 어디에서나 보려고만 한다면 쉽게 구해 볼 수 있습니다만, 옛날 한 세기 이전에 한국 사람들이 볼 수 있었던 성서라야 중국 성서를 번역한 마태, 마가 등의 신약성서 낱권이었답니다. 번역 출간된 순서대로지요. 

딱 그 때 뿐만이 아니라 소형 책으로 편집된 신약성서로 처음 성경을 대하는 사람들이 첫 페이지를 넘겨서 읽는 마태복음은 아주 낯설게 다가 온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답니다. 족보 이야기로 시작되기 때문이지요.

누가 누구를 낳고…로 시작되는 족보 이야기 말입니다. 

룻기는 바로 그 족보 이야기 가운데 하나랍니다. 누구의 족보냐하면 이제 왕권시대의 주인공이자 유태인들의 메시아 원형이 되는 다윗의 것이지요. 다윗의 증조 할아버지, 할머니 이야기랍니다. 

마태복음의 족보는 바로 예수와 다윗 그 윗대로 아브라함과 연계되는 핏줄을 밝히는 것이랍니다. 

이건 단지 제 생각일런지 모르지만 그 족보 이야기 별로 중요하진 않고요, 그게 사실 이건 아니건 그건 더더구나 중요하지 않고요. 왜 그렇게 연결이 되어져야만 했을까하는 물음은 아주 타당하고 의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은 한답니다. 

자! 그 이야기는 나중에 마태복음 이야기할 때 드리기로 하고요. 오늘은 저도 좀 쉬어가려고 한답니다. 

제 이야기의 주제인 당신의 천국 – 하나님 나라 이야기는 잠시 쉬고요. 도대체 제가 왜 이런 글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제 정신의 족보 이야기를 좀 드리려고 한답니다. 

그러므로 제 연재 글을 읽다가 지치신 분들도 잠시 쉬어 간다는 생각으로  읽어도 좋고 안 읽어도 좋답니다. 

벌써 오륙년 전 쯤의 일이 되었습니다만 마더 테레사 수녀가 세상을 뜬 후 그녀가 남긴 기록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그녀가 오랜  기간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했었다는 뉴스들이 Time지를 비롯해 회자되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 무렵 제가 사는 인근 필라델피아에서 발행되는 어느  한인 일간지에 지역에서 제법 이름난 규모있는 교회 목사의 컬럼이 실렸답니다. 내용인즉은 마더 테레사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한 까닭은 그녀가 성서를 읽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답니다. 

화장실에 앉아서 볼 일보다 그 컬럼을 읽고는 “쯔쯔쯔”하는 생각에 그 컬럼을 비판하는 글을 신문에 게제시킨 적이 있답니다.(제가 시켰다고 표현한 것은 당시 그 신문에 조금 관여를 했었기에)  

Mother-Teresa-1981.07.09

제가 쓴 글의 내용인즉은 “테레사 수녀가 성경을 안 읽었다기보다  목사인 당신이 성경을 안 읽은 것 같다. 성경은 신을 의심하고 배반하고 거역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런 사람들에게 꾸준하게 사랑으로 신의 존재를 알게하고 인도하려는 것이 성서이다. 심지어 인간이 된 신 곧 예수도 신에 대한 물음을  던졌었다. 십자가 상의 칠언을 생각해 보라. ‘어찌하여 나를 바리시나이까’하는 처절한 물음을 테레사는 안고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삶을 보라. 두툼하게 살찐 당신의 사진 얼굴로 보아 아마 당신은 그 경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성서를 열심히 좀 읽어라.”라는 아주 도발적인 글이었답니다. 

참 저도 할 일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세상엔 저만큼 할 일 없는 사람들도 많더라고요. 제 글을 읽고  전화를 주시는 분들이 계셨는데요. 크게 두 부류였답니다. “네 깟 놈이 뭘 안다고  감히 목사님께…”하던 사람들과 “참 시원했다. 참 목사들이 문제다.”라는 사람이었답니다. 물론 후자는 딱 한 분, 직업이 목사였구요. 전자는 글을 쓴 목사가 당당하는 교회 교인들이었답니다. 

그 일 이후로는 이런 저런 이유로 교회나 목사들을 향한 글은 거의 쓰지 않았답니다. 먹고 살기 바빳던 이유도 한 몫 했고요.

그러다 한 두 해전에 고등학교 후배가 아버님께서 돌아가실 듯 하니 선배가 좀 장례예식 좀 맡아달라는 부탁을 해 왔는데 그 이유가 아주 걸작이었답니다. 

후배의 선친께서는 독실한 천도교인이셨고, 본인의 마지막 길을 천도교 예식으로 마치길 원하셨답니다. 그런데 여기는 미국, 그것도 대도시가 아닌 촌구석, 천도교 교령이나 선도사커녕 교도들도 찾아보기 힘든데 누가 그 일을… 후배가 생각하기에 가짜라도 만들어야겠는데 그 가짜로 선배인 제가 적격이라는 것이었답니다. 

그래 그 일을 맡게 되었답니다. 그 때 천도교에서 고백하는 죽음에 대한 자세도 배우게 되었고요, 고인이 되신 후배의 선친께서 남기신 기록들을 보면서 죽음이란 안고 가는 것이다라는 생각도 해 보았답니다. 

그리고 지난 겨울과 봄 사이 심하게 병원 신세를 지시면서 마치 곧 돌아가실 것 같던 어머님과 장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삶의 과정으로써의 죽음에 대해 깊히 생각해 볼 수 있었답니다. 

그러다가 초여름이 지날 무렵 잘 나가지도 않던 교회 소모임에서의 경험은 제가 이 연재글을 쓰기 시작한 직접적인 동인이 되었답니다. 

죽음, 천당, 다른 종교 라는 물음입니다. 이거 하나 하고 가자하는 생각이 확 밀려 왔답니다. 

그 누군가 단 한 사람만에게라도 성서가 인도하는 계시의 세계, 구원의 세상, 죽음조차 과정인 하나님 나라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하는 생각이었답니다. 

쉬어가는 이야기조차  1, 2로 나누어 연재해야겠습니다. 하다보니 이야기가 길어지는 탓입니다. 

혹시 사기꾼 신드롬이나 가면(mask) 신드롬이란 말 들어 보셨나요?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 의심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말할 때 쓰는 말이지요. 

올 여름 내내 제가 빠져있었던 신드럼 현상이라는 생각으로 이 연재글을 시작하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네깐 놈이 뭔데…”라는 질문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두번 째 이야기로 넘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