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 그리고 시편 23편

어제 오후, 눈발이 날리는가 싶었는데 이내 쌓이기 시작했답니다. 일기예보에는 분명 오후 6시 이후에 폭설이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 시간이 앞당겨진 듯 하였습니다. 그래 부랴부랴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향한 시간이 오후 2시였답니다.

평소에는 평지였던 길들이 눈이 오거나 얼음비가 내리면 모두 가파른 오르막, 내리막 언덕길로 바뀐답니다. 평소에 20분이 채 안되는 거리인데 집에 도착하니 3시 30분이 지나있었답니다. 1시간 30분여가 걸린 것이지요. 차가 엉금엉금 기어온 탓이랍니다. 비록 집앞 언덕길을 오르지 못하고 드라이브웨이 끝에 차를 박아놓고 들어왔지만 그나마 무사히 집에 도착한 것이 감사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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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는 드라이브웨이에 쌓인 밤새 내린 눈과 얼음비를 치우느랴고 또 한시간 반이 걸렸답니다.

오늘이 일요일이라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시며 머리속에 떠올린 시편 23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비단 교인이 아니더라도, 처음 이 시를 접하는 사람이라도 읽으면 그저 편안함이 밀려오는 시입니다.

성서에 다윗임금이 쓴 시라고 적시하고 있지만 언제 누가 이 시를 지었는지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분분하답니다.

숱한 주해와 주석들은 물론이거니와 이 시편을 주제로 한 설교들은 그야말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일겝니다.

우선 시편 23편을 읽거나 떠올릴 때에 처했던 나의 상황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어제 오후에 눈길에 이리저리 미끌어지는 차들을 보면서, ‘나는 저렇게 미끌어지거나 쳐박히는 일없이 안전하게 집에 가야지’하는 마음으로 조심조심 집으로 향할 때는 “뭔 놈의 눈이 이렇게 많이 내리나?”, “행여 앞이나 옆이나 뒤에 있는 차가 미끌어져 나를 박지는 않을까?”하는 생각들이 이어졌었답니다. 그러다 집에 도착해 바라본 내리는 눈과 눈에 쌓인 동네 풍경이 그렇게 아늑할 수가 없었답니다.

위험한 눈길 운전 후에 무사히 집에 도착해서 눈내리는 아늑한 풍경을 보며 떠올린 시편 23편은 그야말로 “신이 함께 하시는 편안함”일겝니다.

그런데 만일 어제 그 눈길에서 미끌어져 어딘가에 쳐박혔거나, 심하게는 내 차가 누군가를 들이박거나 누군가가 나를 들이받아 병원에 누워서 시편 23편을 떠올렸다면 느낌은 어떤 것일까요?

물론 “불행중 다행이다. 죽지않고 이만한 것도 다 신이 함께 하신 은총이다.”라는 고백이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만일 큰 사고가 나서 죽음에 이르게  되어 저는 떠나고 남아있는 이들이 읽게 될 시편 23편은 어떤 느낌일까요?

읽은 사람들의 처지와 형편 곧 “삶의 자리”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듯이, 시편 23편을 쓴 사람(또는 사람들)의 삶의 자리에 대한 이해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이 시편에 대한 숱한 주석 가운데 독일학자 Willy Schottroff의 이해는 아주 독특하답니다.

그는 시편 23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시가 쓰여졌던 사람들의 ‘삶의 자리’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은 견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는 표현에 실제로 구체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해석이 단 한번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다. : 즉 성전안에서의 거주와 대접, 보호에 대한 진술을 말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럼으로써 이 시편을 실제로(예루살렘의) 거룩한 곳에서 피난처를 발견한 사람의 확신의 노래로 해석하는 시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Willy Schottroff는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는 말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당시 사회에 있었던 “도피처로써의 거룩한 곳(예루살렘 성전을 위시한 각지에 있었던 피난도시들)”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나아가 Willy Schottroff는 당시 이런 도피처를 찾아 평안함과 편안함을 누렸던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회적 또는 경제적 이유에서 – 예를 들어 국가에 세금을 많이 내지 못하거나 혹은 개인적인 빚을 갚을 수 없어서 많은 빚을 걸머지고 노예로 팔려갈 위협에 처해 있는 경우- 도피처를 찾다가 성전에서 보호받을 수 있었던 사람들. 굶주림으로 고통스럽게 연명하는 사람들. 임시고용인, 용병 등으로 고분고분 일만 해야했던 사람들. 채무자로부터 긴박하게 추격당하는 사람들. 도망한 노예들. 고향에서 박해를 받아 고향을 등진 정치적 망명자들. – 바로 이런 사람들이 여호와의 인도와 보호, 보살핌”에 따르는 평안함과 편안함을 노래한 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당시 사람들의 “삶의 자리”를 제대로 이해하면서 시편 23편 머리에 있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첫 선언을 다시 읽는다면 그 의미는 아주 명백해진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목자됨은 더 이상 법적으로 정당한 사람들의 편에 있지 않다. : 즉 여호와는 피의 복수자나 채권자, 또는 노예주인의 편에서 그들의 권리를 되찾아 주거나 아니면 추상적인 법이 구현되도록 도와주지 않는다.

반대로 여호와의 목자됨은 추격당하는 도망자, 쫓김을 당하고 위험에 처해 있는 짐승을 보호하는 것이다.

여기서 신(神)적인 목자의 보살핌은 이미 강한 자를 더욱 강하게 해주고 사회적인 지배자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자신들의 권리 뿐만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도 걱정을 해야만 하는 약자, 박해받는 자들을 향하고 있다.>

눈속에서 떠올린 시편 23편을 다시 생각해보면서, 나의 평안함과 편암함 넘어선 곳에서 일하시는 목자로서의 신의 모습과 그 신께서 오늘 여기에서 돌보시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 인용문구들은 한국신학연구소에서 펴낸 <성서해석 – 무엇이 새로운가>에 실린 Willy Schottroff의 <시편 23편의 사회사적 성서주석>에 나오는 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