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동기동창 그리고 목포
어린시절 중,고등, 대학에서 함께 지낸 동기동창 두 명이 있었다. ‘있다’가 아닌 ‘있었다’가 된 까닭은 한 친구가 아주 일찍 세상 떴기 때문이다. 참 독특한 친구였다. 용산 철도고등학교 앞에 살았던 박해용은 중학교 때부터 사진찍기와 음악을 무척 좋아했다. 중학교 때 이미 사진인화를 위한 자기만의 암실을 갖고 있었고, 클래식 음악을 담은 꽤 많은 양의 릴테이프를 소유하고 있었다. 사진과 음악을 좋아했던 상고 출신 박해용이 선택한 학과는 물리학과였다. 대학 교정에서 그의 얼굴을 보긴 참 힘들었다. 당시 연극 배경음악 작곡에 빠져 있던 그는 거의 학교에 나오지를 않았었다. 그 도가 지나쳐 유급 판정을 받고 급기야 제적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 위기를 벗어나기에는 그는 너무 멀리 나가 있었다.
그는 학교 교문에다 시원하게 오줌 큰 줄기 쏟아내곤 다른 대학교 물리학과로 옮겼다. 그 대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에서 학위를 다 끝내고 그 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갓 마흔 언저리에서 세상을 놓았다.
그리고 이제 하나 남은 박상열은 몇 십년을 떨어져 있다가도 목소리 들으면 “얌마! 새꺄!’가 저절로 터져 나오는 거의 유일한 친구다. 목소리는 이따금 들었다만 얼굴 본지는 거의 스무해가 지났을게다. 서울 숙소에 짐을 풀고 그에게 전화를 했다. “나 왔다!”, “그래 너 지금 어디야?”, “강서구 쪽 숙소에…”, “얌마, 그냥 우리 집으로 와! 그냥 짐 싸 갖고 와!”
며칠 후 만난 그는 “너 뭐 먹고 싶냐? 먹고 싶은 거 있을 거 아냐?”, “야! 너 가고 싶은덴 없냐? 말해 봐! 가고 싶은데….” 연신 다그쳐 물었었다.
그렇게 상열이 내외 덕에 우리 내외는 눈과 입의 호사를 많이도 누렸다. 서울에 있는 동안 거의 지하철만 타고 다녀 바깥 구경은 매우 한정적이었는데, 옛 서울 사대문안 토박이인 그의 아내의 안내와 설명을 들으며 내 기억 속 거리와 사뭇 다른 풍경들을 즐길 수 있었다. 특별히 마포와 신촌, 굴레방다리, 아현, 서소문, 서대문, 독립문, 사직동, 통인동, 효자동, 익선동 등 우리 내외의 어린 시절 추억들이 남아 있는 거리들을 두루 돌아보아 참 좋았다.
통인시장 삼계탕집에서 만난 톱밥난로는 아주 어린 시절로 나를 데리고 가 한참을 쳐다보고 서 있었다. 어렸던 시절 다니던 신촌 대현교회에는 겨울이면 톱밥난로가 달아오르곤 했다. 톱밥난로 곁에 앉아 이따금 날아올라 반딧불처럼 반짝이다가 사라지는 재를 바라보며 목사님이나 선생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자장가 삼아 나른하게 졸음에 빠져들던 내 유년을 만났던 것이다.
종로 3가 익선동은 내겐 새로운 발견이었다. 그 동네가 이렇게 변하다니 그저 놀라움 뿐이었다. 나는 아내와 상열이 내외에게 이젠 돌아가신 정석기목사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내 스물 어간에 신촌 대현교회서 만나고, 거의 삼십년 만에 뉴욕에서 만났었던 정석기목사님의 종로 삼가에 얽힌 아주 슬프고 아린 이야기들을.
우린 익선동 거리거리들을 둘러 보았고, 어느 찻집에 들어가 정말 오랜만에 방석을 깔고 앉아 느긋하게 두런두런 사는 이야기들과 세상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대학 졸업 무렵이었던가? 상열이는 몸이 안좋아서 병원출입이 잦았었다. 그는 유학의 꿈을 접고 모교에서 학위를 다 끝낸 후 평생 학교에서 연구하며 아이들을 가르치다 은퇴하고 이젠 명예교수인데, 뭐 그런 거 보다 이런 표현이 맞나 모르겠다만, 두 내외가 참 예쁘게 살아 보기 참 좋았다.
평생 법학자로 살아온 그에게서 들은 한국 상황에 대한 이야기들은 내게 많은 깨침을 주었다.
그리고 목포. 이번 한국 여행에서 우리 내외 단 둘이 일박 이일 먼 여행을 다녀 온 곳이 목포인데, 이게 다 상열이 덕이었다. 그가 물었었다 “야! 어디가고 싶으냐?” 한참을 망설이다가 내 입에서 튀어 나온 말이 목포였다. 뭐 큰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경북 봉화도 가보고, 충남 대전도 가 보았으니 호남 쪽으로 가 볼 만한 데가 없을가 생각하다가 떠오른 목포였다. 아내나 나나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상열이는 마침 잘 되었다며 목포가 좋아 내려간 지인이 있는데 잘 안내해 줄 것이라며 바로 전화를 했다. 그렇게 함께 목포를 가려고 했었다만 문제가 생겼다. 올해 백 그리고 넷이 되시는 상열이 어머님 간병시설과 간병인의 스케쥴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짧은 여행시간 역시 문제였다.
그렇게 우리 내외는 단 둘이 목포 일박 이일 여행을 다녀왔다. 숱하게 들었던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아주 새롭게 다가왔던 여행이었다. 나이들어도 결코 흥이 멈추지 않는 아내는 목포의 눈물 녹음 테이프가 쉬지 않고 돌아가는 유달산 이난영의 노래비 앞에 서자, ‘여기서 목포의 눈물은 함께 불러 주어야지!”하며 한 자락을 뽑았었다. 등산객을 관중으로 두고서. 그리고 참 모를 일이었다. 정말 평화로운 모습의 목포 앞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카페에 앉아 까닭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훌쩍거리던 내 모습이. 일박 이일 목포 이야기는 조금 더 되새겨야 마땅하다.
헤어지던 날, 상열이가 말했다. “언제 또 오냐?”, “글쎄…. 모르지 뭐…. 니가 함 오던가….”. “애들은…”, “글쎄 아들 며느리는 모르겠고, 딸 사위는 자주 오가는 편이지..”, “야! 그럼 애들 나올 때 우리 집에 있으라고 해, 편하게 해줄게.”
그저 감사하고 고마웠다. 내 유일한 중, 고, 대학 동기동창 박상열에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