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사람, 사랑 – 한국여행3

<편안 또는 평안함에>

    2025라는 숫자가 아직 낯설건만 어느새 일월이 저물고 있다. 설날이라지만 내 삶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별 감흥은 없다. 이젠 시간의 흐름에 대해서도 제법 넉넉한 흉내를 내보곤 한다.

    2024년과 2025년 사이에 걸쳐 있는 이번 겨울은 앞으로 내 기억이 제대로 일하는 한, 제법 오래 그리고 깊게 간직하고 싶은 계절이다.

    농사 짓는 친구들 셋이 있다. 지금 가장 가까이 살고 있는 정무훈의 농장은 내 집에서 20분 거리 펜실베니아에 있다. 그의 집은 그 농장 한 가운데 있다. 한국에서 제법 길게 선생 생활을 하다가 이민 와서 누구나 그렇듯 열심히 살다가 늙막 초입에 농장을 일군 그였다. 벌써 십 수년 전일이다. 그의 부친은 독실한 천도교인이었다. 그는 교인은 아니지만 그에게선 도인의 품을 느끼곤 한다. 가까이 살아도 이젠 일년에 한 두차례 얼굴 보고 지낸다.

    경기도 벽제에서 농사를 짓는 병덕이는 내 불알친구다. 대기업에서 오를 때까지 다 올라갔다가 그만 둔 후 농사 짓기 시작한 지 거의 스무 몇 해가 지났을게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환경운동에 관심을 가졌던 터라 그의 농사 일도 다 그 운동의 일환이 아닐까 싶다. 젊은 시절 헤어져 근 반 백 년 사이에 서너 차례 얼굴 보았으니 십년에 한 번도 채 안 되는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똑 같은 모습으로 성실하고 크게 나서지도 그렇다고 결코 숨지도 않는 예수쟁이다.

    경상북도 봉화에서 농사짓고 사는 서암 오시환은 조금 독특한 만남을 이어온 친구다. 대학 같은 과 후배인 그와는 1975년 봄에 담쟁이 넝쿨 덮힌 대학건물 앞에서 본 게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이십 수년이 지난 2002년 어느 날, 책 몇 권 산다고 기차 타고 나들이에 나섰던 뉴욕 맨하턴의 어느 한식당에서 우연히 그를 다시 만났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가 기차를 타고 우리 집에서 다시 만나 하루 밤을 묶었다. 그리곤 또 끝이었다. 그후 잘 나가던 대기업 홍보 카피라이터였던 그가 경상북도 봉화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름만 대면 대한민국 사람 누구나 잘 아는 기독교계 중, 고등, 대학교를 나온 그는 독실한 불교도이다. 내가 교인이라는 말보다는 예수쟁이라는 말을 좋아하 듯, 그 역시 불교도보다는 불자가 더 어울릴 듯하다.

    지지난해인 2023년 가을에 한국을 방문 했을 때 그를 꼭 다시 보고 싶었었다. ‘가마!’하고 약속을 했었건만 짧은 일정에 쫓기다 보니 미처 그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었다. ‘미안하다’는 내 말에 그가 보냈던 답글이었다. ‘우리 살 날이 그리 많지 않은데요….’

    하여 이번 여행, 서울에 도착한 이튿날 바로 몸 실은 기차가 영주행 KTX였다. 내 또래 서울내기들은 기억할 것이다. 옛날 옛날에….그러니까  1960년도 어간에….. 서울에서 동해안으로 가려면 청량리에서 떠나는 중앙선을 타고 경북 영주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강원도 쪽으로 올라가는 자그마치 열 몇 시간을 야간열차에서 지냈던 시절말이다. 헌데 2024년 12월, KTX는 영주까지  고작 두 시간 조금 넘는 시간에 나와 아내를 데려다 주었다.

    친구는 역 앞에서 반갑게 우리 내외를 맞아 주었다. 그리곤 일박 이일, 그는 정성을 다해 영주와 봉화 일대의 관광지들을 안내해 주었다. 무섬마을, 소수서원, 죽령 등등 내 장인의 본래 고향인 경북이지만 아내도 처음이고 나도 처음인 소백산 줄기줄기들을 두루 돌아보는 호사를 누렸었다.

    그리고 봉화 외딴 마을 그의 농장과 집은 우주의 중심이었다. 그와 그의 아내는 농부인 동시에 예술가였고 봉사자였고 새로운 세상에 대해 꿈꾸며 실천하는 활동가였다.

    그의 목공예와 아내의 도공예, 가죽공예와 캄보디아 오지에 마을을 세우고 학교를 세우고 자라는 아이들에게 예술을 심고, 경상북도 봉화 그 외진 마을에 봉잼(봉화에서 잼나게 사는 사람들)마을을 세우는 그 끝없는 열정이 솟아나는 곳, 바로 우주의 중심 서암 오시환이 사는 그 농장이었다. 그 곳에서 하루 밤을 묶은 우리 내외는 참 복 받은 삶이다.

    그의 삶, 한 단 편인 캄보디아 열정을 담은 책이 나왔다해서 예매를 해두었다.

    이쯤 농사를 짓고 사는 내 세 친구들의 공통점이다. 비록 모두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우리 나이에 그들의 얼굴은 보면 볼수록 참 편안하고 평안함을 느낀다. 그래서 참 좋다 정말 좋다.

    친구 시환이가 안내했던 2024년 12월 마지막 즈음  황혼이 내리던 영주 부석사에서 내려다보는 소백산 줄기의 그 아름다움에 잠시 내 지난 삶속에서 누렸던 신의 은총을 되새겼던 그 순간을 선사한….

    이런 친구들을 내 살며 친구로 삼을 수 있어 얼마나 좋으냐! 참 큰 복이다. 그래 감사다!

    삶, 사람, 사랑 – 한국여행2

    2. 약상자

      올겨울 들어 제일 추운 날이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체감온도가 -5도(섭씨 영하 20도)에 이르니 노약자들은 바깥출입을 삼가란다. 이런 추위가 사나흘 이어진단다. 예보의 호들갑 아니어도 바깥출입을 마다한 게 벌써 일주일이 넘어 열흘에 가까워온다. 느닷없이 만난 아주 독한 감기 몸살 탓이다. 약먹고 눕고를 거의 일주간 이어오다 자리 털고 일어난 게 엊그제이다. 약하고는 그리 친하게 지내오지 않았던 터라 거의 일주일동안 시간 맞추어 약을 먹는 일은 내겐 생소한 경험이었다. 그러다 생각난 철이의 거대한 약상자였다.

      가히 19인치 노트북 크기만한 거대한(?) 철이의 약상자를 본 것은 중미산 자연 휴양림 산장에서였다.

      철이, 그렇다. 그의 이름은 김철이다. 몸크기가 나보다 족히 두배는 될 건장한 청년 철이에 대한 내 마지막 기억은 그가 ROTC제복을 입고 있었던 대학생 때였다. 그리곤 지난 12월에 다시 만났으니 그 사이 사십 오룩 년은 족히 지났을게다.  비록 한 해 후배였지만 친구처럼 지냈던  철이의 맏형 김추를 보는 듯했다.

      터무니없이 세상을 일찍 떠난 김추네와는 한골목에서 제법 오래 살았었다. 터울이 지는 철이와는 크게 함께 한 시간은 없었어도 수십년 만에 만난 얼굴이어도 옛정들이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이번 한국여행의 첫번째 이유는 내 고향 신촌친구들과 어릴 적 함께 고백했던 신앙의 뿌리를 새겨보며 지난 시간들에 대한 감사를 되뇌어 보자는 것이었다. 하여 그 시절 친구들 얼굴을 많이 보았다. 그 중에 철이는 막내격이었다.

      그런 그가 자원해서 준비했던,  중미산 자연 휴양림 산장에서 하룻밤 머무며 수십년 만에 만난 벗들이 이야기 한 자락 맘껏 늘어 놓는 자리였다.

      덜렁덜렁 쫓아갔던 나는 미처 몰랐었다. 휴양림 산장에서 하루 밤을 보내고 난 이튿날, 철이가 준비해 왔던 짐을 다시 꾸리기까지 그가 그 날을 위해 얼마나 애썼던지를. 그의 차를 한가득 족히 메운 각종 짐들은 그 산장에서 함께 했던 우리 친구들이 한 순간이라도 불편함과 부족함을 느낄 수 없도록 하기 위한 그의 애씀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가방 한 구석에 꽂혀 있는 그의 거대한(?) 약상자를 보았던 것이다. 그는 오랜 투병생활의 마지막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기다리며 기도하는 것 그의 완쾌 소식이다.

      이번 여행 중에 만난 몇몇 벗들 역시 병과 씨름하고 있었다.

      살며 몸과 맘에 병 없이 사는 삶이 어디 있겠느냐만, 바라기는 몸의 약이던 맘의 약이던 오늘 살아 숨쉬고 있음에 대한 감사로 이어지기를 내 스스로에게 빌며.

      다시 새겨보는 막내 철이에 대한 깊은 감사로. (환조 목사님과 친구 병덕이에 대한 감사는 덤으로 하고)

      삶, 사람, 사랑 – 한국여행 1

      1. 걸으며…

      기억의 오류 탓일까? 아님 이제 나이 든 때문일까? 기억컨대 길든 짧든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 일을 앞에 두고 주춤거렸던 적은 없었던 듯하다만, 이번엔 영 아니었다. 자그마치 꼬박 나흘을 헤매였다. 밤이면 잠이 달아나고 낮엔 눈이 게슴츠레 감긴 채 지냈다. 그러다 간밤에 내 잠시간을 온전히 되찾았다.

      아직은 ‘아니!’라고 외치고 싶다만 정말 아니가보다. 이젠.

      광화문 거리를 걷다가 들린 교보문고에서 뽑아 들고 온 책 <나이듦에 대하여> 78쪽엔 이런 말이 있다. <누구나 나이가 들고, 누구나 노인이 된다. 지금도 그렇고 과거에도 그러했다. 모두는 아니겠지만 상당수가 노인이 되었다. 지금까지 지구에서 태어난 인류의 총수를 1천 82억명이라고 한다. 대략 수백억 명이 노인이 되었다는 말이다.>

      1천 82억명 가운데 하나이자, 영광스럽게도 노인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수백억 명중 하나가 되었다. 이젠.

      사실 이번에 서울 지하철에서 난생 처음으로 자리 양보를 받았을 때엔 그야말로 난감했었다. 주춤거리며 제법 큰소리로 자리를 양보하는 젊은이에게 말했었다. “아니요! 아니요!” 끝내 나는 자리를 양보 받았고 그날 이후 나는 지하철 노약자석에 자신있게 앉아 다녔다. 그리고 생각난 내 고모님이었다. 햇수로는 벌써 삼년이 지났다만 시간으로 따지자면  만 일 년 조금 전에 아흔 두해 사시고 세상 떠나신 하나 밖에 없는 내 고모님께서 얼추 내 나이 적에 크게 웃으시며 했던 말씀이었다. “얘야! 버스를 탔더니 젊은 아이가 자리를 양보하지 뭐냐? 넌 아직 모를거야, 그 때 내 심정 말이지. 화가 나더라니까….” 어느새 나도 그 때 그 시절 고모님 나이에 이르렀고, 그 고모님은 이젠 한국 가서도 뵐 수 없었다.

      본전을 뽑고 싶었다. 한국에서 낳고 살았던 세월보다 미국에서 산 세월이 오년이 더 길어졌다. 여기도 평생 외국이고, 한국도 이제 내갠 외국이다. 가는 비행시간 쉬지 않고 15시간 반이고, 집에서부터 서울 숙소까지 이르는데 꼬박 22시간이 걸린 여행길이었다.

      글쎄, 언제 또 한 번 가 볼 수 있을까? 하여 본전을 뽑고 또 뽑고 싶어 걸었다. 아내의 손을 잡고, 때론 아내를 앞세우거나 아내보다 한 걸음 앞서거나 또는 혼자서 걷고 또 걸었다.

      우리 내외 고향인 신촌과 소년, 소녀기와 청춘을 보낸 신문로 광화문 효자동 안국동 인사동 종로 을지로 남대문 명동 마포 공덕 등지의 서울 거리와 강남 강동을 비롯한 경기도 일산, 철원, 전곡, 양평등지의 경기도와 경상도 영주 부석사를 비롯하여 충북과 경북이 만나는 죽령고개, 그리고 잊지 못할 봉화에서의 하루 밤, 오랜 벗 내외가 평생 일구어 온 이야기를 만난 대전 대화동을 거쳐 이제야 이난영의 소리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 전남 목포거리와 유달산, 그리고 새해맞이 해돋이를 보며 아내손을 잡고 걸은 강원도 속초 해변 모랫길.

      그렇게 걷고 또 걸었었다.

      그렇게 걸으며 만난 사람들과 우리들의 삶 그리고 그 모두를 이어주는 끈, 바로 사랑이었다.

      이 여행에서 만난 이들은 이제  거의 노인이 되었다.

      책 <나이듦에 대해서>를 펼쳐 들면 첫 쪽에서 만나는 말이다. <우리는 투쟁하도록 승리하도록 만들어졌어요. 슬픔과 멜랑콜리여 안녕. 우리에게 끝이란 없어요. 끝은 바로 이 순간이고, 매 순간 끝은 확장되니까요. 우리를 지배하는 강렬한 정신 활동은 멈추지 않을 것이니. 이는 우리가 그렇게 원하기 때문이예요.  – 피에르 고베티>

      이제 노인이다. 그래서 축복이다. 하여 감사다. 매 순간 끝을 확장시킬 수 있는 나이임으로.

      동해 바닷가에 떠오른 해처럼. 해를 향해 달려 날아가는 새떼들처럼.

      2024-25년 겨울에, 걸으며 만난 모든 이들과 눈과 맘에 담은 숱한 기억들을 잊지 않고져 이어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