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희망에

지난 수요일 트럼프가 선거에서 승리한 날이었습니다. 세탁물 배달을 하는 Devonte가 얼굴에 함박 웃음을 가득 담고 가게로 들어섰습니다. 나를 보자 그가 크게 외쳤던 말입니다. “새로운 미국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Make America Great Again!”

허나 삼십 대 젊은이의 싱글벙글 환한 웃음을 따라 웃지는 못했습니다. 아이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그저 고개를 끄덕여 주었습니다. 입속으로 맴맴 도는 ‘쯔쯔. 이눔아! 뭐가 그리 좋은게냐?’라는 물음도 던지지 않았습니다.

아프리칸 어메리칸인 Devonte는 프랑스계 이민 후손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트럼프가 지난 대통령 재임시절 경호원으로 일을 했었답니다. 그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젊은 아이는 덩치는 산처럼 크지만 매우 여리고 착하답니다.

그날 아침 눈을 뜨자 맞이했던 선거 결과에 대한 제 소감은 그저 안도였습니다. 한 쪽의 완승 결과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가 훗날 어떤 변화를 가져올 지는 알 수 없으나, 우선은 이 사회가 크게 흔들리지는 않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안도였습니다. 물론 트럼프의 당선은 제 투표의사와는 다른 결과였지만, 그의 완승으로 여러 주의 예비군들이 비상사태에 돌입하여 경계까지 하게 된 여러 우려들을 겪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선거 결과에 대한 숱한 분석들과 평론 그리고 앞으로의 예견들이 넘쳐나는 가운데 제 눈길을 끈 것은 뉴욕 타임즈에 실린 German Lopez기자의 ‘인플레 선거(The inflation election)’라는 글이었습니다.

지난 삼 사년 사이 물가는 그야말로 고공행진의 연속이었습니다. 계란 값이 삼년 전에 비해 세 배가 올랐다는 Lopez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일상생활에서 저희 같은 사람들이 피부로 절감하는 것이 인플레이션 현상입니다. 계란 뿐만이 아니라 식료품, 생필품, 공산품 할 것 없이 거의 두 세배는 모두 뛰어 버린 변화를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Lopez 기자는 재미있는 사실을 적시합니다. 2023년 바로 지난해부터 물가상승은 서서히 둔화추세를 보이고 있고, 임금도 상승했고, 일자리도 많이 늘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삼 사년 전과 비교해 오른 물가는 내려갈 줄 모른다는 사실 곧 유권자들의 머리 속에 각인된 물가상승이 유권자들을 분노케 하는 요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선거의 여러 주요 이슈들, 일테면 민주주의, 이민, 낙태, 외교, 군사 등등을 뛰어 넘는 첫번째 유권자들의 표심을 자극한 요인은 바로 먹고사는 문제였다는 것인데, 그 판단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 표심의 추세에는 저도 전적으로 동의를 하는 쪽입니다.

허나 그래서 트럼프다라는 결과에는 여전히 동의하지는 못한답니다. 트럼프의 재등장은 전통적인 미국 양당정치와  민주주의 사양현상으로 여기기까지 하는 편입니다만, 그렇다고 미국의 몰락까지로 비약하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답니다.

제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은 트럼프로 대변되는 또는 그를 따라 다니는 말들인 거짓, 변덕, 혐오, 증오, 갈등 등이 난무하는 세상입니다.

실제 지난번 트럼프 임기 중에 일어났던 숱한 사회적 혐오, 증오, 갈등 등을 떠올려보면 그 염려들이 전혀 부질없는 일은 아니랍니다.

미국이라는 큰 세상을 염려할 만큼 제 생각이 크지도 않거니와 그럴 능력도 없답니다. 다만 트럼프의 구호에 홀려 환하게 웃고 있는 Devonte나 그를 크게 믿지 못하는 저나 생각을 잘 모르는 제 아이들이나 모두 이 사회에서 말하는 혐오 증오 갈등의 요인과 그 풀이의 대상이 될만한 이민자들이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래왔듯 내일의 희망을 봅니다. 선거 결과를 마주하자마자 일기 시작한 바로 생명, 환경, 더불어 함께 살기 등에 대한 공생, 공감, 연대의 소식들도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아무렴 11월인데요!

비나리

제 가게 뒤편 주차장은 언제나 텅 비워져 있습니다. 이따금 건물 입주자들이나 배달 또는 수리 차량들이 이용하기는 하지만 대개는 늘 빈 공간입니다.

헌데 지난 주는 예외였습니다. 아침 안개가 멀리 사라지기 전인 이른 시간부터 주차장은 꽉 메워져 있었습니다. 가게 건물 뒤편에 있는 시 보건시설 건물에 사전투표소가 설치되었기 때문입니다. 보건시설 주차장이 이미 꽉 찬 탓에 차들이 이웃 주차공간들까지 점령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사는 곳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풍경이었답니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제가 사는 주의 투표결과는 너무나 뻔하거니와 당락에 끼치는 영향도 아주 미미하답니다. 선거인단 수가 고작 3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랍니다. 아무튼 이번 선거열기는 제법 뜨거운 듯합니다.

저는 한국에서 살 때 대통령 선거를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답니다. 제가 할 수 있었는데 안 한 것이 아니라, 하고 싶었는데 할 수가 없었답니다. 제가 한국에서 살았던 때엔 유신헌법과 이어진 전두환 시절이라 그랬답니다.

이민 이후 이 생각 저 생각 끝에 시민권을 얻어 제 생에 첫 대통령 선거를 한 것이 2000년 공화당 아버지 부시와 민주당 엘 고어가 붙었던 때였답니다. 세어보니 올해 선거가 벌써 일곱 번 째입니다.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를 해 본다는 들뜸과 그 때만 하여도 나름 젊었던 탓에 정치참여 단체에 이름을 올리고 제법 열렬히 선거운동도 했답니다. 아시안계 이민자들을 위한 정책과 한반도 통일 까지는 아니어도 평화에 대한 정책, 그리고 정부 지원을 받는 영세민 상태를 겨우 벗어나 의무는 다하되 아둥바둥 살아가는 중산의 최하층인 제가 속한 계급을 위한 정책 등에 가장 적합한 인물들을 위한 운동이라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물론 대통령선거 뿐이 아니었지요. 다 지나간 이야기입죠.

이젠 그저 혼자 중얼거리며 비나리만 한답니다.

‘더는 갈라치기 말고…. 더는 싸우지 말고…. 있는 편들은 조금 덜며 살고…. 없는 쪽은 조금 더 치열하게… 피선거권자들이 아닌 선거권자들이 조금만 더 현명해지기를…’

그냥 그저 그런 비나리입지요.

여기나 저기나 거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