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열에

어제 아침 일입니다. 빨갛게 떠오르는 해도 서늘한 날씨에 놀랐는지 구름 속에 숨어 빛을 발하고 있었답니다. 늘 그렇듯 토요일 아침은 저도 좀 게으르답니다. 가게 문을 열려고 하는데 바로 문 앞에 작은 새 한 마리가 누워 파르르 떨며 곧 넘어가려는 듯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습니다. 깃털도 몇 개 빠져 있었답니다.

‘도대체 왜 여기서…’하는 생각은 이내 숨은 답에 이르렀습니다. 여린 아침 햇살이 드리운 하늘을 담은 가게 유리창을 창공으로 착각한 녀석이 들이받아 일어난 일임에 틀림없었습니다.

녀석은 게으른 아침을 떨치고 일에 빠져야 할 나를 조금 허둥거리게 하였습니다. 우선 녀석을  햇살이 들지 않는 기둥 그늘로 옮겨 놓고는 가게 문 열 준비를 하였답니다. 신경이 온통 녀석에게 꽂혀 급히 가게 문을 열고는 작은 종지에 물을 담아 녀석 부리 앞에 놓아 두었습니다. 녀석은 곧 스러질 듯 여린 숨을 할딱일 뿐 내 부산한 몸짓엔 아는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거의 한 시간이 가까이 지날 무렵까지 녀석은 그렇게 맥을 못 추고 있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마땅한 방법도 떠오르지 않고 손님들은 들락거리기 시작하여 녀석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고 바쁜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답니다.

그렇게 반 시간 정도 지났을 때였습니다. 녀석이 물을 쪼는 것을 보게 되었답니다. 가까이 다가가니 녀석은 깡총걸음을 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해가 구름을 벗어날 즈음 녀석은 휑하니 날아갔답니다.

일도 잠시 잊고 녀석을 쳐다보던 제게 일기 시작한 것은 작은 희열이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깊어 가는 가을의 나른한 아름다움이 그 희열을 더하여 주었습니다. 떨어져 구르는 마른 나뭇잎들 마저 바람에 살아 춤을 추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살아있음. 그 희열에, 감사에.

24년 시월에.

노래 하나

해마다 이 맘 때면 나도 모르게 절로 흥얼거리곤 하는 노래가 하나 있습니다. 정태준이 시를 짓고 곡을 얹은 ‘가을이 오는 소리’ 또는 ‘추심(秋心’입니다.

<가을이 오는 소리 어디에서 오는 걸까/  귀 기울여 들어보니 내 맘에서 오는 소리/ 아, 아 잎은 떨어 지는데 / 귀뚜라미 우는 밤을 어이 새워 보낼까.

가을이 오는 소리 어디에서 오는 걸까/  귀 기울여 들어보니 내 맘에서 오는 소리/ 아 아 잎은 떨어 지는데 / 귀뚜라미 우는 밤을 어이 새워 보낼까.

지는 잎에 사연 적어 시냇물에 띄어볼까/ 행여나 내 님이 받아 보실까/ 아 아 기러기는 나는데 / 깊어가는 가을 밤을 어이 새워 보낼까>

족히 한 스무 해가 지나간 것 같습니다. 안산 시립 합창단이 필라델피아에 와서 공연을 한 적이 있었답니다. 그 날 밤, 모처럼 짧게 누렸던 내 문화생활의 여진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답니다. ‘내 맘의 강물’, ‘내 마음 그 깊은 곳에’ 등과 함께 ‘가을이 오는 소리’를 흥얼거리며 살고 있는 연유랍니다.

올해도 어느덧 깊어져 가는 가을 길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갑니다. 시인의 노래처럼 가을이 오는 소리, 가을이 가는 소리는 낙엽 떨어지는 소리, 귀뚜라미 우는 소리, 기러기 날개 짓 소리 보다 먼저 내 맘에서 들리는지도 모릅니다.

그게 어디 계절이 오고 가는 소리 뿐이겠습니까? 세월이 흐르는 소리, 시대가 바뀌는 소리, 내 삶의 여정 그 마디 마디 이어가는 소리들을 들을 수 있는 게 바로 제 맘일 터이지요.

그렇게 또 하나의 가을이 내 맘 속에서 깊어 갑니다.

이 아름다운 날들에

이젠 욕심으로 노동을 이어갈 나이는 지났나 봅니다. 몸이 영 맘을 쫓아가질 못합니다.

노동 뿐만이 아닙니다. 세상 뉴스를 쫓아가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통령 선거를 코 앞에 둔 여기 뉴스들도 쫓아가기 바쁘고, 한국 뉴스들에 이르면 그야말로 공부하지 않고 받기엔 정신이 사나울 지경입니다.

새 소식을 전하는 각종 소식통들은 매사 호들갑에 장사속을 지나치게 드러내어 피곤케 합니다.

아직 작가 한강의 소설 하나도 읽어 보지 못한 나는 차마 그의 세계에 가 닿기도 전에 그의 소식을 전하는 소식들로 하여 지치는 듯하답니다.

다만, 상을 수여하는 이들의 선언이 ‘아픔으로 지쳐 한이 쌓인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만나 보라’는 소리로 들려 귀가 솔깃 열렸답니다.

뉴스의 열풍이 잦아드는 날, 차분히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우려 볼 요량이랍니다.

낙엽 떨어지는 소리와 낙엽 밟는 소리에 온 몸이 반응하는 시리게 아름다운 가을날입니다.

이런 날에 모국어로 노벨 문학상 수여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소식은 그저 설렘입니다.

시공간을 넘어 누군가의 아픔을 부퉁켜 안고 기억하며 그 아픔의 짐을 함께 이고지고 가려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사는 맛이 아닐까 하답니다.

비록 몸은 맘보다 느린 때에 이르렀지만, 세상은 아름다운 것들이 도처에서 제 눈길을 기다립니다.

참 아름다운 날들입니다.

하늘

‘이 눔아! 정신차려! 먼 산은 왜 그리 바라봐?’ 어릴 적 어머니께 종종 듣곤 했던 꾸지람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볼수록 넋 놓고 먼 산 바라보다가 여기까지 온 듯하답니다.

먼 산 위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겨우 십 여년 전 일이랍니다. 말하기 낯부끄러운 환갑 즈음이었지요.

그즈음 하늘이 가르쳐 준 세상이었지요.

<세상에는 매일 보면서도 알아채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는 아름다움이, 그 모양은 물론 색깔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지!>

하늘! 도화지랍니다.

일과 쉼, 그 사이 사이를 엮여내는 기쁨과 슬픔 때론 절절한 아픔까지.

그 모두를 담아내는 도화지.

하늘이 담고 있는 아름다움, 그저 문득 문득이라도 눈에 담을 수 있는 오늘.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길은 언제나 옳았습니다.

‘이 눔아! 먼 산 말고 하늘!’

  • 10. 3.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