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

이런 날은 참 행복하다. 더할 나위 없이 맑은 초가을 마음이 마냥 여유로운 하루, 손에 든 책에 완전히 빠져 든 날에 누린 행복이다.

나이 쉰이고 제법 이름 꽤나 알려진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라는데 나는 그녀의 책이 처음이다. 케스린 슐츠(Kathryn Schulz)가 쓴 <상실과 발견, Lost & Found>이다. 책에 쉽게 빠져 들게 한 요인 중 하나일게다. 바로 번역자 한유주 덕이다.

300여쪽 제법 긴 자전적 에세이에 엉덩이 몇 번 들썩이지 않고 반나절 빠져 지냈다. 몸에 받으면 좋은 영양제가 될 듯한 가을 햇빛과 그 볕으로 나는 열을 식혀주곤 하는 마른 바람은 오늘 내가 누린 복을 더했다.

내 초기 이민 생활에 큰 힘이 되었던 월트 휘트만(Walt Whitman)의 시들을 다시 곱씹을 수 있게 한 것은 이 책이 덤으로 내게 준 행복이다.

에세이를 읽으며 post-it flag들을 이리 많이 붙여 보긴 처음인 듯하다. 그만큼 내가 빠져 시간을 보냈다는 징표일게다.

책 마무리 부분에 나오는 몇 문장이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드는구나.” C의 아버지, 빌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어딜 보나 평범한 사람치고 나는 경이로운 삶을 살아온 것 같아” C의 아버지는 실내 배관이 없는 집에서 자랐고…그는 평생을 농부로, 식료품점 점원으로, 관리인으로, 경비원으로 일했고….>

내 또래일 작가의 배우자 아버지에 대한 묘사인데 세탁업이 평생 직업인 내가 종종 이즈음 읊조리는 소리 같았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문장들이다.

<우리는 놀라운 삶을 살아간다. 삶 자체가 경이롭기 때문이다.>

<상실은 일종의 외부적 의식으로, 우리에게 유익한 날들을 잘 사용하라고 한다. 우리의 삶은 찰나에 불과하고, 인생을 잘 산다는 건 보이는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것이다.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경의를 표하고, 돌봄을 필요로 하는 대상을 돌보고, 아직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과 이미 사라진 것들을 포함한 이 모든 것에 우리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 우리는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켜보기 위해 여기 있다.>

가을의 초입, 나뭇잎들은 물들기 시작했고, 성미 급한 녀석들은 이미 떨어져 뒹굴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을 빛에 더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꽃들도 있고, 이제 막 피려고 봉오리 맺는 놈들도 있다.

이런 날은 참 행복하다.

연휴

“연휴에 뭐 하슈?” 친구가 물었던 일은 제법 오래 되었다. 거의 잊고 있다가 일주일 전쯤 “가까운 곳에 가서 하루 걷고 먹다 옵시다.”라는 그의 말에 “어이, 좋지”했었다.

그가 말한 가까운 곳은 딸네와 가까운 곳이었다. 하여 딸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아빠가 연휴 하루 하나엄마 아빠랑 너 사는 근처에 가는데… 얼굴 한 번 볼 수 있을까?’ 딸아이의 물음, “어디?, “맨하턴하고 브루클린”이라는 내 응답에 이어진 딸 아이의 대답이었다. “어떻하지…. 우린 그때 서부에 있을텐데…. 친구 결혼식에…. 아이….”

연휴가 다 끝나는 저녁 무렵, 딸아이가 연락을 해왔다. “우린 이제 막 집에 돌아왔어. 엄마 아빠 뉴욕구경 어땠어?”

친구는 뉴욕과 뉴저지와 델라웨어를 매주 생업을 위해 오간다. 모두 그가 오늘을 살아가는 동선이다. 뉴욕 나들이는 어쩌면 그에게 나들이라 할 수도 없을게다. 그가 오늘을 살아가는 현장이므로.

우리 내외에게 도시는 이미 어쩌다 구경하는 관광지가 되었다. 붐비는 사람들, 어지럽게 높은 건물들과 귀가 멍멍하여 머리속이 아득해지는 소음들 이젠 아주 낯설어 보이는 것들이 모두 구경거리가 된 관광지이다.

이른 아침 집을 나서 거의 하루가 넘어가는 시간에 돌아온 하루 여정, 많이 걷고, 많이 보고, 많이 먹었다, 무엇보다 친구내외와 우리 내외 모처럼 끊이지 않은 살아가는 이야기들, 그 수다 삼매경에 빠져 지낸 하루가 참 좋았다.

하루가 지난 밤, 딸아이가 건넨 물음은 우리 내외가 누린 연휴에 큰 감사를 덧입혔다. 딸아이는 이즈음도 묻고는 한다. “아빤, 언제 일 그만 둬?”, 언제나 똑 같은 내 대답, “글쎄…. 아직은….”

우리 내외가 함께 하루 온종일 이야기를 나누어도 아쉬운 친구내외가 있고, 뭐라해도 그저 품어낼 가족들이 있고, 우리 내외 아직 걸을만하고… 하여 몸과 맘으로 하는 모든 일들은 쉬지 말아야 하고….

2024년 노동절 연휴가 저무는 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