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날에

아버지의 날입니다. 아주 편하고 여유롭고 마음 넉넉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뜰일도 하고, 책도 좀 읽고 낮잠도 한숨 늘어지게 잤습니다. 사이사이에 아들 며느리의 안부 전화도 받고, 독일 출장 중인 딸과 사위의 메시지도 받았습니다.

지난 일기들을 뒤적이다가 육 년 전 오늘, 제 가게 손님들에게 보냈던 이메일 편지가 눈에 들어 왔습니다.



제겐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습니다. 두 해 전에 결혼한 아들은 가까운 필라에 살고, 딸 아이는 뉴욕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과는 일 년에 몇차례 얼굴을 봅니다.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던 때가 엊그제 같건만 어느새 그 때 일들이 가물가물 먼 옛 일이 되었습니다.

되돌아보면 아이들을 키우면서 제일 힘들었던 계절이 해마다 이 맘 때 였던 것 같습니다. 긴 여름방학이 시작되어 아이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게 되지만, 우리 부부는 그 시간을 세탁소에서 보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때론 아이들을 데리고 세탁소에 나와 함께 있곤 했었지만, 세탁소 특유의 여름 더위를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은 곤욕이었답니다.

제가 무지했던 탓도 있었고, 게을렀던 요인도 있었지만 제 형편에 맞게 아이들을 보낼 summer camp나 여름방학 프로그램을 찾아 아이들을 보내는 일도 참 쉽지 않았답니다.

특별히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다녔던 기억도 없거니와, 하다못해 영화관을 함께 찾았던 일도 거의 없었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이들에게 정말 미안하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게 엇나가지 않고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잘 자라준 아이들이 참 고맙습니다.

Father’s Day 아침에 제 두 아이들이 생각나서 몇 자 적어 보았답니다. 부끄러움으로 말입니다.

한가지 덧붙일 말이 있답니다. 제 부끄러움을 감싸는 감사함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 저와 아이들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감사함으로 하루 하루를 즐기며 살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아버지로서, 엄마로서, 아들로서, 딸로서 말이지요.

오늘, Father’s Day는 물론이거니와 한 주간 내내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하루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그 겨울, 일요일들 – − 로버트 헤이든

일요일에도 아버지는 일찍 일어나/ 그 검푸른 추위 속에 옷을 입고는/ 한 주 내내 모진 날씨에 일 하느라/ 갈라져 쑤시는 손으로 재속의 불을/ 다시 살려 놓았다./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았음에도.

잠에서 깨어난 나는 몸속까지 스몄던 추위가/ 타닥타닥 쪼개지며 녹는 소리를 듣곤 했다./ 방들이 따뜻해지고 나서야 아버지는 나를 부르셨다./ 나는 그 집 구석구석에 배인/ 분노를 경계하며 느릿느릿 옷을 입고는

추위를 몰아내고/ 내 외출용 구두까지 윤기나게 닦아 놓은 아버지한테/ 건성으로 말을 건네곤 했다/ 내가 그때 무엇을, 무엇을 알았을까/ 사랑이라는 엄숙하고 외로운 사명을.

Those Winter Sunday –   ROBERT HAYDEN

Sundays too my father got up early/ and put his clothes on in the blueblack cold,/ then with cracked hands that ached/ from labor in the weekday weather made/ banked fires blaze. No one ever thanked him.

I’d wake and hear the cold splintering, breaking./ When the rooms were warm, he’d call,/ and slowly I would rise and dress,/ fearing the chronic angers of that house,

Speaking indifferently to him,/ who had driven out the cold/ and polished my good shoes as well./ What did I know, what did I know/ of love’s austere and lonely offices?



그리고 오늘 읽은 책의 한 대목입니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알렉산더 버트야니(Alexander Ratthyany)가 쓴 <무관심의 시대>입니다.

<우리는 현재에(서) 우리의 과거를 만난다. 이 만남이 어떤 양상이 되는지는 현재 우리의 결정에 달려있다. —— 중략 ——- 현재는 미래가 지닌 가능성처럼 활짝 열려 있으며, 우리는 오늘 그 가능성을 얻기 위해 우리 자신의 양심과 싸우고 있다. ‘미래가 지닌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더 이상 변경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특정한 운명적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기여와 가능성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다. 가능성은 —— 중략 ——– (오늘, 여기에서)우리가 발산(행)하는 것 자체가 가능성이다.>

과거와 미래 모두 오늘의 나와 연관되어 있고, 오늘의 내 생각과 행동이 과거의 의미도 바꿀 수 있고, 미래의 가능성도 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나이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내 아이들에게 대해 켜켜이 쌓여 있는 미안함과 부끄러움 까지도 오늘의 내 생각과 행함에 따라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는 말일 테니 말입니다.  물론 세상과 연계된 모든 일도 그러하다는 말일 터이니 말입니다.

그래 또 오늘에 대한 감사입니다.

초여름 하루

하루는 늘 길거나 짧다. 또는 매우 더디거나 너무 빠르다. 모두 하루의 길이나 속도를 재는 내 잣대가 변덕스러운 탓이다.

하여 이젠 제법 노회해진 나는 하루를 시간의 흐름으로 느끼지 않으려 애쓰는 편이다.

그저 늘 쳇바퀴 속을 도는 일상에서 아주 작고 순간적인 느낌으로나마 단 한가지라도 마음 속에 이는 감사함 하나 붙든 하루면 족하다는 생각인데, 그조차 참 쉽지 않다.

그럼에도 오늘 같은 하루는 그저 감사가 넘치는 날이다.

아들 내외가 차려준 밥상으로 넉넉히 배 채우고, 맑은 눈빛만 마주쳐도 그저 좋은 손녀 안고 놀다 돌아오는 길, 아내와 둘이 마른 바람 그득한 초여름 공원 길 걸으며 보낸 하루 – 내 변덕이 끼어 들 틈이 없는 하루다.

걷다 땀 식히려 주문한 맥주 이름이 “Victory Summer Love”였다.

뒷뜰에 고추 모종 몇 개 심은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고추가 달렸다. 나리와 다알리아가 꽃망울 품은 여름이다. 여름 사랑 품는데 나이가 뭔 상관이랴!

*** 고작 120쪽에 불과한 책을 두 주 째 손에서 놓치 못하고 틈나면 곱씹고 있다. 게다가 저자는 에세이라고 했건만 쉽게 책장을 넘길 수가 없다. 곱씹어 읽을수록 이즈음 뉴스들을 보면 답답해지기 일쑤인 마음을 잘 다스려 준다. 독일의 저명한 심리학자라는 아르노 그륀의 <복종에 반대한다>이다. <누구에게도 지배받지 않는 온전한 삶을 위해>라는 부제가 달렸다.

저자는 모든 분야의 권력 앞에 복종해 온 인류 또는 개인의 어두운 역사를 이야기하며, 그 복종의 원인과 의미를 설명한다. 그는 근본적으로 낙관적이다. “역사상 가장 잔혹한 범죄들은 항상 (권력에 대한) 복종으로 저질러졌”지만, 역사는 분명 사람들이 “복종을 반대”하는 방향으로 전진해 나아 간단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용기와 관심, 열린 생각이야말로 복종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다.

거짓 앞에서(나 자신이 저지르는 거짓을 포함하여) 복종하지 않는 삶을 위해 기도해 주시는 멀리 홍목사님과 이어진 연대로 그 기도에 응답하려는 옛 벗들이 있어 나도 낙관주의에 빠져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