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움과 고마움

홍길복목사님 – 기억컨대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은 고작 두 해 남짓이 모두다. 그것도 내 스물도 저물던 시절이었으니 사십 수 년 전 일이다. 그 후 오랜 시간 그는 호주에서 나는 미국 시골에서 살며 딱 두 번을 만났었다. 십 수년 전 내가 사는 가까운 곳에서 그리고 지난 해 서울에서였는데, 두 번 다 그저 밥 한끼 나누는 아주 짧은 만남이었다.

홍길복목사님 – 그는 내 신앙의 인도자요, 인생의 선생인 동시에 늙막에 신 앞에 다가서는 날들을 준비하는 정신적 길 벗이다.

홍길복목사님 – 내 어리고 젊었던 시절, 성서와 예수에 대한 숙제를 던져 주셨던 그는, 지난 세월 비록 서로 만나지는 못할지 언정 끊임없이 나를 깨우게 해 주셨다. 그의 설교문을 보내주거나 생각의 단편들을 전해오거나 지난 십여 년 동안은 그가 이끌어 온 <시드니 인문학교실> 강의안을 보내주어 나를 깨웠다. 그 강의안으로 내가 사는 곳에서 함께 하는 친구들의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있게 하셨다.

홍길복목사님 – 그가 엊그제 설교문을 보내어 또 나를 깨웠다. <삶의 후회조차 감사할 때>라며.

그가 설교문을 보내주시면서 덧붙인 말씀이다. < 첨부한 설교문은 오는 주일 시드니우리교회 목사님이 출타를 하면서 설교를 부탁하시길래 준비한 것인데, 돌이켜보니 마침 이즈음이 제가 목사안수 받은지 50년이 되어서 그에 따른 소회를 써 본 것입니다. 인생이란, 목회란, 관계란 모두가 다 아쉬움과 고마움으로 남는 것이군요.>

그저 홍목사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단 한 사람에게 만이라도 하나님 앞에선 그의 고뇌와 감사를 나눌 수 있다면 하는 생각으로. 그의 허락도 없이 여기에….


<홍길복의 목사안수 50년 감사예배 설교>

  • 2024년 5월 19일 , 시드니 우리교회

오늘의 말씀 : 시편 116편 12절 -14절

오늘의 제목 : 지난 날을 되돌아 보니 – 아쉬움과 고마움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총과 평강이 여러분 한분 한분에게 넘쳐나시길 기원합니다.

앞에서 예배순서에 따라 맡으신 분이 읽어주신 성경말씀 이지만 표준새번역으로 다시 한번 더 읽겠습니다. <주께서 나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주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주님께 맹새한 것은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다 이행하겠습니다.> 이 시편 116편은 누가 지은 것인지 그 작자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시의 주제는 아주 분명합니다. 개인적으로든, 아니면 민족적으로든 <죽다가 살아난 사람의 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 후에 고백한 시>로써, 죽음으로 부터 다시 생명을 얻은 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시편 116편을 주석적으로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오스트랄리아에서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시가 이 땅 호주에서 어떻게 처음 읽혀졌던지를 말씀드린 후 저 개인적 간증의 말씀을 나누고자합니다.

먼저 역사 이야기입니다.

1783년 미국은 영국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하여 영국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독립국가가 되었습니다. 거대한 식민지 북미 대륙을 잃어버린 영국은 마침 몇해전인 1770년에 James Cook이 발견하여 영국의 식민지라고 선포해 두었던 남태평양의 거대한 섬 나라 호주를 미국을 대신 할 만한 새로운 식민지로 여겼습니다. 산업혁명 후 넘처나는 사회문제로 범죄는 증가하였고 죄수들을 수용할 시설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마침내 영국정부는 새로운 땅, 미지의 남쪽 나라인 호주를 그들 나라에 있던 Wales주를 대신할수 있는 곳이라 생각하여 <남쪽에 있는 새로운 Wales주>라는 뜻으로 New South Wales주라 이름 붙여서 이곳으로 죄수들을 실어 보내기로 했습니다.

영국은 1787년 5월 13일 런던 남쪽에 있는 항구도시, Portsmouth에서 군함 2척, 화물선 3척, 그리고 수인선 6척, 총 11척의 선단을 꾸려 군인들, 죄수들, 자유 이주자들을 섞어 호주로 보냈습니다. 이를 가르쳐 역사는 <The First Fleet, 제 1차 선단>이라고 부릅니다. 자료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 1차 선단에는 죄수들 789명을 포함하여 군인들과 자유 이주자들을 합해서 모두 1420명이 승선하였는데 그만 그 긴 항해 중, 배에서 사망한 사람이 48명이나 생겨서 시드니에 도착한 인원은 모두 1372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가 바뀌어, 이듬해, 1788년 1월 26일이 되었습니다. The First Fleet는 2만 5천 km, 250일에 걸친 긴 항해 끝에 마침내 Sydney Cove, 시드니 내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들은 이날, 1월 26일을 Australia Day, 호주 건국기념일로 지키고 있는데, 과연 이날이  호주의 <건국 기념일, Australia Day>가 맞는냐? 하는 데는 적지 않은 반론도 있습니다. 본래 호주는 주인 없는 빈 땅이 아니라, 원주민들이 50여만명이나 터를 잡고 수 만년을 살아왔던 주인이 분명한 땅이니, 이날 1월 26일은 Australia Day가 아니라 <오스트랄리아 침략의 날, Australia Invasion Day>가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여기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더 나누지 못하겠습니다. 그것은 오늘의 주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싶이 The First Fleet를 이끌고 온 선장 겸, 초대 New South Wales 주총독은 Arthur Phillip이었고, 그 때 그들과 함께 온 군목은 영국 성공회 신부, Anglican Chaplin, Richard Johnson 목사였습니다. 그들이 시드니 항구에 닺을 내린 1월 26일은 토요일이었고 그 다음 날인 1월 27일은 주일이었지만 그들은 예배를 드릴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배를 접안하고, 짐을 내리는 등 그들이 이 미지의 땅 시드니에 상륙 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걸렸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들 The First Fleet를 타고 온 사람들이 이 땅 오스트랄리아에서 맞이한 첫번째 주일은 한 주일 후인 2월 3일이었습니다. 1788년 2월 3일 주일 아침, Richard Johnson 목사님은 Circular Quay에서 한 불록 떨어진 지금의 Bridge Street 앞 Macquarie Park 에서 10시가 되자 예배 시간을 알리는 북을 울렸습니다. 사람들은 모여들었습니다. 항해사들과 군인들, 남녀 수인들과 아이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Aborigine들의 땅, 기독교와 그 예배의식이라고는 단 한번도 본적이 없고, 접해 본 일도 없는 신비의 땅에서 처음으로 기독교식 예배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참 안탑갑게도 1788년 2월 3일 아침 10시 – 호주 땅에서 하나님께 드린 첫 예배때 불렀던 찬송이나 드린 기도문이나 전하신 설교 말씀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자료는 바로 그날 봉독했던 성경말씀입니다. – 시편 116편 12절로 14절 –

<주께서 나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주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주님께 맹세한 것은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다 이행하겠습니다.> 이는 오스트랄리아 땅에서 처음으로 읽혀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50일에 걸쳐 25000Km나 되는 죽음의 항해길에서 버리지 아니하시고 살려주시어 육지에 발을 딪게 해주시고 새로운 꿈과 가능성과 희망을 주신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드리는 이 진솔한 고백과 노래가, 저는 이 땅, 이 호주의 모든 오고 오는 세대와 다민족들의 주제가가 된다고 믿습니다. <주께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구원의 잔을 높이 들고 주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주님께 맹세한 것은 이제 이후 이땅에서 다 지켜 이행하겠습니다.>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면서 이제 부터는 부족한 저의 고백과 간증을 나누고저 합니다. 지난 5월 8일은 제가 목사로 안수를 받고 이 직분을 받은지 꼭 50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1968년 일반대학을 거쳐, 1972년 장로회신학대학을 졸업한 저는, 1973년 서울 신촌에 있는 대현교회에 전도사로 부름을 받았는데 감사하게도 그 교회가 저를 서울 서노회에 부목사로 청원해 주셔서 1974년 5월 8일, 수색교회에서 열린 제 10회 서울 서노회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후 저는 대현교회에서 만 6년을 부목사로 일하다가 1980년 6월 호주 Uniting Church 세계선교부 총무 변조은목사님의 초청을 받아 이곳으로 왔습니다.

처음 저희는 Uniting Church, West Australia Synod에서 사택과 자동차 등을 마련해 주셔서 서부 호주 퍼스에서 한 6개월을 머물면서 간단한 영어도 익히고 자동차 운전면허도 따는 등 호주 정착을 준비하면서 퍼스에 처음으로 한인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 때 퍼스에서 함께 <서부호주 한인교회>를 일구어 온 사람 중에는 지난 44년을 함께 해온 남정율집사님이 지금까지도 저희 곁에 계십니다. 6개월 이라는 짧은 기간을 퍼스에서 지낸 후 저희는 1980년 12월 시드니에서 막 시작된 <시드니 제일교회>의 초청을 받아 목회와 삶의 자리를 이곳 시드니로 옮겨 1998년 말까지 18년을 그 교회에서 사역한 후, 1999년 1월 부터는 <시드니 우리교회>로 옮겨 14년을 목회하다가 2012년 말 모든 일선목회에서 은퇴하였습니다.

이제 부터는 염치도 없이 뻔뻔하게 부끄러운 이야기는 쏙 빼버리고 제 자랑을 좀 늘어놓겠습니다. 호주에서의 세 교회에서 목회사역을 하는 동안 저는 호주 Uniting Church와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총회나 노회를 비롯하여 한인교회교역자회 등 여러 섬김의 자리에서 일하기도했고, SCD 한국어 학부와 모스크바 장신대, 인도네시아 신학교 등 국내외 몇몇 신학교육기관에서 가르키기도 했습니다. 저의 목회 기록에 의하면 저는 지난 이민목회 33년 동안 919명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170번의 결혼식, 67번의 장례식, 1500번 이상의 주일 예배 인도와 설교, 약 9000번의 심방, 1600회 이상의 상담, 그리고 1200회 이상의 각종회의를 주제하기도 했고 또 참석했습니다. 수많은 기도회와 성경공부 인도,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선교 음악제를 비롯한 많은 행사와 이벤트들, 일일히 세기도 힘든 부흥회, 초청설교, 신학 특강, 세미나, 선교지 방문, 초기 2년 동안 진행한 SBS 방송, 300개가 넘는 각종 칼럼과 기고문들, 그리고 7권의 책을 출판을 했습니다. 무엇 보다도 저는 이민목회 33년을 통하여 줄기차게 예수를 재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민자로 풀어 왔습니다. <이민자 예수>라는 책도 쓰고, 설교도 하고, 강의도 하고, 세미나도 하면서 그야말로 기를 써왔습니다. 장신대 최윤배교수는 그의 저서 <조직신학입문>에서 홍길복을 남태평양을 중심한 디아스포라 신학과 실천의 한 모델로 길게 서술하기도하고 이를 장신대에서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자, 그런데, 이렇게 자화자찬하며 잘 차려 놓은 진열장 처럼 길게 늘어놓은 허풍과 허세가 진정 하나님 앞에서 인간 홍길복, 목사 홍길복의 정직한 모습일까요?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젠 목사가 된지 반세기, 50년이나 되지 않습니까? 주님 앞에 설 날도 점점 가까와 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젠 좀 솔직해질 만한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많이 부끄럽기는해도, 그래도 이젠 좀더 자신에 대해서는 정직해지고, 하나님 앞에서는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하며 무릎 꿇고 항복하는 인간이 되어야 겠다고 생각합니다. 이 나이가 되어 지난 날을 돌아보며, 홍길복이 살아온 인생과 목회자의 길을 회상해 보니, 하나는 <후회>요 다른 하나는 <감사>입니다. <아쉬움>과 <고마움>이 교차 됩니다.

먼저 부끄러운 이야기부터 드립니다.

50년전, 1974년 5월 8일, 목사 안수를 받던 자리에서 저는 참 많이, 정말, 아주 많이 울었습니다. 뜨거운 감격과 함께 제 가슴 속에는 처절한 다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주께서 가신 길, 십자가의 길, 사랑과 섬김과 희생의 길, 저도 잘 따라 가겠습니다> 눈물로 약속하고, 가슴으로 다짐하고, 기도로 맹세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저는 그 때의 약속과 다짐과 기도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실패한 인간이요, 실패한 목회자입니다>

성공이란 무엇입니까? 누가 세워준 것이든, 아니면 자기가 스스로 세운 것이든, 출발 할 때, 처음 시작할 때 세웠던 목표와 꿈과 이상을 이루었으면, 그것은 성공한 것이고, 끝내 그걸 이루어 내지 못했다면 그건 실패한 것입니다. <돈 많이 벌겠다>고 목표를 세웠는데 돈을 많이 벌었으면 성공한 것이고, 돈을 많이 못 벌었으면 그건 실패한 것입니다. <권력을 잡아서 출세하겠다>라고 목표를 세웠는데 그렇게 했으면 그것은 성공한 것이고 끝내 그걸 이루지 못했다면 그건 실패한 것입니다.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하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내 인생의 꿈>이라고 목표를 세웠었는데 그걸 이루었으면 그건 성공한 인생이고 이루지 못했으면 그건 실패한 인생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사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겠다. The Man for Others! 꼭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가리라!> 목사로 안수 받을 때, 저는 그렇게 인생과 목회의 목표를 세웠던 사람이었는데 끝내 그걸 이루어 내지 못했습니다. 저는 50년 전, <예수님께서 가신 길, 사랑과 섬김과 희생의 길을 따라 가리라> 결심하고 목사가 되었는데 끝까지 그 길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저는 처음 출발할 때 세웠던 목표를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어영구영 헛된 것들만 바라보면서 50년의 세월을 흘러 보내고 말았습니다. 세속적이며 직업적 종교인으로써 기능적인 능력은 어느 정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부르신 소명에는 끝까지 충성하지 못했고, 다짐했던 목표에는 이르지 못한 실패한 목사입니다.

목회란 일생을 통하여 쉬임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목회란 사실 사랑 이상도 아니고 사랑 이하도 아닙니다. 목화란 사랑의 연습이고, 사랑의 실천이며, 사랑의 확대 재생산입니다. 목사라는 사람은 평생을 통하여 예수의 사랑을 증거하고, 자신의 삶으로 그 예수의 사랑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목사는 사랑을 주어야 할 의무만 있지, 사랑을 받을 권리는 처음부터 없는 사람입니다. 타인의 아픔과 고통, 다른 사람의 비극과 슬픔을 덜어주는 일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여기지 않는 사람은 목회자가 될수도 없고 또 되어서도 않됩니다. 억울하게 죽으리라 각오한 사람만이 가는 길이 목회자의 길입니다. 목회자의 모델인 예수님이 그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고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자본주의 시장경제 구조 속에서 교인들의 숫자를 늘리고 교회를 성장시켜 성공한 목사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공동묘지에 숫자가 늘어났다고 해서 그걸 성장이라고 말해서는 않되는데, 저는 교회 크게 하고, 세례 많이 주고, 행사 많이 하고, 설교 잘 하고, 책쓰고, 방송하고, 부흥회 인도하고, 교회를 양적으로 크게 만들면 그게 성공이요, 성장이요, 잘난 것인 줄로 알았습니다. 후배 목사들이 <목사님, 목사님은 목회에 성공하셨습니다. 존경합니다> 그리 말하는 것을 잘못 알아들었던 사람입니다.

저는 늘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오신 예수님을 따라간다>고 말은 하면서도, 권위주의적 생각에 사로잡혀 대접을 받는데만 익숙했고 남에게 시키는데만 능숙한 사람이었습니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는 말씀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는 커녕, 일년에 몇번 장로님들과 주일하교 어린이들 몇몇을 강대상 앞으로 불러내어 발을 씻어주며 <세족식>을 하는 것이 마치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는 것인 양 착각했습니다. 저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돌보아주며 발을 씻어주라는 실천적 교훈을 종교적 의식, 종교적 Liturgy로 바꾸어 놓고 세족식을 하는 것이 진짜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인 양 저 자신을 속여 온 위선자입니다. 지난날 저의 목회는 고객관리라는 차원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고 의무로 한 일은 결코 목회라고 이름 할 수 없습니다.

이 지구상에 단 한 사람의 가난하고, 병들고, 아파하는 사람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사실은 그것 까지도 목사의 책임입니다. 목사는 사랑에 대하여 무한 책임을 진 사람을 부르는 다른 이름입니다. <예수 믿으라>는 <말>이 아니라 사랑의 구체적 <실천>을 통하여 사람들이 감동을 받아 예수님께 나아와 주님을 영접토록 이끄는 것이 바른 목회인데 <세속적 방법으로 거룩한 일을 하려고 한 사람>이 바로 저였습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서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사랑이 너무나 놀랍고 감격스러워서 나 또한 주님 가신 길 따르리라 눈물로 다짐하고 50년 전에 목사가 되어 사랑과 섬김의 길을 걷기로 다짐하고 목사로 안수를 받았는데, 아 ! 글쎄 말입니다. 지금 와서 지나 온 길을 되돌아 보니 저는 그져 그 예수님을 이용하여 월급 받아 잘먹고 잘살면서, 칭찬받고, 이름 내면서 <목사님, 목사님> 소리 들으면서 살아온 그렇고 그런 인간이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을 마치기 전에 저에게는 꼭 드려야만 할 마지막 한 말씀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감사의 말씀입니다.

가깝게는 하늘나라에 가 계신 저의 양가의 부모님들부터 제 아내와 아이들과 동생들과 일가와 친척들에게 빚진 것은 말로 다 할수가 없습니다. 수 많은 동역자들과 친구들과 선후배 신학도들, 더불어 이 인생길과 신앙의 길을 함께 동행해 주신 여러분 한분 한분에게 무엇이라고, 또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한국과 호주에서 지난 80여년을 함께 동고동락 해주신 분들, 50년 전 목사로 안수 받도록 이끌어 주셨던 대현교회의 옛 어른들과 오래된 친구들로 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허물 많고 부족한 것 투성이인 저를 감싸 주시고 손잡아주신 서부호주 한인교회, 시드니 제일교회, 그리고 시드니 우리교회의 여러 교우들과 은목회 식구들과 인문학 친구들을 포함한 많은 호주 디아스포라 이민자들과 동역자들에게 저는 죽어도 결코 다 갚을수 없는 은혜와 사랑의 빚을 진 사람입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온 몸이 다 입이 되어도 말 가지고서는 다 감사드릴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감사와 함께, 아니 이 모든 것을 넘어서서 가장 크고 뜨겁고 드리는 감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입니다.

이제는 사실 성공이나 성취만이 아니라 실패와 부끄러움 까지도 감사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깨닫습니다. 인생이란 <목회이든, 학문이든, 사업이든, 정치이든, 봉사이든, 그 무엇이든간에 사람의 계획과 의지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인생이란 살고 싶다고 해서 살수있는 것도 아니고, 죽고 싶다고 해서 죽을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체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에 달려있습니다. 뒤늦긴 하지만 이제라도 이것을 깨달아 알게 해 주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인생 최대의 깨우침은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넘어서서 주어진 삶의 일체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 살다가, 감사하면서 죽는 것>입니다.

죽음의 때, 마침의 순간이 점점 가까워 오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감사가 인생 최대의 의무요, 동시에 승리인줄을 모른다면 그는 참 슬픈 사람입니다. 오늘 저는 이를 깨우쳐 주신 주님께 감사하면서 말씀을 마칠려고 합니다. 마치 25000Km, 250일, 길고 긴 항해 끝에 시드니에 도착하여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구원의 잔을   높이 들어 감사의 노래를 불렀던 Richard Johnson목사님 처럼, 저도 지난 50년 목회 길과, 80년  인생길을 한결같이 옆에 계셔 주시고, 인내로 참아주시고 붙잡아 주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인생의 실패와 갈등 까지도 진솔하게 고백하게 해 주신 주님, 지난 날 목회의 아쉬움을 넘어, 그 때는 그렇게 잘못했지만 이제라도, 죽기 전에, 그걸 깨달아 알게 해 주시어 그것 까지도 감사로 승화 할수 있게 해 주시는 주님께 온 몸과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고 감사드리며 영광을 돌립니다. 그래서 236년 전 Johnson 목사님이 이 땅 호주 시드니에서 처음으로 읽으셨던 그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 여기에서, 저는 저 자신의 영혼의 고백으로 주님께 올립니다

<주께서 저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를 제가 무엇으로 다 갚을수가 있겠습니까? 오직 구원의 잔을 높이 들고 주님의 이름을 부를 뿐입니다. 그리고 남은 인생길에서나마 지난날 주님께 다짐했던 서원을 갚아드리도록 힘을 다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