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아침은 늘 새롭다. 아니 ‘늘 새로워야만 한다.’는 내 아집을 이 나이에도 버리지 못하는 내 고백이다. 아침 공기, 아침 바람소리, 아침 새소리 그리고 아침 하늘에 눈, 코, 귀를 맘껏 열어 제치는 내 습관에 대한 고백이다. 하여 아침은 늘 새로워야만 아침답다. 허나 내  주제에 어찌 그 욕심을 채우랴. 허다한 날 아침이 버겁고 이젠 그런 날들이 점점 늘어간다.

그래도 아직은 아침이 참 좋다. 오늘 아침만 해도 그렇다.

내 가게가 있는 샤핑몰은 거의 삼 년 째 공사중이다. 몰 안에 많은 가게들 중 내가 두 번 째로 이른 아침에 문을 연다. 거의 24시간 영업을 하는 그로서리 체인점을 빼고는 내가 언제나 제일 먼저 가게 문을 연다.

그런데 이즈음 종종 나보다 먼저 공사판 일을 벌이는 일꾼들 모습을 보곤한다. 그런 모습을 보노라면 아침 새소리보다 더 울림이 더 크게 다가오곤 한다.

일에 대한 감사함 때문이다.

세탁소 일을 한지 거의 서른 다섯 해가 가까워 온다. 그 사이 별 일 다 겪었다. ‘겨우 이런 일 하려고 이민 왔나?’, ‘빨리 내가 하고픈 일을 해야 할텐데…’ 등등. ‘혹’하는 생각에 빠져 이런저런 진창속을 많이 헤매기도 했었다.

그렇게 어찌어찌 여기까지 왔다. 지금은 그저 우리 내외 하루 일할 수 있는 터전이 있다는 것으로 그저 감사다.

오늘 아침, 가게 문을 열고 얼마 안되었을 때 아주머니(할머니- 솔직히 나는 이제 구분이 잘 안된다. 내가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는 할아버지이므로) 한 분이 예쁜 꽃바구니 하나를 건네 주셨다. <내 남편이 쓰러져 넘어졌을 때 도와주신 당신들에게 큰 감사를 드립니다.> 라는 쪽지와 함께.

엊그제 일이었다. 아내가 다급한 목소리를 나를 불렀다. 가게 앞에 누군가 쓰러져 있다고. 나가보니 거대한 체구의 노인이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괜찮냐?”는 내 물음에 대답한 것으로 보아 노인의 정신은 말짱했다. 꼼짝을 못하고 있는 노인은 다리통이 내 몸통보다 큰 듯한 거구였다.  우선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멈추게 하려고 아내와 나는 거즈로 피를 닦고 붕대를 대며 물었었다. “911 전화를 해 드릴까요? 앰블런스 부를까요?” 노인은 연신 괜찮다며 자신의 차에 올라 앉게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자신이 운전해 병원을 가겠노라며.

순간 참 나는 난감했다. 내 힘으로는 그의 팔을 들어 올리는 것도 버거웠으므로. 그는 거의 250파운드는 족히 넘지 않았을까?

하여 이웃가게 젊은이들과 내 가게 손님들에게 도와 줄 것을 요청했고, 노인을 겨우 겨우 그의 차에 태울 수 있었다. 노인이라고 했다만 나와 몇 살 차이나 났을까, 거의 내 또래쯤.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진이 빠진 나는 엉뚱한 감사의 맘이 일었었다. ‘아이고, 이렇게 작고 마르고 가벼운 내 몸에 대해 그저 감사. 어느 순간 내가 저 이와 같은 일을 당했을 때… 누군가의 도움을 받더라도 그 누군가의 진을 빼진 않을 터이니…’

바로 그 노인의 부인이 오늘 아침 꽃바구니를 들고 감사를 전해 온 것이었다.

하여,  고백컨대…내가 아직 일을 할 수 있어 감사다.

무엇보다 아직은 아침의 새로움 느낄 수 있어 감사다.

아침에.

<행복에>

아무 수식 없이 제 이름을 그대로 불러 줄 사람이 더는 없을 줄 알았습니다. ‘영근아’. ‘영근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제가 사는 동네에선 이젠 없습니다.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누워 지내시는 아버님이 유일한데, 아버지도 이젠 제 이름을 잘 부르지 않습니다.

이젠 제 이름 앞뒤로 이런 저런 수식들이 늘 따라 다닙니다. 하다못해 ‘미스터’나 ‘씨’가 따라 다닙니다. 여기 친구들이 ‘Young’이라고 저를 부르곤 합니다만, 솔직히 ‘영근아’라고 부르는 것과는 사뭇 느낌이 다르답니다.

제 맨 이름 ‘영근아’나 ‘영근이’를 듣기 위해선 이젠 한국에 나가 어릴 적 친구들을 찾아 나서야만 되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나! 이런 행복이 어디 있을까요?

반 년 전에 정말 오랜만에 만난 어릴 적 내 고향 신촌 친구들, 더더욱 대현교회라고 하는 신앙의 울타리 안에서 함께 자란 옛 친구들과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들을 나누며 서로의 맨 이름들을 부르고 듣는답니다. 저는 친구들을 경자야, 경애야, 병덕아 라고 부르고 친구들은 저를 영근아 라고 부른답니다.

앞뜰 체리나무 꽃이 만개한 날, 여름에 꽃피는 구근들을 심었습니다. 그렇게 흙과 함께 놀다 문득 바라보니, 어느새 꽃잎 떨구며 지는 튤립들이 눈에 밟혔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한철 아름다움을 뽐냈던 아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녀석들이 제 각각 제 아름다움들이 다르더군요. 색깔과 모양들이. 튜립조차 다 같은 튜립들이 아니었답니다. 저마다 다 이름 하나씩 지어 주고 싶었답니다.

이제 저물어 가는 때에 진심으로 서로 이해하고 서로를 인정하며 옛날 어릴 때처럼 제 맨 이름, ‘영근아’, ‘영근이’를 불러주는 친구들이 있어 참 좋습니다.

오늘, 내가 누리는 행복에.

어느 덕담에

평생 동남아 선교 사역을 이어 오신 아니 지금도 이어 가고 계신 허춘중 목사님께서 제 가족 사진을 보시곤 덕담 한마디를 얹혀 주셨다. ‘두 분 옛날 70년대 모습이 있군요.’라고.

내가 그리 살지 못한 탓 때문일 터이지만, 젊었을 때 잠시라도 함께 했던 이들이 오롯이 한길, 외길을 변치 않고 걸어가며 늙어가는 모습을 보거나 듣노라면 그저 존경의 맘이 앞서곤 한다.

그이가 말한 ‘70년대’라는 말에 꽂혀 오늘 뜰 일을 하는 내내 내 스물 무렵이었던 70년대를 생각하며 잡초를 뽑고 꽃을 심었다. 신촌과 종로 5가, 서소문 거리과 골목을 헤매면서.

1970년대와 오늘 2020년대, 참 많이 변했다.

그 무엇보다 내 자신이 엄청 많이 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옛날 그나마 푸르고 맑았던 우리 내외의 70년대 모습을 기억해 주시는 허목사님께 감사를.

70년대나 칠십 대 나이 오늘이나 <세상엔 사랑이 가득한 것 같지만 우린 여전히 외롭고 허전합니다.>, <사랑, 친절, 섬김의 본질과 순수성을 잃어버>린 현실 속에서 늘 깨어 살아가야 한다고 깨우쳐 주시는 호주의 홍길복 목사님.

세상 모든 것 다 변해도 <바닥이 하늘인 세상>에 대한 믿음은 변치 않을 것이라고 오늘도 외치고 사는 내 참 벗, 대전 대화동의 김규복목사님.

필라델피아에서 80년 광주를 알리기 시작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월호 가족, 이태원 가족들과 이 땅의 이민자들을 생각하며 사람사랑, 이웃사랑을 외치며 사는 김경지선생을 비롯한 오늘 이 땅의 내 친구들.

어느덧 우리 세대도 저무는 때를 맞는다만….

비록 오락가락 비틀거리며 살아온 나이지만, 변치 않고 오직 신에 대한 믿음, 사람살이 올곧은 방향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온 이들과 생각을 나누고 살아온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 뿐.

두어 주 전 작은 텃밭에 마구 뿌려 둔 상추 싹이 트기 시작했다. 꽃보다 아름답다던가? 새 싹을 바라 보노라면 늘 설렌다.

70년 대처럼. 암만, 화단엔 가을 국화도 새 싹이 올라오거늘, 내일에 대한 설렘만은…

족보(族譜)에

손님 하나가 가게 한 쪽 벽면에 걸린 사진들을 보다가 내게 던진 물음이었다. “가족인가 봐요? 이 사람은 누군가요?” 유독 얼굴 까만 내 며늘아이를  가르키며 던진 말이었다. 그 물음을 던진 이도 얼굴이 까맸다.

“제 며늘아이지요. 그 옆에 제 아들, 그리고 이 쪽 옆으로는 제 딸과 사위랍니다. 제 가족들입죠.”

이어진 손님의 물음, “며느님 고향은 어딘가요?” 잠시 주춤거린 내게 그녀는 다시 물었다. “며느님이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요?” 순간 나는 찔금하며 한 동안 말문이 막혔었다. 간신히 대답한 내 응답, “글쎄요? 며느리는 조상들이  이 땅에 온 지 몇 세대가 지난 아이라…” 그녀가 가게 문을 나서며 내게 던진 말, “한번 물어 보세요. 며느리께. 고향이 어딘지?”

나는 공연히 얼굴이 화끈거렸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 아들 내외에게 물었다. 며늘아이의 고향을.

내 우둔한 물음에 대한  아이들의 대답이자 가르침이었다.

<아빠! 이미 몇 세대가 지난지도 몰라. 다만 조상의 누군가가 노예로 이 땅에 와서 뿌리를 내렸어. 아마 그 무렵 아프리카엔 나라라는 경계가 없었을지도 몰라. 어느 나라에서 왔냐는 질문은 틀린거야! >

순간 나는 많이 아팠다. 진보 흄내 내며 사는 내가 얼마나 가짜였는지…..하는 부끄러움으로.

파묘(破墓)에

간만에 속 ‘시원한 혁명적’ 한국 뉴스를 만나는가 했다. 결과는 분명 압도적이었건만 ‘시원한 혁명적’ 지점엔 도달하지 못했다.

‘시원답답’한 마음으로 필라에 올라가 영화 <파묘>를 보고 왔다. 아직 우리에겐 ‘뽑아 버려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그 중에 가장 앞에 서는 것 바로  ‘말’ 아닐까? 누군가의 ‘말’로 널뛰는 세상이 바로 정치요, 말이 세상을 세우는 명분이기도 하고, 때론 세상을 망치는 요설이 되기도 하므로. 그 위에 장난질 치는 으뜸 꼭두각시는 이른바 언론.

<언어가 없는 인간들에게 공동체도, 사회도, 계약도, 평화도 없다는 점은 동물세계와 다를 바가 없고 인간이 언어를 가진다는 것은 축복이자 저주이다. 합리적 사고와 과학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축복이고 일시적인 욕망과 기호에 따라서나, 산만하게 언어를 사용하여 재앙을 초래하기 때문에 저주이다.> –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가 리바이어던(Leviathan)에 남긴 말이다

하여 이제 다시 시작이다. <일시적인 욕망과 기호에 따라서나, 산만하게 언어를 사용하여 재앙을 초래하는> 저주들을 찾아 파묘하는 일에 나서는 일. 바로 요설들에 혹하지 않는 사람들의 연대를 넓혀 가는 일.

사람들이 그 일에 매진하는 세상을 꿈꾸며.

영화 <파묘> 잘 보고 돌아온 날 밤에.

미술(美術)에

미술-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세계다. 물론 아는 바도 관심도 전혀 없다. 어쩌다 미술 작품들과 마주할 때면 그저 내 느낌으로 받아드릴 뿐, 알고자 노력해 본 기억도 없다.

내 마지막 미술 교육 수업은 고등학교 일학년 때였다. 상업고등학교라 교과목도 미술이 아닌 상업미술이었다. 내겐 참으로 재미없는 수업이었다. 게다가 학기 초 수업시간에 옆에 아이와 장난을 치다가 걸려 선생에게 오지게 맞았었다.

미술 선생의 수업은 독특했다. 그림에 대한 주제를 설명한 뒤 그림을 그리게 했다. 해당 시간에 다 그리지 못하면 그걸 완성해 오는 게 숙제였다. 그리고 그 다음시간 선생의 평가가 바로 내려졌다. 평가방식이 참 독특했다. 1번부터 10번까지 우루루 교단 앞으로 나가서 열명의 학생이 자기가 그린 그림을 가슴높이로 들고 서 있다가, 1번부터 한 명씩 순서대로 한 발 앞으로 나아가 자기의 그림을 얼굴 높이로 들면, 교실 끝에 서서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림을 쳐다보던 선생이 평가를 내린다. 우수, 가작, 입선, 낙선, 선외 등으로 차례차례….

선생은 그림을 보는 것인지 학생 얼굴을 보는 것인지 나는 번번히 낙선 아니면 선외 평가를 받았었다. 나는 장난을 쳐 보기로 했다. 몇 안 되는 중고 대학 동창인 친구 하나가 이웃 반이었는데 그는 늘 우수 판정을 받곤 했다. 다행히 그 친구 반수업이 내 반 보다 먼저여서 그 친구가 우수 판정을 받은 그림을 빌려 들고 내가 판정을 받아 보았던 것이다. 결과는 영락없는 낙선이었다.

그날 이후 미술선생은 더는 내게 선생이 아니었고, 소심한 내 복수는 그날 이후 미술과는 영영 담벼락 쌓고 지내는 일이었다.

그런 내가 이 나이에 미술사 책을 읽었다. 그것도 정말 재미있게 꼼꼼히 곱씹을 곳에 포스트잇을 붙여가며 말이다. 이따금 책이 소개하는 그림들과 설명에 전율까지 느끼며 책에 빠졌었다. 김태진이 쓴 <미술사 결정적 순간에서 창조의 비밀을 배우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이라는 긴 제목의 책이다.

고전주의,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추상, 전위 등등 살며 한번쯤은 들어 보았던 이야기들에 홀렸던 것인데, 신기하게도 내가 들어 본 화가들의 이름이 제법 많다는 사실에 내 삶이 그리 팍팍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감사도 일었었다.

아무튼 이 책의 마지막 에필로그 글을 작자는 이렇게 마무리한다. <눈을 들어 당신만의 밤하늘을 보라. 그리고 시대가 정해준 삶이 아니라 당신의 영혼이 이끄는 삶을 향한 여정을 시작해보라. 오직 통찰을 향해 나아가면 된다. 그 모든 순간 재미가, 그 좋은 재미가 늘 함께 하길 바란다.>

작자는 이 맺음 말 전에 예술과 가까워지기 위해, 통찰을 얻기 위해 책을 권한다. 그것도 무조건 재미있는 책을 권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정말 재미있는 책이다.

미술사는 곧 사람살이 성장사였다. “예술은 곧 인간 사랑이다.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도록 하니까.”라는 쿤스의 말처럼 책을 읽으며 나에 대한 사랑, 사람 사랑 마침내 신의 사랑을 만나게 되는 법을 안내에 준다. 무릇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

미술 역시 인공지능의 시대를 맞게 된 오늘을 이야기하며 이 책은 이런 물음으로 끝난다. <이제 미술은 어디로 흘러가게 될까.>

단편적으로는 내 삶의 내일, 나아가 내 자식들과 이웃들의 내일에 대한 물음에 가 닿을 수 있는 물음이었다.

** 재밌는 머리 속 그림 하나. 내 고등학교 일학년 상업미술시간 그 학급 모습. 킬킬거리며 얻어내 보는 은총 하나. 그가 참 미술선생이었는지도 모를 일. 그게 1969년도 일 터이니, 55년 전인데. 이제라도 미술사를 읽고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어쩜 그의 덕일수도.

이 책을 권해 준 내 스승께도 감사를.

***개나리와 튤립에 길고 따스한 봄빛 내리며 저무는 하늘에 감사가 이는 저녁에.

관점에

오늘 손님 하나 가게로 들어서며 연신 내 뱉던 말, “Strange!  Strange! Unbelievable!

난 그의 말을 ‘이런 옘병할!’로 듣고 있었다.

하늘에 구멍이 난 것도 아니고, 사월에 장마도 아닐 터인데… 지난 일요일부터 오늘까지 줄기차게 비가 내린다.

어제 밤엔 심하게 바람이 불더니만, 내 가게와 멀리 않은 곳으로 회오리가 지나가 곳곳에 심한 피해를 입었다는 뉴스가 떳다.

손님의 날씨 불평이 어찌 그의 것이기만 하랴.

저녁에 비가 잦아든 창밖을 보니 그 빗속에서 튤립들이 배시시 얼굴들을 내밀었다.

하여 삶은 늘 익숙하고 믿을만한 것들의 연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