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 성(聖)과 속(俗)-3

여행을 떠나며 날씨 때문에 걱정이 많은 최권사에게 내가 한 말이었다. “뭐 어때 비오면 비오는 대로. 구경 못하면 못하는 대로. 그냥 천천히…. 맛있는 거 먹다 옵시다. 그게 여행이지 뭐.” 나이 들어 좋은 점 하나 꼽자면 무언가 움켜쥐려 하는 욕심이 나날이 줄어든다는 것 아닐까? 편하게 주어진 시간 천천히 즐기는 여행이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한 말이었다.

꽤나 쏘다니던 젊었던 한 때가 있었다. 쏘다닌다 한들 비행기는 언감생심 꿈도 꾸어 보지 못했던 시절이었으니 고작 기차나 버스 타고 반도의 남쪽을 헤맬 뿐이었다. 쌀 두어 됫박과 고추장 된장 김치 소금 등속과 모포 한 장, 버너와 취사도구들을 바리바리 꾸린 배낭 짊어지고 산을 찾아 바다를 찾아 떠돌았던 그 시절엔 잡아야 할 무언가가 꼭 있는 듯 했었다.

거의 반 백 년이 흐른 오늘도 호기심은 여전하다만, 무언가 잡으려고 하는 욕심은 없다. 그저 주어진 시간을 감사히 즐길 수 있다면, 누리는 그 여유에 감사할 뿐.

맛을 탐하는 편은 아니다만, 그래도 이젠 적당히 즐길 수 있는 나이엔 이른 것 아닌가하는 생각으로 산다. 이번 여행은 그런 내 생각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충족시킨 시간들이었다. 단 한 곳이 기대를 저버렸지만, 그 식당에서 바라 본 멋진 바깥 풍경이 준 만족함이 그 덜한 맛을 메꾸어 주었으니 맛 여행이라는 면에서는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아직 음식 사진 찍는 일엔 서툴어 음식 사진들은 하나 엄마(미세스 최권사)와  한나 엄마(아내) 몫이었다.

기차 – 내 어린 시절 바람기는 기차소리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이학년 여름 중앙선 열차, 그 해 가을 경부선을 타고 떠돌던 바람기가 먼춘 것은 서른즈음이었다. 그 무렵 남도를 두루 가르던 모든 열차는 다 타 보았을게다. 지금도 기차를 보면 설레기는 그 때와 마찬가지다만, 마음만 탈 뿐 쉽게 몸을 싣지는 않는다.

베네치아에서 피렌체까지 두 시간여 기차 여행은 내 긴 삶의 여정을 짧게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완전한 우연이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책 한권을 꾸려 넣었었는데, 정말 아무 생각없이 손에 잡았던 책이었다. 이미 두 번을 읽었던 책이어서 비행기에서 가볍게 책장을 넘길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넣어 온 책이었다. 하비 콕스(Harvey Cox)의 ‘신이 된 시장(The Market As God)’인데 뉴욕에서 리스본, 리스본에서 베네치아까지  여덟시간 조금 넘는 비행 시간은 콕스의 생각을 정리하는데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최권사 내외와 아내가 함께 한 열과는 멀리 떨어져 앉은 내 자리는 독서 조건에 최적이었다.

그 책에 나오는 한 문장이다. <악명 높은 메디치 가문 출신 교황 레오 10세는 동생에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황자리를 주셨다. 이제 그 자리를 즐기자.”>

돌의 도시 피렌체는 바로 콕스가 말한 ‘신이 된 시장(The Market As God)’ 의 시초였으며, 신의 자리에 오른 자본주의의 전형이었다.  허나 관광지로써는 최상이었다.

성(聖) 속에서 속(俗)을, 속(俗)에서 성(聖)을 발견할 수 있는 도시, 피렌체. 돌 속에서 돌을 밟으며 많이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