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그 후

이따금 내 마음이 아주 편안함을 느낄 때가 있다. 이런 저런 잡다한 잡념도 없고, 이렇게 저렇게 얽힌 걱정들도 없이 나아가 세상사에 대한 공연한 분노도 없이, 말 그대로 텅 빈 편안함을 느낄 때 말이다. 이럴 때면 무언가 해 내야 한다는 욕심조차 일지 않는다.

그야말로 이따금 맛보는 순간들인데, 그런 순간들을 꼽아보니 내 일터인 세탁소에서 내가 일에 빠져 있을 때가 첫째요, 손에 든 책에 빠져 들 때가 둘째 그리곤 뜰에 나가 앉아 새소리 바람소리 들을 때 그런 순간들을 맞았던 듯 하다.

그런 순간들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절로 우러나는 마음은 바로 감사다. 이젠 이따금에서 종종으로 그런 순간들을 맞이하곤 하는데 아마 이게 나이 들어 늙어가는 징조일게다.

어제 오늘, 이틀 저녁 내게 그런 편안함을 누리게 해 준 책,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이며 <아트인문학>강연으로 이름 값이 꽤나 높다는 김태진과 전자공학을 하고 사진 석사를 마치고 미술예술학 박사를 수료했다는 사진작가 백승휴가 함께 쓴 <아트인문학 여행, – 이탈리아를 거닐며 르네상스 천재들의 사유를 배우다.>이다.

이 책을 읽게 된 까닭이다.

한 석주 전쯤 짧은 이태리 여행을 다녀왔다는 소식을 호주에 계신 내 스승께 전했더니만 그가 내게 했던 말이었다.

<지난해 10월 인문학여행 때는 33명의 인문학친구들과 같이 “아는 것 만큼 보인다”라는 주제를 가지고 여러 권의 책을 소개했었는데 그 중에 인상 깊은 책, 두 권을 소개할게요. 시간 될 때 천천히 한번 읽어보세요.  1. 아트 인문학 –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 김태진지음, 카시오페아, 2. 아트 인문학 – 틀 밖에서 생각하는 법, 김태진지음, 카시오페아>>

성정 급한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그 책들을 검색하였는데, 내 눈에 딱 들어온 것은 그 두 권 이전에 <아트인문학 여행, – 이탈리아를 거닐며 르네상스 천재들의 사유를 배우다.>였다.

그렇게 나는 전문가들의 안내를 받으며 내 짧았던 이태리 여행을 다시 곱씹어 천천히 음미하며 다시 걷는 그야말로 편안한 시간여행을 즐겼던 것이다.

실제 여행 중에 내가 보고 느낀 것은 한 시대를 지배하는 돈과 종교라는 권력과 그 시대를 이름없이 살았던  나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 책은 그 시대를 지배했던 권력자들도 아니고 아직 문자보다는 그림으로 세상사를 읽는 게 편했던 나 같은 사람들도 아닌, 그 시대의 천재적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피렌체의 브루넬레스키와 보티첼리, 밀라노의 다빈치, 로마의 미켈란젤로, 베네치아의 티치아노 등 당시 천재들의 삶과 그들의 예술적 작품을 소개하는데, 그 방면엔 아주 캄캄한 내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이야기와 사진으로 나를 홀렸다. 아주 편안하게.

읽으며 내가 밑 줄 쳤던 몇 개 문장들이다.


<(그림에는) 더 이상 종교에 지배 당하지 않겠다는 예술가의 선언이 담긴 것이다…… 그림 속에는 등장 인물이 오직 신앙의 증거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추울 땐 춥다고 하고, 의구심이 들 땐 의심하고, 괴로울 땐 오열한다.>- 피렌체의 화가 마사초의 그림 설명하며

<사람들은 높은 산과 바다의 거센 파도와 넓게 흐르는 강과 별들을 보며 놀란다. 그러나 정작 스스로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 르네상스 시대를 연 시인이라고 평가받는 이태리 시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다가 크게 깨달음을 얻은 문장이란다.

<“모든 대리석 안에는 조각상이 깃들어 있다. 조각가의 임무는 그 현상을 드러나게 하는 것 뿐.”, “가장 고심해야 할 점은 엄청난 양의 노동과 땀으로 작품을 제작해야 하지만 작품이 완성된 뒤에는 마치 일순간에 매우 손쉽게 만들어진 듯이 보여야 한다는 점이다.”, “예술이 존재하는 한 예술은 세월을 초월하는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술을 더욱 완전하게 만들 것이다. >– 미켈란젤로가 한 말들이란다.

“나는 신과 인간에게 죄를 지었다. 주어진 재능에 걸맞은 작품을 만들지 못하고 낭비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 이건 레오나르도 다빈치 말이고.

<바라보다는 ‘바라다’와 ‘보다’의 합성어이다. 바라보는 건 그냥 보는 곳이 아니라 간절한 바람으로 보는 것이다.> 사진작가 백승휴가 말하는 사진찍기에 대하여


내가 이 나이에 옛 천재들을 흉내낼 까닭도 없거니와 오늘날의 권력자나 천재들에게도 마찬가지 일 터.

다만 나보다 먼저 이 세상을 살다간 이들이 경외하던 신 앞에, 내가 내게 솔직한 모습으로 한 번 서 보는 일, 한 번 흉내라도 내야 하지 않을까? 이젠.

미켈란젤로의 말, “모든 대리석 안에는 조각상이 깃들어 있다. 조각가의 임무는 그 현상을 드러나게 하는 것 뿐.”  – 신에 내게 던진 대리석은 바로 나였고, 그 대리석을 조각하는 조각가도 나였을 터이니.

자신없는 지난 모습들은 말고 다만 그 앞에 서는 오늘 만이라도… 편안하게.

여행, 그 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