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한 시간 반을 달려가 두 시간 동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두 사람은 그들이 겪어 온 그리고 오늘도 겪어내는 이야기들을 들려 주었다. 지난 십 년 쌓이고 쌓인 두 사람의 한(恨) 맺힌 이야기들이었다.

다시 한 시간 반을 달려 돌아오는 길, 곰곰 두 사람의 이야기를 곱씹어 보니, 그들의 이야기는 맺힌 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네들이 아픈 마음으로 토해낸 이야기들은 한을 푸는 이야기들이었다.

십년 전 그야말로 허망하게 먼저 떠난 아이들을 가슴에 품고 살며 그네들이 걸어 온 이야기들은, 생명을 생명으로 귀히 여기며 사는 공동체야말로 그들의 한을 풀어내는 세상이라는 고백이며 선언이었다.

멀리 한국에서 여기까지 그 피곤한 몸과 맘으로 지난 십년 그네들이 한풀이로 이루고자 하는 세상을 꼼꼼히 기록하고 정리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자리에 함께 모인 내 오랜 벗들이자 반가운 얼굴들.

나는 다시 신(神)의 긴 호흡을 믿으며, 그 자리에서 불렀던 노래를 웅얼거리며 내려왔다.

“잊지 않을게 잊지 않을게/ 절대로 잊지 않을게/ 꼭 기억할게 다 기억할게/ 아무도 외롭지 않게”

신의 호흡

신(神)의 한 호흡은 몹시 더디고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길다. 이미 노년의 길에 들어선 내 지난 세월을 돌아보아도, 신이 과연 숨을 쉬기나 할까?라는 의심이 그칠 날이 없었으니…. 그 모두 내 무도와 무지 탓.

그 눈트임을 가져다 주는 이는 언제나 나보다 앞서 신 앞에 서있는 사람들.

겪은 아픔과 겪고 있는 아픔을 이야기하는 사람들과 그 이야기를 자신의 일처럼 듣고 있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란 신 앞에 드리는 기도. 나와 우리들이 겪었거나 지금 겪고 있는 아픔을 알 수 없는 누군가들이 다시 겪지 말았으면 하는 소망.

천년 같았을 그들의 십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더디고 긴 신의 호흡을 함께 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잠시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내 짧은 쉼에 매달리지 않고 신의 긴 호흡을 느끼는 은총의 자리일 듯.

여행, 그 후

이따금 내 마음이 아주 편안함을 느낄 때가 있다. 이런 저런 잡다한 잡념도 없고, 이렇게 저렇게 얽힌 걱정들도 없이 나아가 세상사에 대한 공연한 분노도 없이, 말 그대로 텅 빈 편안함을 느낄 때 말이다. 이럴 때면 무언가 해 내야 한다는 욕심조차 일지 않는다.

그야말로 이따금 맛보는 순간들인데, 그런 순간들을 꼽아보니 내 일터인 세탁소에서 내가 일에 빠져 있을 때가 첫째요, 손에 든 책에 빠져 들 때가 둘째 그리곤 뜰에 나가 앉아 새소리 바람소리 들을 때 그런 순간들을 맞았던 듯 하다.

그런 순간들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절로 우러나는 마음은 바로 감사다. 이젠 이따금에서 종종으로 그런 순간들을 맞이하곤 하는데 아마 이게 나이 들어 늙어가는 징조일게다.

어제 오늘, 이틀 저녁 내게 그런 편안함을 누리게 해 준 책,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이며 <아트인문학>강연으로 이름 값이 꽤나 높다는 김태진과 전자공학을 하고 사진 석사를 마치고 미술예술학 박사를 수료했다는 사진작가 백승휴가 함께 쓴 <아트인문학 여행, – 이탈리아를 거닐며 르네상스 천재들의 사유를 배우다.>이다.

이 책을 읽게 된 까닭이다.

한 석주 전쯤 짧은 이태리 여행을 다녀왔다는 소식을 호주에 계신 내 스승께 전했더니만 그가 내게 했던 말이었다.

<지난해 10월 인문학여행 때는 33명의 인문학친구들과 같이 “아는 것 만큼 보인다”라는 주제를 가지고 여러 권의 책을 소개했었는데 그 중에 인상 깊은 책, 두 권을 소개할게요. 시간 될 때 천천히 한번 읽어보세요.  1. 아트 인문학 –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 김태진지음, 카시오페아, 2. 아트 인문학 – 틀 밖에서 생각하는 법, 김태진지음, 카시오페아>>

성정 급한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그 책들을 검색하였는데, 내 눈에 딱 들어온 것은 그 두 권 이전에 <아트인문학 여행, – 이탈리아를 거닐며 르네상스 천재들의 사유를 배우다.>였다.

그렇게 나는 전문가들의 안내를 받으며 내 짧았던 이태리 여행을 다시 곱씹어 천천히 음미하며 다시 걷는 그야말로 편안한 시간여행을 즐겼던 것이다.

실제 여행 중에 내가 보고 느낀 것은 한 시대를 지배하는 돈과 종교라는 권력과 그 시대를 이름없이 살았던  나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 책은 그 시대를 지배했던 권력자들도 아니고 아직 문자보다는 그림으로 세상사를 읽는 게 편했던 나 같은 사람들도 아닌, 그 시대의 천재적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피렌체의 브루넬레스키와 보티첼리, 밀라노의 다빈치, 로마의 미켈란젤로, 베네치아의 티치아노 등 당시 천재들의 삶과 그들의 예술적 작품을 소개하는데, 그 방면엔 아주 캄캄한 내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이야기와 사진으로 나를 홀렸다. 아주 편안하게.

읽으며 내가 밑 줄 쳤던 몇 개 문장들이다.


<(그림에는) 더 이상 종교에 지배 당하지 않겠다는 예술가의 선언이 담긴 것이다…… 그림 속에는 등장 인물이 오직 신앙의 증거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추울 땐 춥다고 하고, 의구심이 들 땐 의심하고, 괴로울 땐 오열한다.>- 피렌체의 화가 마사초의 그림 설명하며

<사람들은 높은 산과 바다의 거센 파도와 넓게 흐르는 강과 별들을 보며 놀란다. 그러나 정작 스스로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 르네상스 시대를 연 시인이라고 평가받는 이태리 시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다가 크게 깨달음을 얻은 문장이란다.

<“모든 대리석 안에는 조각상이 깃들어 있다. 조각가의 임무는 그 현상을 드러나게 하는 것 뿐.”, “가장 고심해야 할 점은 엄청난 양의 노동과 땀으로 작품을 제작해야 하지만 작품이 완성된 뒤에는 마치 일순간에 매우 손쉽게 만들어진 듯이 보여야 한다는 점이다.”, “예술이 존재하는 한 예술은 세월을 초월하는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술을 더욱 완전하게 만들 것이다. >– 미켈란젤로가 한 말들이란다.

“나는 신과 인간에게 죄를 지었다. 주어진 재능에 걸맞은 작품을 만들지 못하고 낭비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 이건 레오나르도 다빈치 말이고.

<바라보다는 ‘바라다’와 ‘보다’의 합성어이다. 바라보는 건 그냥 보는 곳이 아니라 간절한 바람으로 보는 것이다.> 사진작가 백승휴가 말하는 사진찍기에 대하여


내가 이 나이에 옛 천재들을 흉내낼 까닭도 없거니와 오늘날의 권력자나 천재들에게도 마찬가지 일 터.

다만 나보다 먼저 이 세상을 살다간 이들이 경외하던 신 앞에, 내가 내게 솔직한 모습으로 한 번 서 보는 일, 한 번 흉내라도 내야 하지 않을까? 이젠.

미켈란젤로의 말, “모든 대리석 안에는 조각상이 깃들어 있다. 조각가의 임무는 그 현상을 드러나게 하는 것 뿐.”  – 신에 내게 던진 대리석은 바로 나였고, 그 대리석을 조각하는 조각가도 나였을 터이니.

자신없는 지난 모습들은 말고 다만 그 앞에 서는 오늘 만이라도… 편안하게.

여행, 그 후에.

여행 – 성(聖)과 속(俗) -그 마지막 이야기

이른 아침 숙소를 나선 우리는 로마 구시가지로 향했다. 그리고 해가 질 때까지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오후 두어 시간은 골프 카트를 타고 안내자인 Willy에게 그 거리 구석구석에 담긴 이야기들 들으며 로마의 옛 모습들을 눈에 담았다.

비록 짧은 지식이지만 로마의 신화와 전쟁, 권력 암투, 정복, 제국이 품은 종교 또는 종교가 품은 제국에 대한 역사들을 떠올려 보며 그 거리들을 걸었다. 때론 영화 벤허와 로마의 휴일 등을 떠올리기도 했었다. 비록 그 유적지는 가보지는 못했다만 사람 베드로와 바울의 여정을 떠올려 보기도 했었다.

로마는 그야말로 이야기의 도시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트레비 분수(Fontana di Trevi) 앞에서 겪은 일이다. 우리 일행은 사진도 찍고 남들처럼 분수를 뒤에 지고 분수 연못에 동전을 던지기도 하며 그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아주 애띤 얼굴의 젊은 한 쌍의 동양 아이들이 우리들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한국분들 이시지요?” 누구랄 것도 없이 “예’라고 응답했더니, 아이들이 하던 말, “저희들 사진 좀 찍어 주실 수 있어요?” 사진을 찍어 준 후 물었었다. “어디서들 오셨나요? 서울 아님 다른 곳?” 그들이 한껏 웃음을 띠고 했던 대답이었다. “저희들은 일본사람이예요. 일본에서 왔어요.” 깜작 놀라 우리들이 물었다. “아니 어떻게 한국말을 그렇게 잘해요?”  아이들의 이어진 대답. “한국 드라마 보며 배웠어요.” 그 순간 아내의 뜬금없이 빨랐던 반응, “아! 겨울연가?” 아이들이 웃으며 답했다. “아니 그건 오래 된 것이라 잘 모르고요…. 이즈음 거.”

그랬다. 한국 드라마와 K-pop의 위세는 최근 십 수 년 사이 한국을 새롭게 각인 시키는 촉매였다. 아내가 삼십 수년 이어오고 있는 우리 동네 한국학교의 큰 변화도 바로 한국 드라마와 K-pop이 만든 것이다. 이즈음 아내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은 한국계 다음세대들이 아니라, 한국 드라마와 K-pop에 반한 비한국계 미국인들이므로.

“감사합니다”하며 떠나는 일본 아이들이 더 예뻐 보였다. 이즘 애들은 계집아이나 사내녀석이나 어찌 모두들 그리 예쁜지.

나는 그 분수 연못에 동전을 던지며 빌었었다. ‘그저 이 순간이 고맙고 감사합니다. 봐주실 수 있다면, 우리들이 몇 번은 더 이런 여행을..”

카트를 운전하며 우리들을 안내했던 멋진 사내 Willy는 이태리인 아버지와 이집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단다. 그는 이태리에 대한 사랑 못지 않게 이집트에 대한 자부가 크게 드러나는 이야기들을 하곤 했다.

우리들의 여행의 준비자이자 이끄는 대장이자 일꾼인 최권사는 다음 여행 예정지로 이집트를 꼽곤 했었다. 그 말이 생각나 Willy 앞에서 내가 한 말이었다. “우리들의 다음 여행 예정지는 이집트라오!”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요리강습 이었는데,  그것이야말로 최권사의 뛰어난 발상이었고 우리들의 여행을 오래 간직할 수 있게 된 경험이었다.

그날 저녁 우리들에게 파스타 만들기를 가르쳐 준 Romina 선생댁은 바티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아파트였다. 학생들은 우리 일행 넷과 뉴욕에서 영화배우를 꿈꾸며 공부하고 있는 학생 한 명, 그렇게 다섯이었다.

우리들은 Romina 선생의 시범을 보며 밀가루 반죽을 하고 반죽을 밀대로 밀어 국수를 만들거나 만두를 빗듯 라비올리를 만들었다. 그렇게 멋진 저녁상을 함께 만들고 나누는 멋진 시간들을 즐겼다.

나는 어린 시절 교회에서 많은 영향을 받고 자랐다. 그 시절만 하여도 교회는 ‘거룩함(聖)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 주었었다. 머리 굵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거룩함(聖)’과 ‘사람살이(俗)’가 구별되어 따로인 것으로 생각하며 살았었다.

그 이후 참 오랜 세월 ‘사람살이(俗)’하며 줄곧 부대끼며 여기까지 왔다.

이제 노년의 초입, 성(聖)과 속(俗)은 그저 늘 함께 하는 것임을 배운 여행이었다.

하여 또 감사! 오늘에.

여행 – 성(聖)과 속(俗) -7

바티칸 박물관(Musei Vaticani)은 지나치게 과한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어쩜 이번 여행 내내 곱씹어 본 사람살이 모습이었지만 종교, 정치,경제, 과학, 문화 이즈음엔 스포츠까지 모든 영역에서 권력이란 예나 지금이나 너무 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들을 잠시 하였었다.

그 어마어마한  전시물들을 한 곳에 모을 수 있는 그 재력과 힘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부질없는 생각이 오갔지만 박물관을 도는 내내 떡 벌어진 내 입을 닫지 못한 채 구경에 빠졌었다. 안내자 Alfredo는 전시물들과 교황청 또는 바티칸을 설명하면서 꼭  ‘우리(We)’ 또는 ‘우리의(Our)’ 라곤 했는데, 그게 또 내겐 제법 권위적으로 다가오곤 했었다. 족히 180센티를 넘었을 녀석의 키와 몸매 그리고 잘 생긴 얼굴도 녀석의 안내에 신뢰를 더하기도 했을 터였다.

모두가 다 허상인 줄 알면서도, 무릇 모든 권위와 그에 대에 허상은 ‘혹’하는 터무니없는 믿음의 크기를 더하는 법일게다.

그렇게 박물관 구경을 하다가 다다른 마지막 장소는 시스티나 성전 (Aedicula Sixtina)이었다. 안내자 Alfredo는 성전으로 들어가기 전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했었다. “이 성전 안에서는 절대 사진을 찍지 못하고요. 말하지 말아야 한답니다. 그저 조용~”

박물관 뜰에서 설명을 들었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의 천장화가 있는 곳, 물론 조용하라는 것은 그 보다 더 종교적 의미를 더했기 때문이었겠지만…. 그 너른 성전 안엔 이미 사람들이 차고 넘쳤었다. 그리고 조용히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들…. 그 소리들의 크기가 조금씩 더해지자 어디선가 낮고 묵직하게 들리는 소리, ‘쉬잇~’. 그 소리에 성전 안은 잠시 고요한 듯 하더니만 이내 다시 웅성웅성, 그리고 다시 ‘쉬잇~’, 조용, 웅성웅성이 되돌이표 처럼 이어졌었다.

이젠 내 나이 탓인지, 밀폐된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리는 곳에 있으면 갑자기 멍해지며 졸음이 오가나 어지러운 증상이 오곤 한다. 그 순간 또 그런 증상이 밀려왔었다.

나는 사람들이 뜸한 성전 맨 뒤쪽 어느 문 앞에 사람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금줄을 쳐 놓은 곳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러다 금줄을 쳐 놓아 사람들이 드나들 수 없는 문이 열리더니 사제복을 입은 내 또래 사내가 미소년 세 명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왔다. 사제복 사내(노인이 맞겠다)는 한참을 미소년들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더니(내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였기에) 이내 문을 다시 열고 그 안으로 사라지려 했었다. 나는 신기하기도 했고,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도 몰랐기에 그저 호기심으로 그들을 바라 보고 있었고, 금줄을 넘지 않는 가장 가까운 거리로 내 몸을 숙여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 사제복 사내가 나를 바라보며 이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잠시 멍해서 가만히 서 있었는데, 사내는 내게 다가와 내 소매를 끄는 것이었다. 잠시 멈칫 거리고 있는데 안내자 Alfredo가 어느새 다가와 ‘With him!’하고 속삭였다.

그렇게 그를 쫓아간 곳은 텅 빈 거대한 응접실 같은 방이었고, 그곳엔 사진으로만 보았던 건장하고 젊고 멋진 바티칸 근위병이 조각처럼 서 있었다.

아주 짧은 시간 그 구경을 하고 성전 안으로 돌아온 내게 Alfredo는 내게 말했었다. “어휴 이런 경우는 제가 처음 보내요. 그 문 안으로 들어 가려다 쫓겨나는 사람들은 많이 봤지만, 초대 받은 사람을 보기는 오늘 처음이네요. 거긴 교황이 계시는 곳이거든요.”

그저 내 호기심을 가여이 여긴 은총으로 잠시 바티칸 시민이 되었었다는….

나 같은 속인이 단지 호기심으로 이른바 성전에 발도 디뎌 보았다는….

하여  성(聖)과 속(俗) – 그 여행에.

여행 – 성(聖)과 속(俗) -6

피렌체에서 로마로 향하는 열차안에서 바라본 농촌 풍경은 아기자기한 모습으로 내게 낯설지 않은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느긋하고 조금은 여유로웠던 마음이 로마에 이르러 완전히 분주해 지기 시작했다. 로마는 뉴욕이었고 서울이었다.

우선 숙소를 찾아 가는 길부터 헤매기 시작했다. 온전히 구글신에게 의존하여 길 찾기에 나선 여행이었고, 거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방향과 거리와 시간을 알려주는 구글신이였지만, 때론 길 찾는 신도의 아둔함으로 인해 방향을 잃고 헤매기도 하는 법. 로마에 이른 우리 일행의 모습이었다.

어찌어찌 구글신과 사람들에게 물어 지하철과 버스를 타는 티켓을 구매하고 숙소로 향하는 지하철 입구로 향했다. 그렇게 지하철 입구로 향하다가 낯익은 얼굴들을 만났다. 뉴욕에서 리스본을 거쳐 베네치아로 오던 비행기에서 만난 두 노인들이었다.

우리들은 그 노인들이 친구 사이인 줄로 알았었다만, 알고보니 아버지와 아들 사이였다. 두 부자는 보스톤에 살고, 가늠컨대 아버지는 팔십 대 초 중반, 아들은 육십 전후 또는 초반의 나이인 인도계 미국인들이었다. 아들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하다 얼마 전에 은퇴 하였다고 했다.

그들 부자와 함께 전철을 타기 위해 입구에 다달았을 때였다. 입구에 서있는 경찰에게 혹시나 해서 물었었다. 이 입구가 우리들이 가려는 숙소를 향해 가는 것이냐고. 그는 친절한 어투로 ‘그렇다’고 대답하며. ‘소매치기 조심하시오. 돈과 여권이 들은 가방은 앞으로 향하게 매시고 꼭 잡고 있으시오!’로 정말 친절히 알려 주었다.

그렇게 두 노부자와 우리 일행은 입구를 통과해 전철을 타기 위해 걸었다. 많은 사람들과 휩싸여 걷고 있는데 누군가 역무원 비슷한 처자가 우리들을 엘리베이터 쪽으로 안내를 했다. 사단은 바로 거기에서 일어났다. 어디선가 젊은 처자들 서넛이 갑자기 나타나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었는데, 엘리베이터는 고작 대여섯명이 타기에도 부족한 공간이었다. 더더군다나 우리들은 모두 끌고 다니는 짐들도 하나씩 가지고 있던 터였으니, 다같이 타기엔 무리였다. 갑자기 나타났던 젊은 계집들이 ‘밀어 밀어’하며 웃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우리 일행은 다음에 타자고 내렸고, 두 노부자와 젊은 아이들이 타고 내려갔다.

잠시후 엘리베이터가 올라왔는데 그 계집 아이들이 그대로 있었다. 그때 눈치를 챘어야만 했었다만 … 우린 몰랐었다. 그렇게 다시 꽉찬 상태로 탄 엘리베이터 속, 나는 도둑 방지용 가방이라는 선전을 듣고 산 가방을 앞으로 매고 있었고, 그 가방안에는 우리 일행 네 명의 여권과 내 신용카드와 아직 환전하지 않은 우리들의 여행 경비가 들어있었다. 계집아이 하나가 나를 밀치는 통해 싸한 느낌이 들어 밀어내며 가방을 꼭 움켜 잡았었다.

이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는데 문 앞에 서 있던 경찰 두 명이 물었다. ‘안전하신가요? 문제 없으신가요?’ 그 순간 계집아이들은 후다닥 튀였고 바닥엔 아내의 빨간 지갑이 떨어져 있었다. 내가 꼭 쥐고 있었던 도둑 방지용 가방은 약 1/3 쯤이 열려 있었다. 잠시 식은 땀이 주욱~  다행히 잃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만, 그 노부자는 현금 이백달러를 그 엘리베이터 안에서 잃어 버렸다고 하였다.

그리고 전철을 타기 전 그 짧은 시간에 비명 소리를 지르는 피해자와 앞에 있는 이의 등짐 속에 손이 들어 갔다 나오는 현장을 목격하기도 했다. 참 주저 않고 싶은 현장이었다.

로마역에서 내려 내 눈길을 처음 끈 것은 멀리 언덕 위에 있는 황금빛 예수상이었고….. 그리고 소매치기였다.

숙소에 짐을 풀고 바티칸 박물관(Musei Vaticani)을 향하면서도 우리들은 그 소매치기 현장을 이야기하며 그저 조심 조심이었다.

우리는 박물관을 안내하기로 한 안내원을 기다리며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초입 사거리에 위치한 식당 야외 테이블에서 늦은 점심을 마치고 차와 맥주를 즐기고 있었다.

갑자기 아내가 ‘어머~ 어머 !’를 연발하며 ‘저거 좀 보라!’고 다그쳤다. 우리 일행의 눈길이 닿은 곳은 바티칸 박물관으로 올라가는 사거리 한쪽 끝에서 마치 소처럼 굵은 오줌발을 내갈기고 있는 사내였다. 사거리엔 오가는 차량 뿐만 아니라 박물관을 드나드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우리처럼 식당이나 카페 바깥 테이블에서 앉아 있던 사람들은 그냥 녀석의 튼실한 고추를 직관할 수 있는 거리였다. 차마 사진을 찍진 못했다만 녀석의 그 늠름한 못난 표정은 내 기억 속에…. 놈과 같은 놈들 소식을 뉴스 속에서 매일 매일 얼마나 많이 보고 사는지…

그야말로 댄디한 회색 양복 차림에 썬그라스를 낀 녀석은 오줌을 갈기며 사방을 천천히 휘둘러 보기도 했는데, 마치 제 놈이 다윗상인 듯 놀며 그 짓을 끝낸 녀석은 아우디 차를  몰아 휑하고 떠났던 것이다.

옛사람들은 벌거벗은 아름다움을 돌에 새겼건만, 그걸 보고 자란 이즘 애들은 추한 것들만 보고 몸에 익혔나보다. 무엇보다 화장실에 너무 노랭이 짓 하는 문화 탓일 수도 있겠고….

삼천 년 이어 온 이야기의 도시 로마를 만나기 전에 우리들은 우리들만의 이야기들을 겪었다.

아하! 로마! 그 성(聖)과 속(俗).

여행 – 성(聖)과 속(俗) -5

정식 명칭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이란다. 젠장! 문을 잠그고 집을 나서 한참을 가다가 ‘잠궜었나?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에이!’하며 오던 길 되돌아 보는 일이 잦아지는 내게 그 이름은 너무 길었다. 피렌체 대성당(Duomo di Firenze)으로 줄이면 아직은 기억할 만하다.

두오모(Duomo)라는 뜻이 대성당 또는 하나님의 집이란다. 하루 온 종일 하나님의 집 근처를 열심히 걸어 다녔다. 피렌체 대성당을 비롯해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Museo dell’Opera del Duomo), 아카데미아 미술관(galleria dell’accademia), 재래시장인 중앙시장(Mercato Centrale) 등 이었는데 그야말로 꽉찬 하룻길 걷기였다. 신기하기도 하지. 거기에다 두오모 성당 꼭대기 까지 460여개 계단을 오르 내렸건만 우리 모두 멀쩡했다는 사실이다. 아내나 나나, 최권사 내외나 아직은 괜찮은 나이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날 극도로 대비되는 두가지 모습들에 대한 생각은 아직 정리 중이며, 좀 공부를 해야겠다.

뭐 대단한 게 아니다. 대리석 한 장에 바들바들하는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그 수많은 대리석들로 이루어진 그 거대한 건축물들과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뭔가 뜻과 이야기가 있는 듯한 미술품들과 곧 숨을 쉴듯한 조각들, 도대체 상상할 수 없는 듯한 작업으로 이루어진 천장화와 벽화들…. 도대체 어떤 열정과 무슨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일까? 하는 의문들.

그리고 충격적이었던 유물 하나. 그 거대한 구조물을 세우는데 사용되었다는 정말 열악하기 그지 없는 도구들. 그 가늠할 수 없는 사이를 메꾸어 나간 노력은 오로지 누군가 바로 사람이 인내하지 못할 극도로 험한 노동이었을 터.

그렇게 피렌체는 내게 무겁게 다가 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피렌체가 준 마지막 절정, 바로 미켈란젤로 그리고 다윗상(David of Michelangelo). 가히 창조에 버금 가는 듯한 사람의 솜씨. 쯔…. 내가 뭘 알까만.

대성당과 시장은 겨우 몇 걸음 떨어져 있었을 뿐. 하나님의 집은 늘 사람 사는 세상 가까이 있듯.

뿐이랴! 천재나 바보나 신의 잣대에 올라타면 다 거기서 거기일 터.

하여 피렌체 공부는 좀 해야할 터.

여행 – 성(聖)과 속(俗)-4

화분이 아닌 땅에 뿌리를 내린 화초나 나무 한 그루 찾기 힘든 돌의 도시 피렌체.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갈릴레오의 도시이며 마키아벨리의 도시이기도 했던 피렌체. 피렌체는 돌의 도시이자 ‘거대한 돈과 권력의 도시’, 그 돈과 권력에 항거하는 ‘풍자의 도시’로 내게 다가 왔다.

우피치 미술관(Uffizi Gallery, Galleria degli Uffizi)을 안내해 준 RaFael은 그야말로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다. 단지 우리 일행 네 명을 위해 그는 정성껏 피렌체와 우피치와 메디치 가문과 르네상스와 신이 된 종교와 돈과 권력 나아가 그것들을 풍자하는 예술에 대한 설명에 온 열정을 다했었다. 그는 피렌체를 휴머니티(humanity)와 휴머니즘(humanism)의 도시로 소개하려고 많은 애를 썻다.  나는 그런 그의 노고 덕에 종교와 돈과 권력의 역사 그리고 그에 항거하는 사람 사랑 곧 진정한 신의 역사를 이루고자 한 옛 사람들의 노고를 맛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참 재밌었던 사내 RaFael을 만난 것은 이번 여행에서 맛 본 은총 중 하나다.

미술관에서 내려다 보이는 베키오 다리(Ponte Vecchio)를 설명하던 RaFael의 말이었다. “저기 가면 금, 은, 다이아몬드 등 보석상들과 유명 시계점들이 저 다리를 차지하고 있는 걸 보실거예요. 근데요. 처음에 저 다리엔 정육점 등 서민들이 찾는 음식점들이 많았다고 해요. 그런데 어느 날인가 그런 가게들이 모두 문닫고 보석상과 시계상으로 바뀌었데요. 왜냐하면요. 도시의 돈을 다 움켜잡고 있는 메디치 가문에서 그랬데요. ‘돈 많은 우리 가문 사람들만 이용할 수 있는 가게만 장사하게 하자’고요.” 물론 우스개 소리였겠다만 나는 사람사는 세태를 풍자한 그의 우스개가 단지 우스개로만 들리지 않았었다.

미술관과 베키오 다리 등을 구경 한 후 저녁식사를 위해 어느 골목의 그럴싸한 식당문을 두드렸었다. 바깥에서 보기에 작지만 잘 꾸며진 식당이었다. 분명 영업시간 중이었는데 가게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문을 흔드니 종업원이 문을 열며 물었다. “예약 하셨나요?” ‘아니’라는 우리들의 응답에 잠시 난색을 표하는 듯 하더니, “몇 분이지요?”라고 물었다. ‘넷’이라는 응답에 또 잠시 멈칫 하더니만 “들어 오시지요.”했다.

그렇게 들어 간 식당엔 우리들이 첫 손님인 듯 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었다. 들어오는 손님들 마다 우리와 똑 같은 대화와 종업원의 표정과 몸짓이 똑같이 반복되는 것이었다. 작은 가게 안은 이내 만석이 되었는데 내가 들은 한, 딱 한 팀만 예약 손님이었을 뿐, 나머지 모두는 우리처럼 지나가다 들어 온 손님들이었다. 참으로 뻔뻔한 상술이었늗데, 면벌부(또는 면죄부) 상술로 도시를 이룬 후예들 답다는 생각으로 그냥 많이 웃었다. 그 날 저녁 음식도 참 맛있었다.

여행의 참 맛은 밤거리에 있다던가. 그 날 피렌체의 밤거리에서 우리 일행은 잠시 청춘이었다. 거리의 악사들 연주에 맞추어 무리 지어 춤을 추던 한 떼의 젊은이들을 보며 몸에 시동을 걸던 아내가 그 무리에 섞여 춤을 추고 악사들과 함께 북을 두드렸고 우리는 한껏 즐거웠었다.  

허나 참 바보같기도 하지. 기껏 사진을 찍다가 흥에 취한 아내 모습을 담을 생각 못하고 그냥 서있기만 했으니. 쯔쯔…본래 바보였는지도.

하여 잊지 못할 피렌체의 밤.

여행 – 성(聖)과 속(俗)-3

여행을 떠나며 날씨 때문에 걱정이 많은 최권사에게 내가 한 말이었다. “뭐 어때 비오면 비오는 대로. 구경 못하면 못하는 대로. 그냥 천천히…. 맛있는 거 먹다 옵시다. 그게 여행이지 뭐.” 나이 들어 좋은 점 하나 꼽자면 무언가 움켜쥐려 하는 욕심이 나날이 줄어든다는 것 아닐까? 편하게 주어진 시간 천천히 즐기는 여행이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한 말이었다.

꽤나 쏘다니던 젊었던 한 때가 있었다. 쏘다닌다 한들 비행기는 언감생심 꿈도 꾸어 보지 못했던 시절이었으니 고작 기차나 버스 타고 반도의 남쪽을 헤맬 뿐이었다. 쌀 두어 됫박과 고추장 된장 김치 소금 등속과 모포 한 장, 버너와 취사도구들을 바리바리 꾸린 배낭 짊어지고 산을 찾아 바다를 찾아 떠돌았던 그 시절엔 잡아야 할 무언가가 꼭 있는 듯 했었다.

거의 반 백 년이 흐른 오늘도 호기심은 여전하다만, 무언가 잡으려고 하는 욕심은 없다. 그저 주어진 시간을 감사히 즐길 수 있다면, 누리는 그 여유에 감사할 뿐.

맛을 탐하는 편은 아니다만, 그래도 이젠 적당히 즐길 수 있는 나이엔 이른 것 아닌가하는 생각으로 산다. 이번 여행은 그런 내 생각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충족시킨 시간들이었다. 단 한 곳이 기대를 저버렸지만, 그 식당에서 바라 본 멋진 바깥 풍경이 준 만족함이 그 덜한 맛을 메꾸어 주었으니 맛 여행이라는 면에서는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아직 음식 사진 찍는 일엔 서툴어 음식 사진들은 하나 엄마(미세스 최권사)와  한나 엄마(아내) 몫이었다.

기차 – 내 어린 시절 바람기는 기차소리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이학년 여름 중앙선 열차, 그 해 가을 경부선을 타고 떠돌던 바람기가 먼춘 것은 서른즈음이었다. 그 무렵 남도를 두루 가르던 모든 열차는 다 타 보았을게다. 지금도 기차를 보면 설레기는 그 때와 마찬가지다만, 마음만 탈 뿐 쉽게 몸을 싣지는 않는다.

베네치아에서 피렌체까지 두 시간여 기차 여행은 내 긴 삶의 여정을 짧게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완전한 우연이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책 한권을 꾸려 넣었었는데, 정말 아무 생각없이 손에 잡았던 책이었다. 이미 두 번을 읽었던 책이어서 비행기에서 가볍게 책장을 넘길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넣어 온 책이었다. 하비 콕스(Harvey Cox)의 ‘신이 된 시장(The Market As God)’인데 뉴욕에서 리스본, 리스본에서 베네치아까지  여덟시간 조금 넘는 비행 시간은 콕스의 생각을 정리하는데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최권사 내외와 아내가 함께 한 열과는 멀리 떨어져 앉은 내 자리는 독서 조건에 최적이었다.

그 책에 나오는 한 문장이다. <악명 높은 메디치 가문 출신 교황 레오 10세는 동생에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황자리를 주셨다. 이제 그 자리를 즐기자.”>

돌의 도시 피렌체는 바로 콕스가 말한 ‘신이 된 시장(The Market As God)’ 의 시초였으며, 신의 자리에 오른 자본주의의 전형이었다.  허나 관광지로써는 최상이었다.

성(聖) 속에서 속(俗)을, 속(俗)에서 성(聖)을 발견할 수 있는 도시, 피렌체. 돌 속에서 돌을 밟으며 많이 걸었다.

여행 – 성(聖)과 속(俗)-2

여행을 떠나기 전날 급하게 준비한 물건들은 우산과 우비와 방수 처리된 옷들이었다. 우리들의 여행코스 내내 비가 함께 할 것이라는 일기예보 때문이었다. 그것도 약간의 비, 간혹 비 정도의 예보가 아닌 온종일 비였다.

날씨는 예보대로 였다. 경유지인 리스본만 하여도 화창한 날씨였건만 첫 도착지 베니스에 이르니 그야말로 우중(雨中)이었다. 허나 거기까지 였을 뿐, 이후 여행 내내 비는 이따금 오락가락 했지만 줄곧 우리들을 피해 다녔다. 나는 “운이 좋았다”며 친구들에게 카톡으로 전했는데, 친구 하나가 이르길 “야! 그걸 은총이라고 하는거야!”라며 나무랐다. 나는 흔쾌히 그 말을 수긍했다. 예보와 달랐던 날씨는 여행중 우리들이 누린 은총이었다.  

베니스가 베네치아로 다가오면서 내 상상 속 베니스는 힘없이 무너졌다. 사실 베니스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베니스의 상인’의 무대라는 것, 아름다운 물의 도시라는 막연한 상상이 모두였다.

이번 여행을 알차게 만든 이들은 곳곳의 박물관 안내자들이었다. 그들과의 예약은 모두 최권사 몫이었다. 안내자들은 모두 매우 뛰어난 이야기꾼들이었다. 그들의 이야기 화법에 혹한 까닭은 그들이 전달자가 아닌 소개하는 작품이나 유물, 기념물 속 주인공이 되어 말하기 때문이었다.

첫번 째 안내자를 만난 곳은 ‘도제의 궁전(Doge’s Palace)’으로 알려진 Palazzo Ducale(두칼레 궁전) 앞 날개 달린 사자상 앞이었다. 안내자는 ‘유럽을 걷다(Walks in Europe)’이라는 팻말을 들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들의 걷기 여행은 시작되었다.

숙소에서 그곳에 도착하기 까지 버스를 타고 로마광장을 거쳐 수상버스로 갈아 타야 했는데, 그 모든 과정들이 우리 일행에겐 도전이었고, 제법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안내자를 따라 두칼레 궁전(Palazzo Ducale)과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의 유골이 안치 되어 있다는 산마르코 대성당(Basilica di San Marco)을 돌아 보았다. 안내자는 궁전에 입장하기전 꽤 오랜 시간 동안 역사 강의를 시전하였다. 궁전과 성당을 보기 위해서는 마땅히 베네치아의 역사 곧 이탈리아가 아닌 베네치아 공화국의 역사를 알아야만 한다는 열정을 다한 강의였다. 그녀의 독특한 억양으로 그 날 수없이 들었던 ‘originally’라는 말이 아직도 귀에 맴맴 돈다. 그녀는 위대한 베네치아 공화국의 시민이었다.

궁전과 황금빛 성전 구경을 마치고 산마르코 광장(Piazza San Marco)과 뒷골목 풍경들을 두루 눈에 담은 뒤 광장 맞은 편 코레르 박물관(Museo Correr)을 섭렵하니 한나절이 휙 지나갔다.

골목 – 비단 곤돌라가 다니는 베네치아 뿐만 아니라 여행 내내 도시의 골목들은 박물관 못지않게 그곳을 살다 간 사람들의 어제와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의 오늘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이었다.

베네치아 섬 속에도 성(聖)과 속(俗)은 그렇게 어우러져 예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저녁엔 산마르코 대성당(Basilica di San Marco)의 바이올린 연주자의 아들로 이 곳에서 태어났다는 비발디(Antonio Lucio Vivaldi)를 기념하여 열린다는 음악회를 즐겼다. 비발디 교회(Vivaldi Church)로 알려진 피에타 성당(Maria della Pietà)에서 있었던 사계 연주회(Four Seasons Concert)였다.

내가 음악에 대해 뭘 알까마는 때론 이런 사치와 허영 정도는 누려도 과하지는 않을 터. 그 피곤함에도 졸지 않고 즐겼으니 비발디에게 미안함은 없었고.

사족 – 여행 내내 느낀 것이지만(몇 해 전 파리에서도 마찬가지였고) 도대체 화장실에 대해선 끔직히도 베니스 상인 샤일록만큼이나 구두쇠적인 문화는 도대체 이해를 못하겠다는…. 연주회를 마치고 주체할 수 없어 화장실을 찾는 내가 들었던 말. “교회내 화장실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없이 가까운 카페에서 싸고 다시 채우느냐고 맥주 한 잔! 며칠 후 로마에서는 거금 일 유로를 주고…. 여행은 때론 참 불편해! …. 그 구두쇠 문화의 끝판을 확인한 것은 며칠 후 로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