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하루

아무 계획도 없이 하루를 보내는 맛도 괜찮다. 좀 걷자고 공원을 찾아 나서기엔 너무 춥고, 아직 눈도 녹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 조차 느끼지 않고 그저 마음 가는 대로 하루 해를 보냈다. 집안 정리도 하고, 도토리 국수 삶아 동치미 국물에 말아 먹은 후 눈이 감겨 낮잠 한 숨 달게 잤다.

이런 날엔 마음 다스리는 글 한 귀 찾아 나서는 맛이 괜찮을 듯해서 손에 들었다. 1961년생. 스물 여섯에 다국적 기업 임원이 되었다가 홀연히 태국 밀림 속 사원을 찾아가 스님이 된 스웨덴 사람. 2022년 루게릭 병으로 예순 하나에 입적한 사람. 비욘 나티코블란드가 쓴 책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I may be wrong>

읽으며 마음은 차오르는데 배속이 허전해 고구마 감자 구워 헛헛한 속을 채우며 읽었다. 책 속 이야기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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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귀를 기울이는 사람에게 마음을 터놓을 땐 얼마나 좋은지요. 잠시라도 제 입장에서 생각하고 뒤를 받쳐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으로 든든합니다. 그와 같은 경청은 그 자체로 치유효과가 있습니다. 그렇게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지요.>

<아잔 스님은 영국인이었지만 어느 나라 말을 사용해도 언변이 뛰어난 분이었지요. 그날 밤에도 뜻밖의 말로 우리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오늘 밤엔 여러분에게 마법의 주문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갈등의 싹이 트려고 할 때, 누군가와 맞서게 될 때, 이 주문을 마음 속으로 세 번만 반복하세요. 어떤 언어로든 진심으로 세 번만 되뇐다면, 여러분의 근심은 여름날 아침 풀밭에 맺힌 이슬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자, 다들 주문이 뭔지 궁금하시죠?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책의 저자 비욘이 어느 강연해서 한 말.

<예전에 한 강연에서 이 마법 주문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 강연엔 마침 제 아내인 엘리사베트도 참석했었지요.

다음 날 아침, 우리 내외는 아침 식사를 하면서 가볍게 언쟁을 벌였습니다. 그 때 아내가 한 말이었지요. “비욘, 당신이 어제 강연에서 말했던 그 주문 말인데… 지금이 그 주문을  사용할 적기 아닐까?”

그러자 제가 한 대답이었습니다. “아니, 난 지금 다른 주문을 사용할거야. 당신이 틀릴 수 있습니다.”>

  •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가 지은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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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깨달은 자 또는 앞서 가는 이가 전하는 해답을 옮기는 일은 멈출란다. 내겐 여기까지가 적당함으로.

어느 새 밤이다. 이런 날엔 와인 맛 깊게 느껴도 좋을 듯.

잘 쉰 하루

며칠 전부터 4인치 정도 눈이 더 내린다는 예보는 어제 오후부터 호들갑을 더해 6인치 정도를 예상한다는 문자로 전해졌다. “에이, 핑계 김에 우리도 하루 쉬어 갑시다.”

그렇게 하루 가게 문 닫기로 하고, 조금은 게으르게 맞이한 아침은 참 고요했다. 어쩜 이 고요함은 늘 이어 왔을게다. 다만 아침 분주한 소리를 만들어 이 고요함을 느끼지 못한 것은 분명 내 탓일 터였다.

눈 내리는 소리에 귀 기울여본 게으른 아침에 감사를!

쉰다고 아직 늘어질 나이는 아니어서 이 땅에 살기 위해 최소한 해야만 하는 서류 정리들도 좀 하다가, 아내와 내 입을 위하여 손품 파는 재미도 누려본다.

꾸준한 놈 당할 재간 없다더니 쌀가루 뿌리듯 내리는 눈이 온종일 내려 족히 6인치를 채울 모양이었다.

눈은 그치지 않았지만, 더 쌓이기 전에 좀 치워 놓아야 내일이 좀 편할 터. 이젠 삽질도 쉬엄 쉬엄 그냥 즐기듯 해야 할 나이.

건너 건너 집 snow blower로 눈 폭포 만들며 눈 치우는 사내를 보며 혼자 중얼 거려 보는 소리, ‘에이, 이사람아. 눈 치우는 건 그냥 운동인데. 암만 그냥 삽질이지. 뭔 snow blower람!’

근데 이건 또 뭐람! 이웃 집 나이 들어 장가 안 간 아들 걱정 들을 때면 함께 안타까워 했던 나였는데, 오늘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눈 치우는 것이 그렇게 부러웠다는.

머리 흔들며 정신 차릴 때마다 혼자 해보는 소리다만 내 맘은 왜 이리 간사한 것인지? 왈 종심(從心) 나이라 했거늘, 정신적 자람이 아직 내 맘 따라 갈 나이엔 이르지 못했나 보다.

그런데 몸은 이미 나이를 다 쫓아가, 아니 어쩜 더 나아 간 지경에 이른 것인지 몰라 그저 천천히 땀 식혀가며, 어둠 찾아 들기 전 쉴 곳 찾아 빠른 날개 짓 하는 새들에게 응원도 보내면서 천천히 천천히 눈을 치웠다. 눈은 이내 그 치운 자리를 또 다시 덮었지만.

저녁에 이즈음 몇 장씩 넘기던 책을 마무리해 읽었다. 역사학자 나타샤 티드가 쓴 <세계사를 바꾼 50가지 거짓말>이다.

이 책에 나오는 역사적 거짓말들을 만든 주체들은 대개 당대의 권력자들이다. 정치, 경제, 군사, 종교, 문화의 권력자들, 19세기 이후로 그보다 더 큰 권력자로 등장하는 언론까지.

이 거짓말들이 낳은 후과(後果)는 슬프게도 사람들의 죽음이었다. 그것도 한 두명의 죽음이 아니라 작게는 수백, 수천에서 많게는 수 백만, 수 천만에 이르는 당대 사람들이 겪은 이른 죽음이었다.

그 거짓이 거짓으로 드러나는데 걸린 시간은 길게는 이천 년에서 수 백 수십년 또는 오늘도 이어지는 일이란다.

단, 이 책의 허점 한가지. 바로 그 거짓을 드러내기 위해 몸부림치며 삶을 바쳤던 사람들이 이끌어 온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는 것.

오늘도 세상 곳곳에서 쓰여지고 있는 이야기들, 거짓말과 그에 대항하여 싸우는사람들을 생각하며 읽어야 좋은 책 한 권.

잘 쉰 하루. 오늘을 허락해 주신 신께 감사하는 밤에.

*** <이제 신문사는 자신들의 편견을 뒷받침하는 선정적인 기사를 만들기 위해 사실을 왜곡할 뿐이다.>  – 이 책 ‘제4장 19세기’를 여는 글.

아직은

‘이젠 푸근한 겨울이 좋다.’고 내심 겨울답지 않은 겨울에 감사하며 지냈더니, ‘요놈아! 내가 어디 네 놈만 아는 줄 아느냐!’며 겨울다운 겨울이 매섭게 다가온 어제 오늘이었다.

한 4인치(10센티) 정도 내린 눈이야 그렇다 쳐도 갑자기 9도(섭씨 영하 10도)까지 내려간 매서운 추위에 몸이 한껏 움추러 들었다. 모레는 눈이 4인치 정도 또 내린단다.

‘눈 치우는 일이야 운동 삼아…’하며 한 해 두 해 미루며 살았는데, 추위에 눈 치우는 일도 이젠 좀 되다.

한 서너 해 전 겨울이었나 보다. 눈을 치우는데 앞 집 사는 사십 대  Nathan이 성큼 성큼 내게 다가오더니만 ‘제가 도와 드릴게요.’하며 빠르게 눈을 치워 주었다. 내가 ‘고맙다’ 했더니 그가 맞받은 말, ‘에이고, 뭘요! 아들처럼 생각하세요.’

난 그때 속으로 깜작 놀랐었다.  그 전 해인가 앞집으로 이사 온 Nathan이 젊다는 것은 알았지만, 미국애들 특유의 겉늙은 모습 탓이었지는 나는 그를 친구처럼 생각했었는데, 그는 나를 아버지 뻘로 대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날 이후 나는 가급적 그와 같은 시간대에 눈을 치우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은근히 녀석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었다는….

이젠 우리 두 내외에게 적당한 작은 아파트로 이사할 때나 되었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래도 손녀딸이 걷기 시작하면 함꼐 놀아야 하는데… 아직은…

아이고, 이 촐랑거림이라니. 아직은 매섭게 춥고 눈 내리는 겨울 견딜만한 가 보다.

시 한 편

새해 들어 첫 주문한 책들을 받았다. 예상보다 빠르게 받았다. 손 글씨 엽서들이 동봉된 정경심 시인의 책 <나 혼자 슬퍼하겠습니다>를 먼저 집어 들었다.

첫 번째 시 <고난의 지금을 견딘다>로부터 마지막 시 <나를 울린 영치금>까지 터질 듯 터질 듯 울컥이는 맘 꾹꾹 눌러가며 책을 덮을 즈음, <당신들의 조건 없는 위로와 격려를 생각하며 반드시 살아야겠다고 아니 살아 내고 싶어서 쓴 글입니다>라는 글쓴이의 말에 기어이 눈물, 콧물.

이리 쉽게 책장을 넘기고 책을 덮을 일은 아니다. 가까이 두고 조국, 정경심 두 분과 그들의 가족들 그리고 그들 곁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 소식 들을 때 마다 한 편 한 편 곱씹어 읽어야겠다.

그녀의 시 한 편.


<결국, 사람이다>

죽음의 길을 가지 않은 것은

사람 때문이다

결국 그 길을 가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던

그가 버티고 있었고

나를 그 길로 보내 버릴 수 있었던 아이들이

집요하게 내 죽음의 멱살을 붙잡고 싸워 주었다

자신도 버티기 힘든 각자의 무게 위에 서로의 무게까지

우리는 어깨와 어깨를 맞대어

무게를 떠안고 분산 시켰다

그리고 그곳에 이름 모를 수많은 분들이 어깨를

들이밀고 우리의 어깨가 흐트러지는 것을 막아 주었다

우리를 지탱시킨 것은 우리를 살린 것은

결국, 사람이다.

새해 기도

해마다 연초 며칠은 분주하게 시간에 쫓긴다. 늘 시간이 빠듯한 구멍가게 주인들이 모두 겪는 일 아닐까? 아님 단지 이어지는 내 게으름 탓 일런지도 모르겠다. 지난 한 해 쌓인 이런저런 서류 및 문서 정리와 함께 새해를 준비하는 계획들로 새해 첫 주가 훅 지나갔다.

내친 김에 맞을 거 다 맞고 가라는 것인지, 아내와 내 자동차 등록갱신은 물론 내 운전면허 갱신 더하여 가게 리스 갱신까지 모두 올 일월에 처리하게 되어 있어 마음이 두루 바빴는데 생각해보니 그 또한 감사였다. 무릇 맞을 매란 한꺼번에 맞으면 좋은 법 아닐까?

개인적인 일들을 그러하되, 뉴스들은 지난 해나 새해나 그저 답답하다. 아니 답답함이 새해들어 더해졌다는 표현이 적합할 듯.

그 답답한 마음으로 다시 꺼낸 든 책, 스티븐 핑커( Steven Pinker)가 쓴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이다.

“내가 이 책에서 이해하려는 주제는 가정에서, 이웃에서, 부족 간에, 무장 세력 간에, 민족과 국가 간에, 그야말로 온갖 차원에서 진행되어 온 폭력 감소 현상이다.”라는 저자의 말처럼 뉴스로 답답해진 마음을 풀어주는 책이다.

어제 오늘, 이 책의 진수라 할 8장(내면의 악마들)과 9장(선한 천사들)을 꼼꼼히 음미하며 정독했다.

읽으며 되씹고 싶은 대목 중 일부이다.

<인간의 폭력은 대부분 비겁하다.>

<양측(가해자와 피해자)은 경쟁적인 시점에서 정보를 왜곡할 뿐만 아니라, 역사를 측정하는 달력도 서로 다르고 역사적 기억에 부여하는 중요성도 서로 다르다. 피해자는 근면한 역사가이자 기억의 육성자이다. 가해자는 실용주의자이고 현재에 굳게 뿌리 내린다. 우리는 보통 역사적 기억을 좋은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기억되는 사건이 채 아물지 않은 상처라면, 그래서 시정이 요구되는 일이라면, 기억은 폭력에의 호소가 될 수 있다.(이 때 폭력은 대개 가해자에 의해 발생) >

<폭력의 첫 번째 종류는 실용적, 도구적, 착취적, 포식적 폭력이라고 불러도 좋다. 두 번째는 우세 충동(제 잘 남에서 일어나는) 세 번째는 복수심, 네 번째는 가학성, 다섯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폭력의 원인은 이데올로기이다.>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사람들 보다 그들을 연구하는 학자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가해자들은 늘 자신의 행동을 남에게 자극 받은 것, 정당한 것, 비자발적인 것,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포장하는데 쓸 갖가지 변명의 술책들을 갖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완곡어법이다.(이른바 말장난… )>

<도덕감각을 못 쓰게 만드는 방법 중 하나는 피해자를 헐뜯는 것이다. 어떤 집단을 악마화하고 비인간화하면 그 구성원들을 쉽게 해치게 된다.>

<이데올로기에는 치료약이 없다.>

<온 나라가 유해한 이데올로기에 전염되는 현상을 확실히 막을 방법은 없지만, 예방책은 하나 있다. 바로 열린 사회다.>

<정치 지도자와 정부 관료가 감정 이입에 따라 행동한다면, 그래서 친척과 벗에게만 다정하게 특권을 나눠 준다면, 낯선 사람들에게 냉정하게 분배할 때보다 사회에는 큰 해가 된다.>

<자신이 최대의 이득을 얻고자 남들을 해치는 일은 아무리 작은 피해라도 추한 짓이라는 것을, 바로 그가(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이성, 원칙, 양심, 짐승 속에 거하는 존재. 내면의 인간. 자신의 행동에 대한 위대한 재판관이자 결정권자) 우리에게 알려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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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게 리스를 연장한다고 해도 몇 년을 더 일할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다. 제 아무리 백세시대를 노래한들 그게 내 노래는 결코 아닐테고, 이제부터는 신의 은총에 기댈 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깊어지므로.

다만 내 내면의 악마들과 싸워 이기고 내 마음 속 선한 천사들의 힘에 기대어 세상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그렇게 사람들이 더불어 함께 사는 좋은 세상을 위해 기도라도 할 수 있다면…그 때까진 살아도 좋지 않을까?

기도처럼 조금이라도 흉내 내며 사는 한 해가 되었으면.

아버지의 덕담(德談)

새해 인사드리러 갔더니 아버지는 한 밤중이셨다. 아내와 나는 한 동안 아버지가 깨어나시길 기다렸다. 점심 식사 나올 시간이 다가와 아무래도 잠을 깨워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아버지, 저희들 왔어요.” 몇 번을 큰소리로 똑 같은 말을 외친 뒤에야 아버지는 눈가리개를 벗으시며 떠지지 않는 눈을 조금 여셨다. 그리곤 “워러, 워러”를 찾으셨다. 요양원 직원일 줄로 알았나 보았다. 아버지에게 물을 건네며 나는 조금 더 큰 소리로 “아니, 우리 왔다니까!” 더하여 아내가 높은 소리로 물었다. “아버님, 저 모르세요?”그제야 잠에서 깨어나신 아버지가 환한 미소 얼굴에 담으며 하신 말씀. ‘에이! 내가 너희들을 모르면… 정말 가야지!’

그리고 이어지던 아버지의 꿈 이야기.

“너희들 마침 잘 왔다. 이건 아주 심각한 얘기다. 꿈 이야기가 아니야! 내가 실제로 겪은 얘기야. 잘 들어라! 먼저 궁금해서 내가 물어볼 게 있어요. 니들 솔직히 대답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이즈음 아버지가 나를 볼 때마다 먼저 입을 떼시는 도입부로 대체로 내 귀에 익은 대사다. 대개 이 다음을 잇는 아버지의 대사는 당신의 손자 손녀 특히 내 딸아이의 근황이 궁금하셔서 이어지는 내용이었다. 이 대사에 대한 내 응답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한울네는 애기 나서, 한나네는 일이 있어 오늘은 못 와요. 다들 잘 살아요.’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달라도 아주 달랐다.

“너희들 이거 알어?  그거 그거 … 통일이 어떻게 됐니?…. 이거 이거 꿈 이야기 아니야! 내가 직접 본거야. 통일이 됐어 통일이. 그 잔치 자리에 내가 초대를 받았어. 내가 그 세상 보고 왔는데 천국이야 천국! 잔치자리에 산해진미가 차려졌는데 어찌나 정갈하고 맛있던지 내가 하루에 여섯 끼씩을 먹었어. 여섯 끼를. 거긴 가난한 사람들도 왕처럼 살어, 모두가 왕처럼. 이거 꿈 이야기 아니다. 내가 직접 보고 온거야!”

아버지는 똑 같은 이야기를 세번 반복하셨는데, 단 한 단어만 계속 바꿔 쓰셨다. 바로 ‘천국’이었다. 처음 이야기에선 ‘천국’이 두 번째는 ‘극락’으로 세번 째는 ‘파라다이스’로 바뀌었다.

그리고 덧붙이셨던 말씀. “내가 왜 그 자리에 초대됐는 지는 아직도 모르겠어. 왜 나를 초대했는지? 나를 초대했던 사람은….정씨였어, 정씨.” 나는 속으로만 아버지에게 응답했었다. ‘계룡산 정도령이었나 보다.’고.

아마 아버지는 신년 첫 날 꿈자리에서 아버지가 생각하시는 모든 하늘나라를 두루 다 돌아보셨나 보다.

그 이야기를 이제 봄이 오면 만 아흔 여덟, 옛 우리 나이로 치면 아흔 아홉 이른바 백수(白壽)를 맞으시는 아버지가 우리 자식들에게 던지시는 새해 덕담으로 받았다. ‘올 한 해 좋은 세상 누리며 살아라!’는 축복으로.

이윽고 나온 아버지의 점심 식탁. 곱게 으깬 닭 요리 한 줌과 우유 반 팩, 요거트 반 컵쯤을 맛나게 오래 즐기시던 아버지가 숟가락 내려 놓으시며 하시는 말씀. “됐다. 고맙다. 이제 가라”

*** 새해 꿈꾸는 한가지. 가게에서 일하는 시간도 좀 많이 줄이고 나 혼자 즐기는 시간을 더 많이 누렸으면 하는 꿈. 그 꿈으로 오늘 혼자 즐긴 일. 말린 나물 불려 나물을 무친 일. 도라지, 취나물, 무말랭이, 말린 호박, 시래기 등.

정월 대보름 나물 무치는 일은 한 해의 풍요와 건강을 위한 비나리였다든가? 나물무침을 딱히 음력 정월 대보름에만 해야 하는 일은 아닐 터. 무릇 기도란 언제 어디서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법.

그저 내가 아는 이름과 얼굴들 하나 하나 떠올려 보며 올 한 해 넉넉한 풍요와 건강을 누리는 한 해가 되길 비는 마음으로. 그렇게 나 혼자 즐겨보는…

아버지의 덕담을 받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