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야기

필라델피아에서 영화 <서울의 봄>이 상영된단다. 이 소식을 들은 필라민주동포 모임 벗들이 단체 관람을 하자고 이른바 번개모임을 제안했다. 그 소리 듣고 더듬어 보는 그 시절 옛 이야기다.

내 기억에는 박정희 죽음의 날인 1979년 10월 26일 보다, 이른바 국장이라고 불렀던 그의 장례식 이 있던 날 그해 11월 3일 신문로 사거리 모습이 깊게 각인되어 남아있다.

당시 나는 영세하다는 말조차 호사스러울 만한 아주 작은 출판사를 하면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었다만, 나는 그저 백수였던 시절이라고 말하곤 한다. 박정희의 죽음이 알려진 후 나는 제적을 당해 쉬고 있었던 학교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날 11월 3일, 지금 생각하면 할수록 웃기는 당시 모습이지만 그만큼 유신독재가 얼마나 허약한 지경에 이르렀었냐는 것을 알려주는 한 장면이 되지 않을까? 아직 이십 대 중반 나이였던 내게 툭하면 달라붙어 다니던 담당형사가 있었다. 나이 스물 대여섯인 내가 알면 뭘 알았겠으며 하면 또 무슨 일을 꾸몄겠나? 모두 독재의 허약함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날 이른 아침부터 집을 찾아 온 형사가 ‘오늘 하루는 집에 있어야만 한다’며 내 집 앞을 지키고 있었다. 장난기가 동한 나는 그를 설득했었다. ‘대통령이 떠나시는 역사적 날인데 함께 구경 한번 갑시다. 내가 뭐 형님 따돌리고 도망을 가겠소. 누굴 만나기나 하겠소. 그냥 조용히 함께 장례 구경이나 하고 옵시다. 같이 집에 있었다고 보고하면 끝 아니오? 언제 이런 구경 한번 하겠소.’

그렇게 나섰던 신문로 사거리 풍경에 나는 절망했었다. 내 마음 속은 축제의 날이었건만 거리를 가득 메운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룬 사람들은 마치 제 부모를 잃은 양 통곡을 하고 있었다. 마치 이야기로만 들었던 고종황제 국장을 보는 듯했다.

내게 서울의 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삼월, 복교가 된 학교로 돌아갔다. 당시 학교 영자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었다. ‘학생은 학생으로서, 선생은 선생으로서 모두 제 자리에서 제 할 일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마지막 남은 일년 대학생활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돌아간 학교였다.

3월 하순부터 학교는 들끓고 있었다. 4월 사북 탄광 노동항쟁 소식으로 그 열기는 더해갔다. 5월 들어 이런저런 흉흉한 소식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5월 13일 가두시위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5월 15일 서울역 광장 회군으로 알려진 그 날부터 나는 도망자가 되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언론은 온통 사기질이었다.

돌이켜 볼수록 내가 한 일이라곤 부끄럽기 짝이 없을 정도로 거의 아무 것도 없었다. 성명서 몇 번 쓴 일, 후배들 앞에서 몇 차례 내 의견 표현을 한 일이 고작이었다. 무슨 투철한 이념으로 무장한 혁명투사 또는 새빨갛게 물든 빨갱이는 커녕 그저 좋은 세상,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 꿈꾸며 사는 지극히 평범한 이십 대 청춘이었다. 나이 들어 이제 그 세상의 크기는 점점 작아져 이젠 ‘내가 만나는 사람들 만’이라도 하는 지경이 되었다만…..

그리고 6월 어느 날, 아주 건장한 몸집의 사내 예닐곱명이 내 작은 몸을 까만 세단차에 꾸겨 넣었다. 그렇게 끌려 간 곳이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백열등이 환한 밀폐된 조사실이었다. 건장한 사내 셋에게 완전히 발가 벗겨진 내게 한 사내가 권총으로 내 왼쪽 가슴을 툭툭 겨누며 말했다. ‘너 같은 놈 하나 죽여 파묻어도 아무도 묻지 않는 세상이야!’ 그렇게 치도곤이 시작됐었다.

내 기억 속 그해 서울의 봄이다.

아직도 나는 무지개가 뜨면 홀리곤 한다. 좋은 세상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는 생각으로.

전두환과 그 무리들 보다 못한 윤석열 패거리들이 발호하는 뉴스들을 보면서도 내가 희망을 놓지 않는 까닭이다. 비록 아직도 답답하긴 하다만, 1979년 11월 3일 그 신문로 사거리의 국민들이 자각한 민중 또는 깨어 있는 시민으로 놀랄만한 변화를 이룬 것을 보면 희망은 서서히 이루어져 왔고 또 그렇게 이루어 질 것이다.

다만 그 때 보다 더욱 추해지는 언론 환경은 가히 혁명적 변혁을 요구하고 있다만.

옛 생각하며 영화 ‘서울의 봄’을 보러 가야겠다. 그리고 옛날 처럼 조용히 윤석열 패거리들을 몰아내자는 피켓 하나 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