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 교회에서 마주친 그가 건넨 말, ‘그러지 않아도 세탁소로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이 해 넘기기 전에 밥 한끼 꼭 합시다.’. 내 대답, ‘뭘 다 바쁜데… 감사하고요. 해 바뀌는 게 뭐 그리… 그래요, 언젠가 한 번 뵙죠.’
오늘 낮에 그가 내 세탁소를 찾아와 나를 끌어 근처 식당에서 밥 한 끼 하며, 지난 이 십 수년 동안 서로가 살아 온 이야기 나누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 동문 모임에서 였을게다. 워낙 그런 모임과는 연이 먼 내가 그 무렵 몇 번 참석하곤 했을 때다. 그는 당시 동문회장이었고, 필라델피아에서 미주 동아일보를 발행하고 있었다.
그 때가 아마 20세기가 막 문 닫을 즈음이었으니 이십 사 오년 전 쯤일 것이다. 이민 와서 한 십 여년 세탁소일에 파묻혀 살다 보니, 먹고 사는 일에 좀 자신감도 붙었고 일에 지치기도 했던 내가 헛바람 들어 동네 일 앞장 서던 때였다.
그러다 어찌어찌 그가 하던 신문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 일에 빠지기 시작했었다. 내 어릴 적 꿈을 이룰 기회일 듯도 싶었다. 정말 웃기는 이야기지만 한국에서 오늘날 뉴스 포탈의 첫 선구자는 바로 나 아니었을까?(누구에게나 허풍 섞인 소설이 있듯) 1979년 그 한 해 내가 했던 작업이었다. 당시만 해도 전국에 일간지라고 해 보았자 사 오십을 넘지 못했다. 그 모든 일간지들 한 달치를 정리하는 책을 발간하는 출판사를 운영했던 내 푸르렀던 스물 중반이었다. 신문의 행간을 읽는 내 노력에 당시 내노라 하던 언론인들이 매달 추천사를 이어 주시는 관심도 받았었다.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그 때의 흔적들을 보면 얼굴 후끈 달아 오르는 부끄러움 뿐이지만.
아무튼 논설위원, 주필 등으로 그 신문에 글을 쓰다가 이런 저런 까닭으로 그와 헤어져 주간신문사를 운영하였었다. 점점 헛바람이 단단히 불어 내 능력 밖 일을 벌이다가 그만…
몇 년 동안 고생 엄청 했었다.
그도 바뀌는 세상을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사이 병이 들어 그 신문사를 접었고, 필라를 떠났었다.
그리고 오늘 그의 이야기를 듣고 안 일이지만 팔 년이 되었단다. 그가 우리 동네로 이사해 내가 적을 두고 있는 교회에 나온 지 벌써 그리 되었단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성실한 주일 교인이 아니라서 일 년에 서너 차례 얼굴 내미는 이른바 ETC(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교인이다. 아마 지난 일요일 성탄 예배 참석은 올들어 내가 한 첫 교회 나들이였을 게다.
아직 팔순에 이르지도 않은 그와 그의 아내는 건강이 그리 좋지 않은 편이다. 그가 오늘 내게 건넨 말들이다. “우리가 이 교회에 오고 처음에 당신 얼굴은 안 보이고 권사님(내 아내)만… 해서, 혹시 나 때문인가? 걱정도 했었고….”, “내가 죽기 전에 김회장에게 미안하고 고맙다는 인사는 꼭 한 번 해야 되는데…. 하는 생각으로… 오늘…”
나는 그에게 대답했다. “장로님! 뭔 말씀을… 전 장로님께 정말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는 오늘도 옛날처럼 나를 ‘김회장’이라고 불렀다만, 나는 그의 옛 호칭인 ‘선배님’ 이나 ‘사장님’이 아닌 ‘장로님’으로 그를 대했다.
내 ‘고맙다’는 인사는 내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난 진심이었다. 내가 신문을 할 때 썻던 글들은 날카로웠었다. 내 글의 대상이 되었던 누군가는 매우 아팠다는 이야기들을 종종 들었었다. 심지어 글 때문에 소송을 당한 적도 있었고, 칼침을 놓겠다는 협박을 받았을 때도 있었다. 그게 또 당시 내 자랑이었다.
신문을 접고 난 후, 모진 고통 속 시간을 보낸 뒤에 내가 쓰는 말과 글들은 삶에 대한 감사, 이웃에 대한 고마움 등으로 바뀌었다. 상대도 대중이라는 다수가 아닌 ‘내가 마주 대하는 단 한사람만 이라도’ 로 바뀌었다. 나는 그런 내 변화에 대해 정말 크게 감사하며 산다. 신의 모습으로 내게 다가온 사람들 덕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그도 그 중 하나였다.
나는 그런 시간의 흐름들을 이야기하며 그에게 말했다. “이게 다 장로님 덕입니다.”
그가 헤어지면서 말했다. “해 넘기기 전에 내 소원 다 풀었네. 참 고마워요! 김회장.”
그와 헤어진 뒤, 세탁소 도와주는 이들에게 가게를 맡긴 후 아내와 함께 어머니와 장인 장모 계신 곳을 찾아 한 해를 보낸 감사 인사를 드렸다.
생전에 매사 ‘감사하다’를 잇던 어머니와 ‘고마워’를 자주 말하시던 장모가 우리 내외에게 던지신 말씀. ‘그래, 그래 또 한 해 감사다!’, ‘고마워요, 고마워, 우리 한울이가 애도 낳고…’
성탄 연휴 책 한 권 읽으며 보냈다. 비엣 타인 응우옌(Viet Thanh Nguyen)이 쓴 장편소설 ‘동조자(The Sympathizer)’다.
나는 베트남에 가본 적도 없고, 베트남 역사에 대해 깊은 지식도 없다. 다만 베트남 통일에 대한 관심이 조금 있는 편이어서 지난 세기 베트남이 겪은 세월에 대한 이야기들은 제법 읽었다 할 수도 있다. 특히 월남이라고 부르던 남베트남이 망한 1975년 4월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또렷하다.
그 무렵 아직 열혈청년이었던 나는 베트남식 통일에 대한 막연한 기대도 있었다. 그 때 나는 논산 훈련소 수용연대에 있었다. 보통 징집된 병력들은 그곳에서 사나흘쯤 대기하다가 피복과 장비들을 수령한 후 훈련소로 가기 마련이었는데, 나는 그 곳에서 꽉찬 한 달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입대할 때 입었던 옷을 한 달 동안 입고 있었으니 그 옷이 오죽했으랴!. 나중에 그 옷을 받아든 어머니는 한참을 우셨단다. 나는 그곳에서 몇 차례 보안사의 심문을 받았었다. 하여 그 사월과 오월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이즈음 내 가게와 인접한 네일 샵의 주인인 리와 종업원 피터와는 가깝게 인사하며 지낸다. 모두 사십 대 베트남계 미국인들이다. 내가 나이들었다고 ‘썰, 썰(Sir)’이라고 부르는 그들에게 그냥 ‘영’이라고 하라고 했더니 요사이는 ‘미스터 김’으로 고정 되었다.
여기까지가 베트남 하면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의 전부다.
소설 ‘동조자’는 분명 베트남과 베트남인들의 이야기인데, 소설은 내게 전혀 낯설지 않은 내 아버지 세대와 내 세대 나아가 내 아이들 세대의 이야기처럼 다가왔다.
소설의 첫 문장이다.
<나는 스파이, 고정간첩, CIA 비밀요원, 두 얼굴의 남자입니다. 아마 그리 놀랄 일도 아니겠지만 , 두 마음의 남자이기도 합니다.>
프랑스인 신부(神父)를 아버지로 십대 초반 어린 나이 베트남 여인(?)을 엄마로 하여 태어난 주인공 ‘나’는 이야기 내내 이런 모습을 유지한다. 두 얼굴의 남자, 두 마음의 남자로.
이야기의 무대는 1975년 남베트남 패망 또는 베트남 통일 시점부터 1979년 사이 베트남과 미국, 필리핀, 태국 등이다.
그런데 전혀 낯설지 않게 우리들의 이야기로 다가온다. 다만 시점은 뒤죽박죽인 채로. 마치 1920년 이후 오늘까지 어쩌면 우리들의 미래까지 겹쳐지는 한반도를 무대로 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읽으며 포스트잇을 붙여 기억하고픈 대목들 중 몇 개.
<비극은 옳음과 그름이 아니라 옳음과 옳음 사이의 갈등이었고, 이것은 역사에 참여하고 싶은 우리 중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딜레마였습니다.>
<나는 흰색이 단순히 순수나 순결과 관련된 색상만은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애도와 죽음의 표시이기고 했습니다.>
<심문은 정신적인 것이 맨 먼저이고, 육체적인 것은 그 다음이야. 여러분은 신체의 멍이나 어떤 흔적을 남길 필요조차 없어. 언뜻 납득이 잘 안되는 소리처럼 들리지, 안 그래? 하지만 사실이야. 우리는 실험실에서 그걸 입증하느라 지금껏 수백만 달러를 썼어.> – CIA 미국 고문관의 말
<그들은 나한테는 예쁘지 않았지만, 그녀에게는 예뻤습니다.>
<내가 그의 아픈 곳을, 양심이라는 명치를 쳤고, 그곳은 모든 이상주의자가 상처 입기 쉬운 부분이었으니까요. 이상주의자를 무력하게 만들기는 쉽습니다. 이상주의자에게 자신이 선택한 특별한 전투의 최전방에 가 있지 않은 이유를 묻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다는 사실 자체였습니다.>
<대개 우리가 스스로를 보는 방식과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는 방식이 똑같지 않은데도, 우리는 거울에 비친 우리의 모습이 진짜로 우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문장.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걸고, 이 한가지 약속을 지킬 것을 맹세한다.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몇 해 전 먼저 세상 뜨신 장광선선생을 떠올리게 한 대목.
<여러분께 제 ‘아메리칸 드림’이 무엇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아메리칸 드림’은 죽기 전에 내가 태어난 땅을 보는 것, 다시 한번 떠이닌(서울 아님 내 장모의 고향 정주, 그도 아님 장선생의 고향 장흥)에 있는 우리 집안 정원의 나무에서 잘 익은 감을 맛보는 것입니다. 제 ‘아메리칸 드림’은 조부모님의 무덤에서 향을 피울 수 있게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그토록 아름다운 우리 나라가 마침내 평온해지고 총성이 환호성에 가려 들리지 않게 될 때 온 나라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제 ‘아메리칸 드림’은…… 전쟁에 대해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남자 아이들과 여자 아이들이 큰소리로 웃으며 노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책장을 덮고 바라 본 하늘은 2023년 성탄을 안고 저물고 있었다.
자그마치 2023년이 지났는데 얼마나 더 가야할까? 내가 볼 수 있는 세상은 어디까지일까?
어머니와 딸. 한국전쟁 통에 가족의 반을 잃은 어머니는 기지촌의 아픈 기억을 안고 백인 남편의 고향 미국 서부 아주 보수적인 시골 마을로 이민을 온다. 아버지가 다른 오빠와 함께 한국에서 ‘튀기’로 놀림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 딸은 어머니를 따라 온 미국 땅에서 ‘노랑이 혼혈’ 이민자 취급을 받고 자란다. 오빠는 그래도 ‘한국에서 받은 차별 보다 여기(미국)가 낫다’는 생각을 드러내곤 한다.
꿋꿋하게 새로운 삶에 적응해 나가던 어머니에게 정신병(조현병 調絃病, Schizophrenia)이 찾아온다. 어머니가 정신줄을 놓았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을 돌아보는 딸의 기록이다.
<수십 년이 지난 후 나는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며 이 순간을 내 한(恨)의 시발점으로 여기게 된다. 한이란 “불의에 대한 풀리지 않는 억울함”이자 “맺혀서 풀리지 않는(…) 멍울”, “응어리진 비통함을 가리키는 번역 불가능한 한국어다. 한은 지속되는 트라우마에 대한 인식, 그것이 풀리지 않는 상태를 지칭할 뿐 아니라, 그 풀이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딸은 어머니의 죽음을 세 번 맞는다. 어머니가 정신병이 들었을 때, 어머니가 기지촌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리고 마지막 어머니가 육체적 죽음을 맞았을 때이다.
딸은 어머니의 첫번 째와 두번 째 죽음을 사회적 죽음이라고 이르면서 그 죽음의 원인를 쫓아간다. 그 이야기를 담은 책 <전쟁 같은 맛>은 한(恨)을 곱씹듯 아리고 쓰리다.
딸이 그 죽음의 원인을 쫓다가 토로하는 단말마(斷末魔)이다. “진실은 너무나도 복잡했다.”고.
어머니와 딸의 교감 통로는 음식 만들기와 식탁이다. 4부 15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새로운 부가 시작될 때마다 그 부에서 이야기하려는 내용을 대신하는 인용문을 소개한다.
제4부를 여는 인용문 중 일부이다. <우리는 이 식탁에서 아이를 낳았고, 부모를 묻을 준비를 했다. 이 식탁에서 우리는 기쁨으로 노래하고 슬픔으로 노래한다. 고통과 후회의 기도를 올린다. 감사를 드린다. 어쩌면 세상은 식탁에서 끝날는지도, 우리가 울고 웃으며 마지막 달콤한 한 조각을 베어 무는 사이에.>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내 가족들을 생각하며 눈물 여러 번 찔금 흘렸다. 삼팔선을 넘은 것은 달랑 오누이 뿐이었다. 전쟁이 나자 오빠는 고향을 찾아 간다며 어린 누이를 지인에게 맡기고 군에 입대한다. 그리고 감감무소식 행방불명이 되었다. 어린 누이를 맡겨 놓은 곳은 접경지역이었던 기지촌 인근. 천만다행으로 어린 나이에 미군 부대에서 일하던 이웃 청년 어머니 눈에 들어 신랑 만나 해로하셨던 내 장인 장모.
아직 다 지우진 못한 우리 내외와 아이들의 이민생활 응어리, 음식 대접하고 나눠 주시길 즐겨하셨던 어머니 역시 당신이 살아계심을 증명코자하는 몸짓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기 까지…. 그리고 이즈음의 아버지 식탁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생각이 겹쳐.
딸이자 책의 저자인 그레이스 조가 강단에 서서 학생들에게 묻는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의 개념인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라는….게 무슨 뜻인지 기억나는 사람?’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설명.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란 무력으로가 아니라 문화적 신념이나 실천으로 규범을 규제하도록 설계된 제도를 말해요. 경찰이나 군대 같은 ‘국가기구’는 무력으로 사회를 규제하죠. 반면 언론이나 학교 같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는 생각을 통해 규제해요.”
양공주, 국제결혼자, 이민자, 정신병자 등등 규제되어 버린 생각의 틀에서 정형화되어 따돌림 당하는 예들일 것이다.
이쯤 다시 쓸모있음에 대한 생각들.
그저 내가 사는 곳에서 오늘 부딪치는 일들에서, 어떤 분야에서 건 간에 내 생각의 틀을 옥죄어 나를 통제하려는 힘에 대항하고 항거하고 싸워 이겨 나가는 일, 바로 쓸모 있는 일 아닐까?
몇 해 전 어머님 돌아가셨을 때에도 눈물 나오지 않아 이젠 눈물샘 말랐구나 했었다. 헌데 그게 아니었다. 주말 사흘 눈물 질금질금 흘리며 보냈다.
영화 두 편과 소설 한 권을 읽으면서다. 기자다운 기자(記者) 이상호가 만든 영화 전투왕, 이즈음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서울의 봄’과 그레이스 조가 쓰고 주혜연이 번역한 책 <전쟁 같은 맛>들이다.
영화 전투왕은 기자 이상호가 반란 수괴 전두환을 서른 해 넘게 쫓아다닌 기록과 함께 ‘왜?’ 그가 그리 행동했는가를 그린 영화이다. 이상호가 쫓은 것은 전두환 개인이 아니었다. 전두환이라고 일컬어지는 하나의 큰 세력의 본색을 드러내고자 하는 쫓음이었다. 영화 속 이상호나 현실의 이상호나 오늘도 여전히 큰 벽에 가로막혀 마치 그의 기자 노릇이 허망한 듯 여길 수도 있겠다.
영화 속에서 이상호는 연세대 정문 앞에 놓인 이한열 표석을 설명한 뒤, 이한열 열사가 쓰러진 몇 발작 뒤 당시 그가 도망치듯 서 있던 자리를 지적하며 ‘여기엔 도망자의 표석을 세워야…’라며 아픈 마음을 표한다.
평생 기자다운 기자로 살아가는 정말 쓸모 있는 기자 이상호의 시작은 이한열 죽음의 뜻을 품기 시작한 때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자칫 허망할 듯이 이어져 온 그의 몸짓들이 정말 쓸모 있는, 기록될만한 기자 정신이었음을 기릴 날이 곧 올 수 있기를…
다른 시간, 같은 장소에 서 있었던 추억이 겹쳐 몇 차례 눈물 찔금.
그리고 영화 <서울의 봄>.
왜 필라 나들이만 하면 날이 이리 궂은 지! 영화를 보고 내려오는 길,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비가 쏟아져 자꾸 나이 탓을 하며 내려왔다.
영화는 영화일 뿐.
지나치게 전두광과 이태신이라는 인물 중심으로 흐른 영화적 상상은 자칫 당시 쿠데타 세력과 동조세력, 그리고 눈치 빠르게 권력에 기생하는 집단을 묘사하는 데는 조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태신의 마지막 대사. “넌 대한민국 군인으로도, 인간으로도… 자격이 없어.”
이 영화를 만든 이가 뱉고 싶은 말 아니었을까?
쓸모없는 인간에 대한 규정!
눈물 흘릴 구석 없는 영화인데 두 차례 찔금 찔금.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
그리고 소설 <전쟁 같은 맛>
이 이야기는 길게 써야 마땅하겠다만 단지 “쓸모”에 대하여.
저자 그레이스 조의 어머니가 삶이 무너져 가는 순간에 던진 “이젠 쓸모없다.”라는 한 마디를 되새기는 대목이다.
<여러 해에 걸쳐 나는 무엇이 엄마를 쓸모 없다고 느끼게 했는지. 그 원인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해줄 작은 조각들을 모으고 또 모았다. 사람이 아닌 사물 취급을 받으며, 엄마는 당신 삶이 쓸모 없다는 메시지에 둘러싸여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건 주변사람들이 한국 사회가 심지어 당신의 가족이 보낸 메시지였다. 엄마는 한국을 탈출했지만 미국 사회에서도 당신이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쓸모없다’던 엄마를 통해 ‘쓸모 있는 삶’에 대한 학구적 노력을 하게 된 주인공 이야기에 시간과 공간을 많이 겹쳐 살아온 내 생각으로 여러 번 찔금 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