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에 갇힌 유대인 집단이 신을 재판에 회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들은 신을 잔혹함과 배신으로 기소했다. – 중략- 그들은 신의 유죄를 선고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랍비가 신의 유죄와 사형 선고문을 발표했다. 그런 후 눈을 들어 재판이 끝났다고 말했다. “이제 저녁기도 시간입니다.”> – 카렌 암스트롱의 <신의 역사>에서
노동절은 공식적으로 여름이 끝나는 날. 그 공식적이라는 말을 비웃듯 따가운 햇살이 내려 쪼이는 기록적 더위가 이어진 연휴였다.
여러날 찔끔찔끔 책장을 넘기던 카렌 암스트롱의 <신의 역사> 정독를 마치며 연휴를 보냈다. <축의 시대>, <마음의 진보>에 이어 읽은 그녀의 세 번째 책인데 이번에도 진하게 남는 말 한마디 ‘compassion’이다. 역자는 이를 ‘동정심’이라고 했다만 카렌이 그 말에 담고 있는 의도는 사랑, 자비, 공감, 연민 등등의 말을 녹여내어 쓴 말 같다.
읽다가 혼자 실없이 낄낄거린 대목이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제 머릿속 생각의 크기만한 신을 믿고 산다.”는 이젠 굳어진 내 고집을 더욱 공고히 한 것이었는데 바로 이 대목이다. -<아일랜드의 사도 성 패트릭의 유명한 기도문 구절. ‘신이 내 머리와 내 이해 안에 있게 하소서.”>
올해 팔순인 카렌 암스트롱과 비슷한 연배의 내 선생이자 신앙의 선배이며 내 삶 속에서 만난 숱한 인연들 가운데 묵직한 끈으로 이어진 이가 있다. 호주에 계신 홍길복목사님이다. 무엇보다 사십 년 함께 살아 온 아내와의 연을 맺게 된 탓(또는 덕?)의 빌미를 제공한 이가 그였으며, 비록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은 참으로 짧았지만 그로 인해 내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신앙의 선생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 들어 가며 꾸는 꿈이 하나 있었다. 사오 십 년 전, 아내와 내 친구들이 십대 이십대 였던 나이에 삼십 대 청년이었던 홍목사의 설교를 들었던 시절을 다시 재현해 보는 꿈이었다. 그저 단지 꿈일 뿐이었다. 다들 그렇겠지만 나 또한 그 때의 신과는 사뭇 다른 신과 이야기하며 지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는 호주에 나는 미국 시골에 아내와 내 친구들 역시 고향 신촌을 다 떠나 있을 터. 그저 꾸어 보는 꿈이었다. 이른바 헛 꿈.
아직은 그런대로 정정하게 누워 계신다만 아흔 일곱 아버지 덕에 먼 길 나들이 나설 엄두가 나질 않았는데 이런저런 연유로 서울 나들이를 작심한 것은 몇 주 전일이었다. 그리고 아마 그 이틀 후 였을 게다. 홍목사의 서울 나들이에 맞추어 옛날 그 친구들이 고향 신촌 그 교회에서 함께 예배를 드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아뿔사! 우리 내외 일정과는 맞지 않았다. 목사님과 우리 내외 일정이 겹치는 시간은 단 이틀 뿐이었다. 목사님께 아쉬움을 전하는 소식을 드리자 그가 전해 온 말이었다. “이틀 중 시간 조율해서 서울서 한번 만납시다.어쩜 이제 부터의 만남이란 늘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말이죠.”
그리고 오늘 아침 아직 신촌을 지키고 있는 옛 친구가 전해 온 말. ‘교회와 여러 삶의 사정으로 인해 홍목사님을 모시고 드리는 예배는 일정이 바뀌었다.’는 소식. 그 바뀐 일정은 바로 목사님과 우리 내외 일정이 겹치는 이틀 중 하루.
해가 따갑고 뜨거워도 여름은 이미 아니다. 가을 볕이다. 그 볕에 이틀 간 널어 둔 호박이 정말 잘 말랐다.
- 작고 마른 모습이야 타고 난 것, 그게 내 삶을 버텨 준 또 하나의 힘이었는 지도 모를 일이고. 그래도 머리카락은 까매서 그 또한 누리는 복이다 했는데… 엊저녁 느긋한 마음으로 거울 앞에 서니 며칠 사이(?) 반백이로세.
- 제 아무리 백세 시대 운운해도 이젠 신의 은총을 곱씹어야 할 나이. ‘compassion’과 함께. 무릇 “사랑, 자비, 공감, 연민, 동정심”이란 함(행위)이 뒤따라야 한다는 …
바른 늙음을 위하여. 은총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