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햇살은 여전히 따갑지만 마른 바람 불고 기온도 뚝 떨어져 바깥 일하기 참 좋은 날이었다. 오전에 그리 땀 흘리지도 않고 잔디 깍고 뜰 일을 하였는데 만 이천보를 넘게 걸었노라고 셀폰 앱이 알려준다. 어찌 보면 참 이상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오후엔 오랜만에 뜰에 나가 앉아 책을 읽었다. 새소리, 바람소리, 요령소리 들으며 책 속에서 노니는 일은 내가 누리는 사치 중 하나이다.

손에 들고 미처 책장을 덮지 못했던 임철규 선생이 쓴 <죽음>이었다. 이 책을 손에 든 계기는 책을 소개하는 글 때문이었다.

<저자 임철규 명예교수가 ‘죽음’이라는 주제로 이 책을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2009년 5월 23일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의 자살이었다. 2009년 당시에도 이미 칠순의 나이였던 저자는 봉하마을 영전에서 그를 위한 글을 바치겠노라고 약속하고, 방명록에 “아름다운 죽음”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1939년생인 저자가 지금의 내 나이 즈음에 쓴 글이다.

저자가 책머리에 소개한 <나는 이 책에서도 ‘죽음’이라는 주제를 문학, 역사, 신화, 신학, 철학, 정신분석학 등, 여러 영역에서 넓게 조명했다.>는 말처럼 이 책은 죽음에 대해 천착했던 많은 이들의 생각들을 소개하고 있다.

내가 읽으며 가장 많이 밑줄을 그으며 음미했던 곳은 제4장 ‘기억, 망각, 그리고 역사 – 아우슈비츠, 그리고…’이다.

밑줄 그었던 한 대목이다.

<역사는 한때 일어난 사건이다. 기억은 한때 일어난 사건이 현재의 개인이나 집단에 하나의 ‘흔적’으로 남아 있는 것을 말한다. 현재의 개인이나 집단에 일종의 역사의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 기억의 본질이라면, 깊은 상처로 남아 있는 기억의 ‘흔적’, 그 ‘트라우마’는 어떤 형식으로든 치유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즈음 마주하는 뉴스들을 생각하며 곱씹게 된 대목이었다.

그러나 저자가 이 장(章)을 마감하는 마지막 문장은 내가 수긍할 수 없었다.

<치유되지 못한 역사의 비극과 더불어 내면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기억의 폭력성은 인간의 역사를 계속 비극으로 끌고 갈 수 밖에 없다. 역사의 카타리시스는 없다.>라는 것이었는데, 저자가 ‘기억’과 ‘망각’을 지나치게 대립적 언어로 이해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 때문이었다.

이 책 마지막 문단에 나오는 문장들이다.

<지금껏 우리는 ‘죽음’이라는 벅찬 주제를 접근이 가능한 하나의 문제로 다루었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죽음은 ‘문제’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중략- 죽음은 ‘문제’가 아닌 ‘신비’의 영역에 속한다.  -중략- 죽음은 산 자가 전혀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신비’ 그 자체다.>

<우리의 직접적인 경험의 대상인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삶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더 ‘현명한 것’인지 모른다. 삶을 알려고 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벅찬 일이 아닌가.>

암만! ‘오늘’인 것을.

좋은 날, 잘 쉬었다. 내일은 월요일, 나는 또 손님들 빨래하러 세탁소로 나간다. 감사함으로.

살며, 기억할 것은 기억하고 잊을 것은 잊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