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아버지날 아버지를 뵙다. 누워지내신 지 두 해 하고도 반년이 지났다. 신기하기도 하지, 욕창 하나 없이 얼굴은 아직도 맑으시다. 다 내 누이들 공덕이다.

“어 왔구나!”. 짧은 인사를 건네시는 아버지 얼굴이 환하다.  드믄드믄 건네시는 말, “이젠 내가 할 일이라고는 즐겁고 감사하게 마지막 시간 기다리는 일….”

그리고 채 십분이 지나지 않아 불편함을 토로하시는 짜증. 아무렴 내 아버지는 아직 건강하게 살아 계시다.

아들과 사위, 딸 며느리의 아버지날 전화 인사를 받다. 두어 주 후에 다들 오겠단다.

잔디를 깍다. 나는 아직도 Riding Lawn Mower가 아닌 내가 밀고 다니는 잔디 깍기 기계를 쓴다. ‘운동 삼아…’하는 내 말은 진심이다. 잔디 깍는 날이면 족히 만보는 걷기 때문이다. 물론 이즈음 잔디 깍는 날이면 ‘Riding Lawn Mower를 사야지…’하는 유혹에 빠지곤 한다. 하여 나는 아직 건강하게 살아있다.

아내에 대한 첫 기억은 내가 고등학교 이학년 때의 일이다. 아내는 중학교 일학년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알고는 있었다만 남는 기억은 그 때이다. 그렇게 한 동네, 한 교회에서 자랐다.

그리고 세월 흘러 아내가 한 여자로 내게 다가온 것은 그녀가 대학 삼학년 때였다.  당시 나는 백수(白手)였다.

몇 년, 짧다 할 수 없는 아슬아슬한 연애기간을 거쳐 결혼해 예까지 왔다. 그렇게 결혼 후 쌓인 세월이 또 사십 년이다. 하여 영원할 것 까진 없지만 오늘은 온전한 동지다.

2023년 아버지 날에 내가 누리는 축복이다.

아쉬움을 품지 않고 저무는 삶이 얼마나 되겠느냐만, 이제라도 후회를 되씹어야 하는 시간을 보내지는 말진저.

하여 또 꿈을 꾼다.

그렇게 읊조려보는 정희성의 시 한편.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무릇 부부, 가족, 동지(同志)란 다 그렇지 않을까? 아니 그래야만 하지 않을까?

뒤적여보니 40년 전 우리 내외도 푸르렀었다.

*글라디올러스 꽃망울 맺힌 날에

평화 그리고 말씀에

필라델피아 아트 박물관을 찾은 건 거의 스무 해 만이다.  ‘언제 왔었더라….?’ 그 기억을 되찾는데 한참 걸렸다. 그 때는 박물관 구경이었고, 오늘은 박물관 앞 계단에서 <윤석열 탄핵 촉구>를 외치기 위함이었다.

늘 그렇듯 이민사회에서 이런 모임 머리 수는 늘 소수다. 우리 내외가 아직도 그런 소수들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어 참 좋다.

간만에 만난 후배가 모처럼 제 자리 찾아가는 듯 했던 <민주평통자문회의>가 다시 보수화 되어가는 상황을 말하며 안타까워 했다.

그 기관에 대한 관심이 애초 없는 편이지만, 그래도 후배들이나 다음 세대들이 보이는 평화와 통일에 대한 관심과 행동에 대해 늘 박수를 아끼지 않는 내게 그의 안타까움이 크게 다가왔다.

그러다 떠올려 본 돌아가신 홍근수 목사님 그리고 그의 말씀 하나.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검을 주려고 왔다.(마태 10: 34)” 다른 곳에서는 칼이라는 말 대신에 ‘불’ 또는 ‘분열’을 일으키려 왔다고(누가 13: 49-51)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칼이나 불이나 분열은 모두 같은 뜻으로 폭력적 분쟁이나 갈등, 또는 전쟁을 의미하는 말들입니다. 예수의 이 선언은 확실히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거리낌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의 말입니다.

예수가 도대체 무슨 의도에서, 무슨 뜻으로 이렇게 말했는가를 물어 보아야 합니다. 그가 의미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정의에 근거하지 않는 평화란 정글의 상태일 뿐으로 그러한 상태는 평화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태여 평화라면 가짜 평화일 뿐입니다. 그런 가짜 평화가 지배하는 곳에 예수의 진정한 평화의 복음이 선포될 때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분열과 싸움이 일어날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정의가 없는 곳에 평화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유가 없는 곳에 평화가 없습니다. ………중략…….

법, 질서, 안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면서 불평불만과 저항을 강압적 수단으로 억압하여 사회를 조용하게 만드는 것, 그것을 평화라고 선전하고 있으나 실상 그것은 평화가 아닙니다.

예수의 해방과 정의 복음은 곧 이러한 가짜 평화에 도전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해방과 정의의 복음, 사랑과 평화의 복음이 처음으로 전파되는 곳마다 칼, 분열, 싸움이 일어났고 혁명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홍근수 목사- 예수의 복음 위에 굳게 두 발 딛고 서서 통일과 평화 운동 맨 앞 열에 서 계셨던 분. 아마 살아 계셨다면 윤석열 일당을 향해 예수의 검을 내리치셨을 터.

서울 법대 출신인 그를 생각하니 그 학교가 매양 무식, 무지, 무능 위에 비겁, 야비, 파렴치를 겸비한 윤석열 양아치 패거리들만 배출한 것은 아닌 듯.

언제나 굳건히 변함없는 후배를 위하여!

투쟁에

종종 한국뉴스들은 아주 먼 낯선 나라 이야기처럼 다가오곤 한다. 허긴 떠나온 세월이 있으니 어쩌면 그것이 아주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다.

그 먼 거리의 간격을 좀 좁혀보려는 생각으로 몇 권의 책들을 구해 읽고 있다. 그 중 하나, 시민운동가 안성용이 쓴 <한국에서의 정치 투쟁>이다.

이른바 87년 체제의 시작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제 6공화국 시기에 있었던 대선, 총선, 지선 등 모든 선거들의 결과와 선거를 전후한 상황과 민심, 정당과 시민사회 등의 당시 모습들을 잘 정리해 준 책이다. 그가 말하는 정치투쟁이란 곧 선거투쟁이다.

내가 온전히 겪지 않았던  시절들의 이야기라 비록 알고 있던 것이라도 이해의 깊이를 더해 주었고,  특히 교육과 입시제도의 변화에 대한 정리와 소개는 오늘의 한국사회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뜨문뜨문 접하는 이즈음 한국뉴스들은 87년 체제 곧 제6공화국를 끝낼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굳게 하였었는데 저자 안성용은 이를 강하게 주창하고 있다.

<제7공화국 수립의 때가 왔다. 평등, 평화, 생태가 시대정신이다. 절대다수 대중을 위한 제 7공화국을 세울 때가 됐다. 위기는 새로운 대응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 새로운 정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그는 몇 가지 실천과제들을 제시한다.

그의 꿈들이 이뤄지길 빈다.

다만 체제의 변화, 그것을 혁명이라 부르든 개혁이라 부르든 그 변화의 시작은 정당이나 정치에서 비롯되지는 않는다. 그의 말마따나 “자각한 대중의 투쟁이, 거리에서, 새로운 미래를 여는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지”만 언제나 큰 변혁의 시작은 거리에서 시장에서 광장에서 자각한 대중이 만들어 내는 법이다.

지금이 바로 그럴 때다. 올바른 선거투쟁을 하기 위한 진정한 투쟁의 때이다.

책장을 덮은 오늘이 마침 6월 10일이다.

낯섦에

사흘 째 낯설게 붉은 빛으로 다가오는 아침 해를 마주한다. 그리고 온종일 잿빛 하늘과 때론 타는 냄새와 함께 다가오는 탁한 공기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사흘 째다.

이런 날씨가 하루나 이틀 정도 더 이어질 것이라는 일기 예보다.

캐나다에서 일어난 산불 탓 이라는데, 그 산불의 규모가 가히 한반도 크기를 태우는 정도란다.

뉴스는 대기 오염 지수가 상당한 오염 단계에 이른다며 특히 노인들,  심장이나 폐질환 환자들은 조심하고 집 안에 머물라고 권고 한다.

제기랄! 딱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노인 나이에 심장과 폐에 이상이 있다는 가정의의 소견에 따라 전문의의 처방을 앞두고 있는 내가 무시할 수 없는 권고였다.

흐흐흐… 하며 혼자 작은 웃음을 웃다. 노인, 심장, 폐… 어느날 문득 나와 가깝다며 찾아 온 말들이다.

곰곰 따져보니 살아 온 모든 걸음걸음 마다 만난 것은 낯섦이었다.

그 낯설음을 벗 삼아 여기까지 이른 세월 돌아보면 그저 감사 뿐.

*** 사흘 전 아침 내 뜰에서 노니는 여우와 사슴들을 보며 순간 든 생각이었다. “참 좋다.” 놈들이 망쳐 놓는 내 작은 텃밭의 작물과 화단의 꽃들은 잠시 잊고.

무릇 모든 아침은 낯설어야 좋다.

새 시작

살며 ‘사’짜로 끝나는 직업군들은 만나지 않고 살았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물론 직업적으로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내 바람일 뿐, 사람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일테면 판, 검사, 변호사, 의사, 박사, 목사 따위들을 말하는데, 다시 되뇌이지만, 그 직업으로 다가오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지  그 직업군에 속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판, 검사나 변호사를 일로써 내가 만나게 되는 경우란 없어야만 백 번 좋은 일이다.  물론 소시민적 삶을 사는 내게 해당하는 말이겠다만. 의사도 마찬가지다. 아프지 않으면 만날 필요가 없다. 박사 역시 다를 바 없다. 내가 학문하는 사람이 아닌데 무슨 전문 분야의 박사를 만나 시간을 보낼 특별한 까닭도 없다. 목사 역시 마찬가지다. 머리 굵어 제 생각 가질 나이를 먹은 후 신과 내 사이의 연결 고리로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버린 지 오래 되었다.

살다보니 내 가까운 가족들 가운데도 그 ‘사’짜 직업군들이 여럿 있게 되었다만 그들 업의 특성 때문에 그들과 이야기 하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바램은 여전하다.

그 바램은 여전하건만, 제 바램 대로 사는 삶이 어디 있겠나?

한 동안 꽤나 피곤 했다. 난 그게 당연한 일로 생각했다. 봄철 이후, 생업의 강도가 생각보다 조금 심했기도 했고, 인력 문제도 있었고, 무엇보다 나이 탓도 있었을 것이다. 하여 그 피로는 아주 당연한 일로 생각했었다.

그러다 달 포 전, 정기 검진을 받으러 간 가정의(醫)로 부터 들은 말이었다. “심장에 좀 문제가 있어요. 정밀진단을 받아야겠어요.”

며칠 전 정밀진단 결과를 알려 주는 가정의의 말이었다. “심장판막에 문제가 생겼어요. 이젠 심장 전문의를 만나셔야겠어요.”

그렇게 심장 전문의와 약속을 잡아 놓고 이틀 여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오늘, 여느 일요일과 다름 없이 잔디를 깍고 물을 주고, 한 주 만에 꽃이 핀 열무를 ‘아뿔사’하며 거두어 김치도 담으며 환한 웃음을 짓다.

“에고, 이 눔아! 나이 따라 가는 게야~ 싫어도 의사 자주 만날 나이가 된게지!” 그 한마디 머리 속에 떠올리며.

곰곰 따져보니, 그저 감사한 일이다. 이 나이 먹도록 상용하는 약 하나 없거니와 그 흔한 바이타민 제대로  먹어 본 일도 없었으니 이젠 의사와 친해져도 불평할 일은 전혀 없어야 마땅할 일.

늦은 밤, 읊조려 보는 말, “그래 이젠 진짜 노년이다. 새로운 시작이다.”

나만에.

운동에

1.어느 공동체에 속한 이들의 삶을 뿌리 채 흔들어 바꾸는 현상을 무어라 일컫든 그 변화의 주인공은 언제나 그 공동체를 떠받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일컬어 민이라 부르던 민중이라 부르던 시민이라 부르던 사람살이 큰 변화의 중심 축은 언제나 그들이었다.

문제는 언제나 그들이 옳는 것 만도 아니고, 그들이 주인공이라는 역할도 깨닫지 못할 때가 더욱 많지만, 그렇다 하여도 사람살이 진일보의 큰 걸음 뻗쳐 내디딜 때면 그 공동체의 밑바탕을 이루는 이들이 중심이었다.

사람살이를 바라보는 내 믿음의 잣대다.

2. 하루 노동을 마치고 돌아와 지친 내 피로를 풀어준 것들 – 쉴 곳 찾는 작은 새들의 소리와 내 눈길을 사로잡은 새 생명들이다. 따지고보면 다 내 게으름과 아둔한 탓일 뿐 사계절 어느 순간에도 새 생명을 잉태하고 낳는 움직임은 끊이질 않는다.

3.그리고 운동에 – 거창할 것 하나 없다. 지금은 이런 노래 따라 읊조려 보는 게 바로 운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