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革命)에

사흘 내리 비가 내린다. 그 비 덕에 모처럼 차분하게 바로 앉아 책 한 권에 빠졌다.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Karen Amstrong)이 쓴 <축의 시대>다.

‘위대한 변화(The Great Transformation)’라는 책 제목을 ‘축의 시대(Axial-Age)’로 번역한 역자(譯者)의 생각이 그럴 듯 했다.

인도, 중국, 그리스, 이스라엘, 중동을 오고 가는 약 3600년 전부터 2000년 전(이슬람교 생성까지 조금 다루었으니 서기 600여년 까지 연장 한다면) 아주 오랜 옛날 약 이 천 여년  동안 사람살이 생각의 변화를 이야기 한 책인데 그야말로 흥미진진하다.

그 때로 부터 멀리는 3600년이 지났고 가까이는 1400년이 지난 오늘, 2023년 사람들의 생각이 그 때로 부터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책이기도 한데 참 재밌다.

아주 짧게 몇 문장으로 기술(과학)의 혁명을 이야기하는 최근 200년 동안의 변화 곧  ‘제2의 축의 시대’를 소개하는 것을 빼고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살이 크게 변한 게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한 책이다.

그 오래 전에 사람들의 생각(철학, 종교 등)이 사람 답게 바뀌어 사람살이 축을 바뀌게 한 결정적 요인은 바로 “공감” 곧 ‘사람에 대한 공감’, ‘이웃에 대한 공감’ 또는 ‘약자에 대한 공감’이라고 나는 읽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기억” 곧 사람살이 되새김 (저자는 ‘자기비판”이라고 명명했다만) 이 오늘을 사는 내게 필요하다는 가르침이다.

무엇보다 책을 읽으며 이즈음 뉴스들에 답답한 가슴을 뻥 뚫리게 하는 시원함을 맛보았다.

사람살이 답답해 보여도 결국 옳은 길로 나아가게 마련이다. 그게 역사, 곧 사람살이다. 그 역사(歷史)를 역사(役事)하는 신을 믿고 살아가는 내 삶을 부추이게 하는 책이었다. 책을 덮으며 기쁜 마음으로 카렌 암스트롱(Karen Amstrong) 그녀의 책 <마음의 진보>를 주문하다.

내리 사흘 내리는 비가 앞 뜰 꽃잎들을 다 떨꾸었다. 꽃을 피우는 나무들은 유세를 떨며 제 존재를 알린다만, 사철 푸른 나무도 조용히 새 순 돋아 옷을 갈아 입는다.

혁명(革命)에.

찔레꽃

노래꾼 장사익이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뜰 일을 하다가 생각났던 내 할아버지 그리고 찔레꽃.

소리꾼 장사익의 노래를 만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처음 그의 소리를 듣던 날부터 이제까지 나는 심심찮게 그를 즐기곤 한다.

내 할아버지는 평생 양복이라곤 입어 본 적 없으신 한량이셨다. 겨울철 솜 두둑히 넣은 한복과 두루마기, 여름철 베와 모시 적삼 할아버지의 옷들, 그 수발은 오로지 내 어머니의 몫이었다.

반주(飯酒)로 30도 소주 한 병과 고봉밥을 드셨던 내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상극(相剋)이셨다. 아버지는 그 사이에서 늘 어정쩡 하셨다.

내가 머리 굵어진 후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할 무렵부터 아버지는 질색을 하셨고, 어머니는 할아버지 꼭 빼 닮은 놈이라고 하셨었다. 할아버지는 ‘넌 누구 닮아 그리 몸이 약하냐?’며 당신과 다른 나를 보며 혀를 차곤 하셨다.

그 할아버지 마지막 여정을 온전히 함께 하셨던 어머니와 아버지, 거의 오십 년 전 일이니 그 때 무슨 노인 시설이나 병원 신세를 꿈이라도 꿀 수 있었겠나? 생각수록 난 어머니 아버지의 흉내 조차 못하고 살아온 것 같다.

그리고 내 할아버지. 한 잔 술에 얼큰 하셔서 두루마기 자락 툭툭 어깨 춤 가볍게 덩실 거리시며 한자락 소리 뽑아 내시던 이, 나는 장사익의 소리를 들으면 늘 내 할아버지 생각이 떠오른다.

오늘, 뜰 일을 하며 장사익이 부르는 찔레꽃을 따라 흥얼거렸다.

“하얀꽃 찔레꽃/ 순박한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놓아 울었지/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밤새워 울었지

아- 찔레꽃처럼 울었지/ 찔레꽃처럼 노래했지/ 찔레꽃처럼 춤췄지/ 찔레꽃처럼 사랑했지/ 찔레꽃처럼 살았지/ 찔레꽃처럼 울었지/

당신은 찔레꽃/ 찔레꽃처럼 울었지”

내 뜰은 이제 노란색에서 붉은 색으로 옷을 갈아 입는 중이다.

장사익은 찔레꽃을 노래하며 울음을 사랑으로 바꾸어 놓는다.

내 어머니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더욱 사랑으로 다가오는 밤이다.

오늘은 4월 16일, 아픔을 사랑의 투쟁으로 바꾸며 오늘을 사는 이들을 생각해 보는 밤이다.

내가 참 좋아하는 자연을 노래하는 철인 소로우{Henry David Thoreau)의 혁명적 명성을 일깨워 주는 조국의 <법고전 산책> 몇 장을 넘기며.

찔레꽃에.

4.16.23

*** 처음으로 개나리 꺾꽂이를 하며 깨달은 사실 하나, 개나리 가지속은 대나무처럼 비어 있다는… 도대체 난 뭘 알고 살아 온건지?

봄 밤

돌이켜 보는 봄은 늘 추웠다.  

매캐한 최루 연기와 투석, 내 젊음에 대한 기억은 매우 추웠다.

청년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 이민의 봄 역시 추위의 연속이었다. 헛헛함에서 오는 추위였다.

이쯤 이르러서야 내 뜰에 찾아 온 봄의 온기를 느끼는 작은 여유를 누린다.

그 한 줌 여유로 오늘도 추위 속에 봄의 온기를 꿈꾸며 사는 뛰어난 사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밤.

그의 밤에도 결코 춥지 않은 봄이 어서 빨리 오기를 빌며.

그의 생각을 읽는 봄 밤에

4.14.23

사랑 그리고 예수쟁이에

성실한 교인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만 스스로 예수쟁이라고 여기며 사는 내게 매우 강력한 매혹적 언어로 다가온 책, <포기할 수 없는 약속>을 받아 들고 책장을 넘기는 저녁이다. 사실 원제보다는 부제가 내 맘을 끌었었다. <세월호, 그 곁에 남은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34년째 안산 화정교회 목사로 살아오며 4.16목공소에서 세월호 엄마 아빠들과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박인환 목사는 ‘하나님이 물으신다면’이라는 글에 이런 경험담을 남기고 있다.

<”목사가 왜 이런 정치적인 일을 하느냐?”며 눈을 부라리는 장로도 만났고, “박목사, 아직도 세월호야? 이거 언제까지 하려고 그래 목사가 목회 해야지”라고 책망하는 선배 목사도 만났다. 서명을 받아 달라는 나의 부탁에 “세월호 가족들이 정치세력과 야합해서 돈을 더 많이 받으려고 그런다는데…”라며 곤란해 하는 후배 목사들도 여럿  보았다.”>

아직도 세월호와 함께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몇 번 쯤은 엇비슷한 질문을 받아보지 않았을까?

성서한국 사회선교사인 박득훈이 소개해 주는 윤후명의 시 <사랑의 길>을 몇 번이나 곱씹으며 읊조려 본다.

<먼 길을 가야만 한다./ 말하자면 어젯밤에도/ 은하수를 건너온 것이다./ 갈 길은 늘 아득하다./ 몸에 별똥별을 맞으며 우주를 건너야 한다./ 그게 사랑이다./ 언젠가 사라질 때까지/ 그게 사랑이다.>

그리고 동혁이 엄마 김성실의 기도다.

<그렇게 살기로 했다./ 인간의 소관이 아닌 일에 자책하며 분노하던 것에서 돌아서/ 그동안 멈췄던 사랑을 다시 해보기로 했다./ 악쓰고 우느라 돌보지 않았던 남은 가족들을 돌보기로 했다./ 여전히 우리는 진실을 알아야 하고 현실은 답답하지만/ 잃었던 웃음을 되찾기로 했다>

그래! 사랑이다.

포기할 수 없는 약속을 믿으며 손 맞잡고 때론 어깨 걸고 울고 웃으며 늘 아득한 먼 길 걸어가는 그게 사랑이다. 가다가 비록 스러지는 별똥별 하나 되더라도.

사랑 그리고 예수쟁이에.

정의에

한때 마이클 센델(Michael sandel)이 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일대 유행을 탓던 시절이 있었다. 그 유행 따라 나도 책을 사서 읽었었다.  그 책은 철저히 미국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한국에서 유행했던 일이 조금 이해 되면서도 이해 안되었던 기억이 있다.

그 책의 원제는 <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이다.  직역하자면 <정의 : 해야 할 옳은 일은 무엇인가?>이다. 물론 이 책에서 마이클 센델은 정의(正義, Justice)가 무엇인지를 정의(定義, definition)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책의 말미에서 정의(正義, Justice)를 이해하는 세 가지 접근법을 말하면서 그 중 그가 선호하는 방법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찰하는 것”이라고.

어제 부활주일 나는 몹시 바쁜 하루를 보냈었다.

철이 철인지라 내 생업이 조금 바빠 이른 아침부터 가게에 나가 밀린 일들을 정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와 장인, 장모 묘소를 잠시 둘러 보며 부활절 인사를 드렸다. 오지랖 넓게 벌려 놓은 집 뜰 흙놀이에 빠졌다가 시간되어 부랴부랴 필라로 올라가 필라델피아 촛불행동 집회에 함께 했다.

어제 함께 했던 스물 남짓한 이들 모두 나와 엇비슷한 일상을 살고 있는 이들일 게다.

너나 없이 먼 거리를 달려와  비록 짧은 시간이나마 함께 모인 까닭은 바로 ‘오늘 공동선(善)을 생각하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응답을 외쳐 보자는 뜻 때문이었다.

뜻 맞는 이들과 함께 하는 즐거움은 생각보다 늘 크다.

거창하게 ‘정의’ 운운하며 치장하지 않아도 ‘내가 하는 일’에 부끄럼 없이 옳다는 뜻 하나만으로  누리는 기쁨이라니!

정의에.

희열에

달포 전 늘그막 동무가 선사해 주어 심었던 무궁화 묘목에 붉은 꽃망울이 맺혔다.

순간 내 온 몸과 맘으로 느낀 즐거움과 기쁨이라니! 호들갑일 수 없다. 살아 숨 쉬는 것에 대한 감사요, 그저 살아있기에 아름다워야만 하는 오늘에 대한 희열이다.

2023, 부활절 전야에.

** 봄이 떠나기 전에 늘그막 동무와 함께  어릴 적 맘으로 조촐히 한 잔 나누는 즐거움을 누려야겠다.

다시 아픈 사월

필라세사모 벗들 가운데 한국현대사를 깊게 공부하신 이가 추천해 주어 여러 해 전에 읽었던 책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를 다시 꺼내 들어 책장을 넘겨본 밤이다.

제주 시인 허영선이 전해주는 <제주 4.3> 이야기를 읽다보면 한(恨)이 어찌 쌓이는지, 그 쌓인 한이 가슴을 어찌 매이게 하는지, 그 사월의 처절한 아픔이 내 것이 된다.

그 사월을 겪어내며 일본으로 피신해 살았던 시인 김시종은 그 사월을 이렇게 읊는다.

<내 자란 마을이 참혹했던 때,/ 통곡이 겹겹이 가라앉은 그 때/ 겨우 찾은 해방마저/ 억압에 시달려 몸부림치던/ 그 때,/ 상처 입은 제주/ 보금자리 고향 내버리고/ 제 혼자 연명한/ 비겁한 사나이/ 四.三이래 六十여년/ 골수에 박힌 주문이 되어/ 날이면 밤마다/ 중얼거려온 한 가지 소망/ 잠드시라/ 四.三의 피여/ 귀안의 송뢰되어/ 잊지 않고 다스리시라/ 변색한 의지/ 바래진 사상/ 알면서도 잊어야했던/ 기나긴 세월/ 자기를 다스리며/ 화해하라/ 화목하라

흔들리는 나무야/ 스스로 귀 열고 듣는 나무야/ 이렇게 아무 일 없이 뉘우침 흩날리며/ 봄은 또다시 되살아 오는구나.> – 김시종의 시 <사월이여 먼 날이여> 중에서

허영선이 이 책의 마무리 글에서 한탄하며 남기는 말이다.

<살기 위해 이 땅을 떠나 일본으로 향하던 이들, 그들은 떠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캄캄하고 불안한 항로, 똑딱선을 타고 가며 얼마나 떨었는가. 쓰는 내내 그 시국을 살아내야 했던 그 해의 눈빛들이 떠올랐다. -중략-

이것이 인간의 이야기인가. 수십년 동안 슬픔을 슬픔이라 말하지도 못했던 그들의 입을 대신해 이러한 방식으로 밖에 쓸 수 없었다. 이 광범위하고 거대한 비명을 어떻게 다 전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제 2023년 사월.

자유민주주의라는 헛된 구호로 오직 제 뱃대떼기 불리기 바쁜 도둑떼들이 판치는 다시 아픈 사월 소식들을 보면서….

그래도 한풀이 희망을 품고 또 살아가야 할 터. ‘제주 섬의 봄날이 그냥 그대로의 봄날이 되는’ 그 날까지.

다시 아픈 사월에.

삽질


어제 저녁 델라웨어주 남부를 휩쓸고 지나간 토네이도로 목숨을 잃은 이가 있다는 소식과 함께 전하는 신문 기사 내용이다.

바람에 집이 날아가 버린 이의 이야기란다. 이웃 도시에서 주말 저녁식사를 즐기던 중 이웃의 전화를 받았단다. “당신의 집이 다 날라가 버렸어요!.” 그녀는 이웃이 전하는 다급한 목소리가 만우절 농담인 줄 알았단다. 그렇게 모든 것이 사라졌단다. 회오리 바람으로.

그 여파로 간밤 내내 바람이 심하게 불더니만 내 뒤뜰 만개한 꽃들과 함께 나무가지 하나 부러져 땅에 누운 채 아픈 아침 인사를 보냈다.

원치 않는 아픔을 겪지 않고 사는 삶이 어디 있겠느냐만, 대개 그 아픔을 낫게 하는 힘은 더불어 함께 그 아픔을 나누는 이들에게서 비롯되지 않을까?
이어지는 신문 기사 내용들이 그랬다. 그 아픔을 함께 하는 이들의 소식들.

바람이 채 잣지 않아 쌀쌀한 이른 아침부터 온 종일 삽질을 하며 지냈다. 뒷뜰 소나무와 전나무 뿌리를 덮는 복토 작업과 잔디 평탄 작업을 위해 흙과 더불어 놀았다.

삽질을 하다가 문득 떠오른 아주 오래된 옛 일 하나. 군대 말년이었던 시절이었으니 46년 전 일이다. 예비사단 말딴 보병들의 봄 가을은 노역의 계절이었다. 해 마다 이맘 때나 가을이면 전곡 일대 야산에서 벙커 작업을 하곤 했었다.

말이 벙커 작업이지 나나 우리 부대원들이 하는 일은 산 밑에서 산 위에까지 자갈이나 시멘트 아니면 뗏장을 등짐으로 나르는 일이었다. 아침 먹고 서너 번 등짐지고 산을 오르락 내리락 하다 보면 점심 때가 되었고 똑같은 오후를 보내곤 했었다. 그야말로 막 노가다였는데 그렇게 보낸 내 젊은 시절 삼년에 대한 안타까움은 아직도 아리다.

아무튼 말년이었던 나는 적당히 눙치고 산 아래 막사에서 뒹굴 수 있는 방법은 많았으나 그저 등짐 지고 산을 오르고 내리는 일이 맘 편해 ‘시간아 가라’하며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 때 상병 둘이서 이병과 일병 세 명을 엎드려 뻗쳐를 시켜 놓고 이른바 빠따를 내려 갈기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니, 왜들 그래?” 나는 상병들에게 물었다. 그들의 대답이었다. “아니 다들 세 번 째 올라가는데 이 눔들이 요령 피면서 두 번 째 잖아요, 그래 군기 잡느나고….”

그 말에 내가 왜 그리 화가 치솟았는지는 지금도 잘 모를 일이다만 , 나는 그 때 그 상병 두 놈들에게 심한 욕설을 퍼부었고 ‘그런다고 사람을 때리냐?’며 그들 손에서 몽둥이를 뺏어 그들에게 몇 차례 빠따를 쳤었다.

군대 생활 뿐만 아니라 내 평생에 누군가를 때려 본 유일한 경험일게다. 내게 매를 맞은 두 상병들은 배 타고 기차 타고 군에 온 울릉도 출신이었다.

그리고 곧 나는 제대를 했고 이듬해 제대를 한 그 상병들이 내게 연락을 해 왔었다. “우리 고향 구경 시켜 드릴게요. 저희가 매 많이 맞아 봤는데요. 김상병님(나는 까닭없이 꽉찬 만기제대 상병이었다) 매는 정말 간지러웠다구요. 마음은 쪼매 아팠지만…” 아무렴 내 몸의 두배는 족히 될 건장한 이들이었으니….

그렇게 나는 그들 덕에 아직 개발단계에 들어서지 않았던 원초적 울릉도의 아름다움을 만끽했었다. 그들이 작살로 잡아 온 생선회와 물질로 따온 열합(홍합)으로 지은 열합밥 등등… 영화 속 어느 바닷가도 그 해 울릉도 바다보단 아름답지 못했나니, 내겐.

삽질하다 떠올린 옛 삽질 생각으로 그저 웃으며 흙과 노닌 하루였다.

멀리 뉴저지까지 올라가 세월호의 아픔을 함께 하는 오늘 내 참 좋은 이웃들과 함께 하지 못한 미안함으로 하루를 접는 밤에.

참으로 터무니 없는 삽질을 전하는 뉴스들이 넘쳐나지만 모든 삽질이 부질없는 일은 아닐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