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실천)에

브라질 교육학자 파울루 프레이리(Paulo Freire)라는 이름과  그의 책 “페다고지”(Pedagogy of the Oppressed ; 피억압자의 교육학) 그리고 그가 강조했던 말 ‘프락시스(praxis)’는 내가 젊었던 시절 선생님들께 많이 듣고 고민했던 추억이 되었다.

생각과 일 곧 뜻과 함이 일치되는 삶의 행태를 일컬어 ‘프락시스(praxis)’라는 프레이리의 사상은 70년대 젊음을 보낸 내 또래들에게 우상이었다.

그리고 어제 늦은 밤, 철학자 강신주 선생의 책 ‘철학이 필요한 시간’의 책장을 넘기다 만나게 된 다산 정약용의 가르침으로 예나 지금이나 함(행동) 없는 뜻(도덕 또는 윤리 아님 정치 사회적 구호 등)이 얼마나 헛된 것임을 되씹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할 때 ‘측은지심’이 생겨도 가서 구해주지 않는다면 그 마음의 근원만을 캐들어가서 ‘인(仁)이라 말할 수 없다.” – 사람의 본성이 제 아무리 착하고 어질고 정의롭고 등등 선한 말들로 치장한다 하여도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행위가 따르지 않는다면 뜻이 없다는 정약용선생의 가르침이란다.

내가 아직도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이들의 행렬 제일 꽁무니에 서서 함께 뒤쫓아가는 일이나, 떠나온 땅이지만 언제나 고향인 모국이 진정 사람사는 세상으로 진보해 나아가는 일에 깃발든 이들을 뒤쫓는 까닭이랄까.

비록 부끄러울지라도 흉내라도 내며 살 수 있음에 그저 감사!

봄, 2023

며칠 비가 내리더니 내 뜰에 그 비 타고 봄이 내려 앉았다. 이른 아침엔 쌀쌀 하더니만  삽질 몇 차례로 이내 땀이 배는 봄이다.

여름에 꽃피는 구근들과 나무 몇 그루를 심었다.

이렇게 누리는 오늘 하루가 참 좋고 감사하다.

오늘을 감사할 수 있음을 나는 성서로부터 배웠다. 내가 배우고 이해하는 한, 성서는 철저히 오늘 내가 서 있는 세상을 이야기한다. 하여 어떤 조건이든 오늘을 누릴 수 있음은 그저 감사이며 은총이다.

저녁 나절,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이 오늘의 한국 현실을 고뇌하며 발표한 성명이 내게 은총으로 다가온 까닭이다.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 – 1974년 내 젊음을 뜨겁게 달구던 이름 가운데 하나다. 그 이름이 이제 내게 은총으로 다가섰다.

감사와 은총은 언제나 행동으로 이어지게 마련.

밭 가는 이들의 봄은 땅을 뒤엎는 일부터 시작할 터.

봄이다.

그믐달

아침 일터에서 만난 그믐달에 잠시 홀렸었다. 그 잠깐 사이에 스치듯 지난간 세월들, 자그마치 서른 세 해다.

언제 이 일터의 아침 그믐달에 취했던 적이 있었던가?

일터 한 켠엔 오랜 공사를 마친 아파트의 아침이 열리고 있다.

그믐달이 어찌 딱히 저무는 뜻만 품으랴! 또 다른 시작을 예비하라는 전령인 것을.

동무에게

시간이 바뀌어 낮시간이 사뭇 길어진 날, 흙과 함께 놀았다.

비록 두 내외가 일구는 농원이지만 내겐 대농장 주인인 벗이 한 번 심어 보라고 건네 준 묘목들을 심었다. 매화, 무궁화, 배나무, 블랙베리, 오미자 등속들이다.

‘비록 작은 텃밭이지만 흙과 놀 때 잡념이 없어 참 좋다’는 내 말에 벗이 내게 건넨 가르침이다. ‘진짜 잡념을 없애려면 잡초를 뽑아! 그게 잡념 떨쳐버리는 지름길이지!’

오늘 흙과 놀다가 문득 그의 교훈을 되씹어보니 그게 삶의 진리였다.

곡식이든지, 푸성귀든지 아님 꽃이나 나무든지 일테면  그게 사는 멋 또는 맛이라고 한다면 그를 방해하는 잡초의 훼방은 얼마나 끈질기고 강하더냐!

그저 무심히 그 잡초 없애는 일을 동무 삼는 일, 그게 바로 흙과 진정 어울려 노는 일이 아닐까?

그 한 해의 동무 찾아 텃밭에 올해 첫 씨앗도 뿌렸다. 상추, 케일, 시금치, 고들빼기 등이다.

늘 함께하는 깨동무가 있다는 생각으로 걱정없이 씨뿌리는 하루 하루를 누릴 수 있기를…

벗에게 그리고 내게.

+

아버지의 일기

“젊은이들이 일본 군대에 끌려 가거나, 군수품 공장이나 탄광으로 보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던 중 마침내 나도 일본에 있는 탄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1943년 봄이었습니다.”

“배가 시모노세키 항구에 닿자 우리 일행을 인솔하던 일본인들의 태도가 싹 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부산항을 떠날 때만 하여도 상냥했던 그들은 매서운 눈초리로 우리를 감시했고 말투도 갑자기 사나워졌습니다. 우리 일행은 그들의 감시를 받으며 후쿠오카에 있는 탄광으로 가서 석탄 캐는 일을 시작했지요. 나는 그곳에서 숱한 동포들이 힘겨운 중노동에 시달리며 혹사를 당하는 것을 보았고, 이내 그들과 함께 나 또한 힘에 붙이는 중노동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나는 그 혹독한 생활 속에서 오직 그 곳을 빠져나올 궁리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날 그들의 눈을 피해 결사적인 탈출에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일장춘몽이었습니다…..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 그 탄광으로 되돌아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조국 해방 소식을 들은 지 두 달쯤 지나 그리던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몇 해 지나지 않아 일어난 전쟁으로 나는 군에 입대했습니다…. 1951년 6월 2일 새벽에 김화(金化)지구에서 있었던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팔과 다리에 수류탄 파편을 맞고 야전 병원으로 후송되었습니다…. 그 전쟁통에 첫아기였던 귀염둥이 딸이 죽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이에 큰딸이 된 둘째 아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다니던 대학의 부속병원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한국에는 해외로 진출하려는 사람의 수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였고, 내 큰 딸도 해외 진출에 뜻을 두고 아무 연고조차 없는 생소한 땅인 미국으로 떠났답니다.”

“그리고 곧이어 대학에 다니고 있던 하나 뿐인 아들이 긴급조치법 위반으로 경찰에 끌려가 곤욕을 치루는 것을 보며 벙어리 냉가슴 앓듯 말조차 못하고 가슴만 조였지요.  그 당시 자식이 그렇게 된 것을 보며 그저 가슴 아파하기만 했던 부모가 어디 한둘일까마는 나는 그 때 큰 딸이 미국으로 훌쩍 떠난 지 얼마 안되는 데다가 아들마저 영어의 몸이 된 사실에 얼마나 서글펐던지 모른답니다.”

1996년에 내 아버지가 당신의 회고 일기로 펴낸 책 ‘한울림’에 담겨 진 이야기들이다.

아버지 속 꽤나 썩였던 아들이 모처럼 자식 노릇 한답시고 그 책 만드는 일을 도와 드렸고 제법 크게 아버지 칠순잔치로 동네 잔치도 벌렸었다.

그 때만해도 칠순이 잔치가 되었던 시절이었다.

내가 이제 그 나이에 이르렀으나… 여전히 나는 잔치 생각은 꿈도 못 꾸는 그저 철없는 아이다.

어제 오늘 한국 뉴스들에 분기탱천 하다가 넘겨 본 아버지의 오래 된 일기다.

망집(妄執)에

망상으로 일어난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고집하는 일 곧 망령된 고집을 일컬어 망집(妄執)이라 한다.

누군가의 망집은 반드시 이웃들에게 파문을 일으키게 하기 십상 이거니와. 자기 스스로가 무너지는 가장 큰 까닭이 되는 법이다.

뿐이랴! 그 망집으로 하여 남들에게 자신을 꼴 사납게 내보일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 나아가 공동체 이웃들을 망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법이다.

제 분수를 모르는 이들, 또는 아둔함과 과욕이 그 망집을 부르곤 하는 법인데, 문제는 그 공동체에서 제일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놈들이 이런 망집에 빠지기 십상이라는 게 지난 사람살이 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다.

사람에 대한 생각이 깊이 성숙하지 못한 놈들이 권력이나 돈에 환장하여 망집에 빠지면 그 사회는 아수라(阿修羅) 세상으로 변하는 법.

이즈음 한국 뉴스를 보며 드는 생각이다.

생각할수록 기괴한 윤석열, 김건희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을 내세워 제 뱃속 챙기기 바쁜 오랜된 망집에 사로잡힌 욕심에 사로잡힌 때론 선량해 보이기까지 하는….

마침내 사는 세상을 아수라판으로 만드는…

그 망집에 빠져서는 안될 일이기도 하고, 사는 날까진 그 망집과 싸울 수 있어야.

사는 것처럼 살다 가는 일.

경칩에

지난 삼 년 기승을 부릴 때도 잘 넘어 갔건만 이젠 막판 이라고들 하는데…. 아내가 덜컥 그 떠나가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만나 열흘간 고생을 하였다. 이젠 코로나 바이러스는 독감처럼 우리와 함께 가려나 보다.

아내가 털고 일어난 날, 나는 나무 묘목 몇 그루를 심었다.

겨우내 계획했던 일로 특별한 능력이나 경험도 없거니와 이렇다할 취미도 없고 더하여 넉넉하게 부를 쌓아 놓지도 못한  내가 이제 본격적으로 맞이하게 된 노년의 첫 걸음이었다.

아무리 백세 시대라고들 하지만 그게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누린다들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그 나이에 이를 수 있는 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 그저 여기까지 이르러 다만 몇 년 앞날을 준비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신에게 넘치는 감사를 드려야 마땅할 터.

그 맘으로 목련, 백일홍, Redbud 그리고 수국 몇 뿌리를 심었다.

내 노년의 봄, 경칩에.

암만…

암만 생각해도 참 신기한 일이다. 정말 어릴 적 일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시절을 다 겪어 보았다만 그야말로 말로만 전해 듣던 일제시대(日帝時代) 순사(巡査) 놀음 하는 놈들의 세상을 볼 줄이야…. 2023년 한국 뉴스로.

신기한 일을 보는 게 어제 오늘 일만은 아니지만… 해도 해도 너무 나간 듯.

마침내  놀음 짓에 빠진 놈들이 생각하는 무지렁이들 일어나  한 판 갈아엎는 세상 오지 곧.

암만 봄이 코 앞인데.

DSC01901 DSC01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