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Happy Thanksgiving!” –  아들녀석의 전화 인사를 받은 후 얼마 되지 않아 딸아이의 전화를 받았다.  “ Happy Thanksgiving!”

추수감사절 휴일에 칠면조를 굽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곰곰 생각해 보아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올핸 아들내외는 처가집에서, 딸내외는 시댁에서 명절을 보내게 되어 명절음식을 할 까닭이 없었다.

딸아이가 물었다. “엄마, 아빠 뭐해?” 내 대답, “할아버지에게 갔다가 할머니, 외할머니, 외할아버지한테 갔다 막 들어와서 이젠 낮잠 자려고 하는데…” 딸아이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아빠 엄마 푹 쉬어, 오늘은…”

그렇게 푹 쉬었다. 칠면조 굽지 않은 추수감사절 날에.

어머니와 장인 장모 묘소를 돌아보며 아내가 말했다. “죽어서 엄마 만난다면 어떤 모습으로 만나게 될까?” 내 대답, “아마 당신이 그리고 생각하는 모습대로…”

멀리 눈에 들어 온 어느 가족들의 모습을 보며 든 생각 하나.

‘비록 얼굴 맞대지 않아도 사랑으로 연 이어 있다면 거리의 이곳과 저곳 나아가 삶과 죽음의 간격조차 무의미 한 것 아닐까?’

사랑에!

*** 뒤늦게 딸아이가 보내온 사진 한 장. 멀리 시댁에 가느냐고 맡겨 놓은 애완견 dog sitter에서 보내온 사진이란다. 암만! 어디 사랑이 경계가 있겠느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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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 또는 명령에

“이것이 과연 인간인가?”

어제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이 10.29 참사에 대해 발표한 선언문의 시작은 바로 이렇게 시작된다. “이건이 과연 인간인가? 라는 물음으로.

선언문 끝 무렵에 이어지는 주문이자 명령이었다. “울어라, 울어야 한다! 사람을 위해.”

이 선언문은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올바른 시민의 길을 찾아 나아갈 것을 차분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명하고 있다.

성서에게 삶을 묻는 신앙인들에겐 바른 신앙인의 길을 걷도록 촉구하는 선언이다.

그 신앙인의 바른 길에 대한 본 회퍼 목사의 가르침.

<부활 신앙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피안’은 우리 인식 능력의 피안이 아닙니다! 인식론적 초월은 하나님의 초월과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한복판에서 피안적입니다. 교회는 인간적 능력이 실패하는 곳, 한계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 한가운데 있습니다.> – 본 회퍼의 옥중서간에서

“이것이 과연 인간인가?”라는 오늘의 물음은 곧 오늘 우리들(인간들)이 처한 현실에서 신이 어떻게 일할 것인가를 묻는 일.

선언문은 “모든 일이 다 잘 될 것입니다.” 거듭되는 약속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바른 신앙의 길, 깨우친 시민의 길을 걸어 갈 사람들(인간)과 신에 대한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희망일게다.

나도 그 희망을 믿는다.

작게는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참 인간, 참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하는 일이요, 멀리 참사를 겪고 아파하는 내 모국에서 인간의 길을 역행하고 있는 윤석열과 그 일파들을 타도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일에서 그 희망이 시작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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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 그리고 관점(觀點)에

호들갑스런 일기예보가 지나치지 않을 때가 있다. 어제만 해도 늦가을이거니 했는데 기온이 뚝 떨어졌다. 일기예보처럼 오늘 밤엔 얼음이 얼 모양이다. 이번 주말에는 첫 눈도 내릴게란다. 이렇게 계절이 또 바뀐다.

오후에 좀 걸을 요량으로 찾은 Longwood Garden 풍경은 이미 겨울이었다.

곳곳마다 사람 손 닿아 가꾸지 않은 데 없는 정원일지라도 그 역시 계절을 따라가는 법, 자연을 담은 바깥 풍경은 흔히 하곤 하는 말 그대로 춥고 스산하고 을씨년스럽기 까지 하였다.

허나 사람의 욕심이 어디 끝이 있겠나? 실내 정원은 사람들의 손길이 만들어 놓은 꽃들의 세상이었다. 더하여 시간이 아무리 한겨울로 치달아도 그 계절이 주는 희망을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또 한번 이렇게 바뀌는 계절의 길목을 아내와 함께 손잡고 걷는 시간에 대한 감사의 크기라니!


그리고 관점에 대하여.

해마다 이 맘 때면 한번씩 읊조려보는 시 한편,

Shel Silverstein이 고백하는 ‘관점(Point Of View)’이다.

<관점>

추수감사절 만찬은 슬프고 고맙지 않다
성탄절 만찬은 어둡고 슬프다
잠시 생각을 멈추고
칠면조의 관점으로 만찬 식탁을 바라본다면.

주일만찬은 즐겁지 않다
부활절축제도 재수 없을 뿐
닭과 오리의 관점으로
그걸 바라 본다면.

한때 나는 참치 샐러드를 얼마나 좋아 했었던지
돼지고기 가재요리, 양갈비도
잠시  생각을 멈추고 식탁의 관점에서
식탁을 바라보기전까지는.

<Point Of View>

Thanksgiving dinner’s sad and thankless
Christmas dinner’s dark and blue
When you stop and try to see it
From the turkey’s point of view.

Sunday dinner isn’t sunny
Easter feasts are just bad luck
When you see it from the viewpoint

Of a chicken or a duck.
Oh how I once loved tuna salad
Pork and lobsters, lamb chops too‘Til I stopped and looked at dinner
From the dinner’s point of view.


아주 오랜만에 주일예배를 드렸다. 목사님께서 던져 주신 물음 하나, ‘관점’이었다. 사람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으로 삶을 바라보며 감사를 놓치지 않는 하루 하루를 살 수 있기를 비는 말씀이었다.

‘하나님의 관점’을 곱씹어 내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난 아직 멀었나 보다. 내가 칠면조의 관점으로 사람들의 세상을 이해할 수 없듯,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과 나를 바라보는 잣대는 준비되어 있지도 않고 이번 생에서는 내게 허락치 않은 일일 것 같다.

다만, 내가 신을 고백할 수 있는 ‘관점’ 하나. 사람의 눈으로 사람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일, 그것 하나는 이루며 사는 삶이었으면 좋겠다.

그리 보면 칠면조의 관점도 하나님의 관점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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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온 종일 내린 비로 나무들이 겨울 준비를 마친 듯 하다. 떨어져 뒹굴던 나뭇잎들도 때를 아는 듯 스스로 몸을 오물여 움츠린다.

때 맞추어 뜰의 겨울 준비를 하다가, 비 그친 이튿날의 화창함에 넋을 빼앗겨 그저 멍청히 뜰의 풍경을 바라보며 오후 시간을 보냈다.

늦가을 오후 한 때 누린 내 자유(自遊)함에 대한 크나큰 감사를 누구에게 드릴까? 사람, 자연, 시간, 아님 신(神)…

스스로 노닐(自遊) 수 있는 날에 대한 감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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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하루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동네 어귀 소방서에 차려진 투표장에 들려 투표를 했다. 이 곳 출신 대통령 바이든의 중간 평가 운운들 하지만, 실제 이 곳 델라웨어의 이번 선거는 그야말로 지역을 위한 선거인 셈이다. 연방 차원의 선거는 하원의원 한 명 결정하는 것 뿐이니. 결과 또한 빤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

투표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구수한 고기 굽는 냄새가 저녁 허기를 부추겼다. 아내도 마찬가지였나 보았다. “먹고 갈까?”

그렇게 나쵸와 햄버거로 저녁을 때우고 돌아왔다. 그랬다. 밥과 국, 찌개 그리고 반찬들이 있어야 저녁상인데 햄버거는 그저 한 끼 때우는 것이었다. 그나마 거의 반 이상을 싸가지고 왔다.

분명 배는 부른데 저녁을 먹은 듯 하기도 하고 안 먹은 것 같기도 하다.

무릇 선거라는 게 그런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는 저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을 사는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라는 생각으로.

선거에.

 

놀이

시간이 바뀐 첫 하루는 꽤나 길다. 한 시간이 주는 여유를 만끽하며 놀이에 빠진 하루였다. 일과 놀이가 잘 어우러진 삶은 그야말로 축복이다.

-오전-

어제와 똑같이 눈을 뜨니 아직 새벽 시간이었다. 시간이 바뀐 까닭이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계획했던 놀이를 시작했다.

막 이민을 왔던 무렵이었으니 우리 내외가 아직 풋풋했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아내가 김치를 담아 보겠노라고 했었다. 아내는 열심히 긴 시간을 부엌에서 보냈다. 그 날이었던가 이튿날이었던가? 내가 아내에게 건넨 말이었다. “앞으로 김치는 사 먹는 것으로…”

그 날 이후 오랜 동안 집에서 김치를 담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세월 흘러 내가 놀이 삼아 김치를 만들어 보곤 했었는데 번번히 실패를 거듭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틈나면 김치를 담곤했다. 어차피 놀이였으므로. 이왕 즐기는 놀이라면 즐거워야 하는 법, 김치 깍두기 총각김치 물김치 갓김치 동치미 등등 흉내 낼 수 있는 일들을 즐겼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제법 그럴듯한 김치를 만드는 일도 일어나곤 했다.

오늘 오전 내 놀이는 조청을 만들고 고추장을 담는 일이었다. 밖에는 추적추적 가을을 밀어내는 비가 추적이고 있어, 내가 놀이를 즐기기엔 마치 주어진 듯 딱 좋은 날이었다.

그렇게 고추장도 담고, 내친김에 거둔 후 어찌할지 모르고 돌보지 않았던 늙은 호박으로 호박조청도 만들고, 덤으로 식혜까지 얻는 즐거움을 누렸다.

이 즐거움을 얻기까지 내가 내 놓아야 했던 대가가 있었으니 점점 가늘게 높아만 가는  내 목소리, 바로 세월.

-오후-

추적이던 비 그치고 가을걷이 끝난 밭들조차 아직은 풍요로와 보이는 가을 오후, 벗의 농장을 찾아 가 한 나절 또 다른 놀이를 즐겼다.

이 나이에 만나서 좋은 친구와 함께 한 잔 술에 좋은 먹거리 더하여 계절을 즐기며 이야기하며 노는 즐거움에 더 할 게 무엇이 있을까?

벗이 잘 키워 넉넉히 넣은 매실로 담근 매실주에 먹거리는 그야말로 우리네 입맛에 달라붙는 내 어릴 적 어머니 맛, 눈으로 즐기는 농장의 가을 정겨운 풍경은 덤으로 누렸던 놀이의 즐거움이라니!

뭐 이야기라야 별게 있어야 하나? 그저 덤덤히 늙어가는 우리들 이야기.

친구 내외와 우리 내외 모두 아직은 일과 놀이를 즐길 수 있어 아직은 청춘. 암만!

세월을 타고 즐기는 놀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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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 소식

1.  아침, 집을 나서는데 낙엽이 수북이 쌓였다. 눈을 들어 나무를 쳐다보니 이젠 힘들어 좀 쉬어야 갰다는 듯 큰 숨 내쉬며 마른 잎 몇 장 붙들고 있었다. 때 아니게 봄날 같은 아침이었지만 이제 곧 서리가 내릴게다.
오후에 낙엽을 긁어 치우다. 내 어릴 적에 낙엽 떨어지는 나무 한 그루, 그 낙엽 받아 안을 마당 한 뼘 없던 시절에 읽었던 피천득 선생의 수필 ‘낙엽을 태우며’였던가? 아마 맞을게다. 아직도 남아있는 그 아련한 부러움.
아하, 그 부러움을 미처 채우지도 못한 채, 어느새 낙엽을 긁으며 그 일이 노동이 되어 버린 때에 이르렀다.

2.  아무렴, 그 조차 어떠랴! 여기까지 온 것만 하여도 그저 감사인 것을.
그리고 일터에서 만났던 아침 하늘에 나르던 기러기들을 보며 떠오른 말, 안서(雁書).
안서 – 기러기가 전하는 소식(글), 곧 옛 중국 고사에 나오는 편지를 일컫는 말이다. 어찌 중국 고사 뿐이었겠나? 멀리 떨어진 그리운 사람들끼리 전하는 소식이란 무릇 오랜 시간이 걸렸던 때가 여러 천 년이었다.
그저 같은 시간에 미국에서 한국 사이에 소식 주고 받는 이즈음 같은 세상 열린게 따져보면 몇 년 지나지 않은 일이다.
안서- 그 기러기가 전하는 편지 만큼 절절한 기다림이 담긴 소식 전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가족 연인 군신관계 등등…
허나, 곰곰 생각해 따져보면 까닭 없이 ‘나라’라는 이름으로 부역 또는 전장에 군사로 끌려간 이들의 소식이 가장 절절하지 않았을까?
사람들의 머리가 깨우쳐 진다는 일이 뭐 별거이겠나? 기러기가 전하는 소식 말고, 사람이 서로 전하는 바른 소식 나누며 사는 세상 만드는 일.
허긴 이즈음엔 기러기 가족들도 많이 있고, 나 역시도 살아오며 한 동안 겪여 보았던 일이지만, 지나보면 다 추억이고 내일에 대한 약도 되는 일일 수 있는 법. 서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그러나 어느 날 날벼락 맞은 듯이 기러기도 소식 전하지 못하는 별천지로 서로 갈라진 가족들 소식 들으면 사람으로 아프지 않을 수 있나?
며칠 전 내 가게 손님 한 분이 아내에게 건넨 말이란다. “가족이나 친척 아님 아는 사람은 없지요?”
이태원 참사(이건 윤석열 참사라고 명명하자는 이들의 말이 맞다) 소식에 대해 미국 촌구석인 여기서 우리 내외가 들은 염려다. 이게 인지상정(人之常情) 곧 사람사는 마음이다.
허나 세월호 참사 때도 그러했듯, 사람 같지 않은 아귀들이 판치는 한국 뉴스들은 참 역겹다.
하아 참 쯔쯔쯧! 기괴한 모습의 윤석열과 김건희에게 느끼는 역겨움에 이른바 언론들은 늘 베이킹 소다를 더한다.
3. 그래도 또 나는 감사를 찾는다. 먼 듯 보이지만 어느 날 갑자기 기러기가 물어다 주는 소식, 세 세상이 곧 열릴 것이라는 믿음으로.
아내가 봄부터 노래 부르던 핑크 뮬리 몇 뿌리 뒷뜰 언덕배미에 심은 날에. 반갑게 맞을 기러기 소식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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