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聽松)

 <신촌 연세대 뒷산은 내 어린 시절의 놀이터였다. 매미와 잠자리들을 잡으며 놀다가 상감(어린 우리들은 학교 수위를 그렇게 부르곤 했었는데 거기에 마마를 붙여 상감마마라 부르기도 했었다. 일제시대에 쓰던 산감(山監)을 그리 불렀던 것이다.)에게 잡히면 호되게 곤욕을 치루기도 했었다. 1960년 대 초였으니 어느새 육십 여년 전 일이다.>

지난해 이즈음 어느 날 내 일기장에 남겨 둔 글의 일부이다.

대현동 쪽 간호대 기숙사에서 연대 후문에 이르기까지 포플러와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기병대처럼 자갈밭길 양쪽에 도열해 있었다. 그 후문을 들어서면 만나게 되는 곳이 청송대(聽松臺)였다. 그곳엔 말 그대로 소나무들이 그득했던 내 유년의 놀이터였다.

청송대(聽松臺) – 솔바람 소리 들리는(또는 듣는) 언덕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훗날 머리 굵어지고 나서의 일이었고, 그 이전에 내가 먼저 알게 된 이름은 청송당(聽松堂) 이었다.

청송당(聽松堂) 바로 솔바람 소리 들리는(또는 듣는) 집이라는 택호가 붙어있는 집터가 청와대 뒷산  북악산 기슭에 있는 내 모교 경기상업고등학교 교정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나무가 학교의 상징일 정도로, 학교 본관 앞에는 솔바람 소리 내는 동시에 사람 소리 듣는 모습의 소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종종 그 시절을 추억하는 일은 아픔이기도 하고 그 아픔을 몇 배나 덮을 만큼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잊고있었는데 개교 백 주년을 맞는다고 한다. 허긴 내가 졸업한 지가 오십 년 전 일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만났던 연세대 청송대. 내 유소년의 추억과 함께 청년의 꿈이 묻힌 곳이 되었다. 야외수업이 이루어진 곳인 동시에 젊은 축제의 현장이기도 하였고, 그 시절 은밀한 이야기를 숨겨놓은 곳이기도 하였으며 민주 통일 역사 하며 차마 손에 닿지 않는 속앓이를 끓였던 내 젊었던 일천 구백 칠십년대가 내 기억 속에 박제되어 있는 곳. 바로 청송대이다. 그 시절 그 곳에서 들었던 솔바람 소리는 기억나지 않는다. 소나무조차.

지난 해 이맘 때쯤 뒷 뜰에 세월을 먹고 웃자라 족히 삼사십 피트 크기가 넘는 나무들 열 댓 그루를 잘라내었다. 소나무와 전나무 일곱 그루에는 차마 손을 대지 못하였다. 내가 이 집에서 산지 이십 오 년 동안 그냥 늘 그 모습대로 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함께 해 왔으므로.

나무를 잘라내고 난 뒤, 뒤뜰 한 켠이 늘 휑하니 허전한 듯하여 울타리 나무로 향나무들을 심었다.

그러다 생각난 청송이었다.

비롯 늦었지만 이제라도 솔바람 소리, 소나무와 사철 푸른 나무들이 전하는 소리 듣고, 향나무가 전해주는 세상 향 음미하는 시간을 누릴 수 있으려나?

청송 – 아직은 꿈을 꿀 수 있어 좋은…. 푸른 솔바람소리 듣고 향을 느끼는 세상!

  • 청송– 그시절을함께한후아직도한결같은모습으로사는친구들의소식을듣노라면참좋다. 비록내부끄러움은커질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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