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

내가 참 좋아하고 존경하는 선생이자 선배, 나아가 신앙의 스승인 이가 스무 해 전 즈음에 보내 온 편지의 한 구절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제가 이제 환갑을 맞습니다. 제가 살아 온 예순 해를 돌아보며 예순 분께 제 삶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제 삶을 당신께 묻습니다.’

나는 그가 물음을 던진 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저 황홀했었다. 그리고 그의 그 당돌한 물음으로 그에 대한 경의는 그 이전에 내가 품었던 크기의 배가 되었다.

그로부터 십 여년 뒤, 내가 그 나이에 이르렀을 땐 나는 여전히 고단한 삶 속에서 허우적 거리고 있었을 뿐, 내 삶을 누군가는 커녕 내 스스로에게 조차 물을 엄두를 내지 못했던 기억도 또한 또렷하다.

그리고 오늘 밤, 가까이 소식 전하며 사는 후배들이 이제 예순 나이를 맞는 그네들의 선배들에게 보내는 헌사를 듣는다.

<당신은 평소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으로 정의롭고 안전한 사회를 추구하는 길에 함께 하며 험한 길도 힘차고 즐겁게 갈 수 있도록 매년 한솥밥을 마련해 주셨으므로 존경과 감사의 뜻을 이 패에 담아 드립니다.

사랑합니다!>

<당신은 평소 청년의 꿈과 이상을 간직하고 정의롭고 안전한 사회,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인간적인 사회를 추구하며 우리 지역사회운동의 중심으로서 끊임없이 헌신해 오셨으므로 존경과 감사의 뜻을 이 패에 담아 드립니다.

사랑합니다!>

헌사를 주고 받는 이들이 그저 좋고 사랑스럽다.

내 삶이 크게 엇나가지 않고 이런 이들과 소식 주고 받으며 나이 들어가는 나는 참 행복하다.

저녁 나절 여름 화단을 보는 즐거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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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無爲)에

화초나 푸성귀들을 위하여 들이는 내 공은 가히 크다만 잡초들 앞에서는 딱 한 주간만에 무위(無爲)가 되기 일쑤다.

하여 다시 화단과 텃밭 잡초와 씨름하고 있던 아침에 그녀가 방문하였다. 삼십 년 넘게 한 동네에 살다 보니 긴 말 나누지 않아도 그저 어릴 적 동무 같은 이다.

나는 ‘여보~ ‘하며 아내를 불렀다. 그리고 이어진 그녀가 혼잣말로 한 소리였다. “아이고, 오랜만에 들어보는 소리!”

그랬다. 오늘 그녀의 평범함과 나의 평범한 일상의 차이였다.

오랜만에 담소를 나누고 그녀가 떠난 후 다시 잡초들과 씨름을 하며 내내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던 말, ‘평범함에 대한 감사’였다. 그저 내 모습대로 오늘을 열심히 살고 있음에 대한 감사였다.

그녀 역시 평범한 그의 일상을 즐기며 사는 듯하다.

나이 든다는 게 별게 아니고 믿음이라는 것도 별게 아니라는 건방이 하늘을 찌를 둣한 오늘, 그 역시 내 평범함 뿐일 터

아침엔 분명 보이지 않았던 고추, 오이, 호박 그리고 블루베리 열매들과 한 나절 만에 얼굴을 바꾼 꽃들도 그들에겐 평범한 일상일 터이니.

하루 잘 쉬었다.

비록 무위(無爲)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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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새들

며칠 선선한 가을 같더니만 오늘은 다시 찌는 여름날이다. 고작 하지(夏至)를 넘었으니 이제 시작되는 여름이다.

사뭇 긴 하루 해 덕에 먹고 사는 일 마치고 돌아와서도 뜰 일에 땀 흘릴 시간이 족하다. 늦은 저녁 마른 바람에 땀 식히며 넘기는 책장 속 이야기 덕에 배부르다.

안셀름 그륀 카톨릭 신부가 건네는 <딱! 알맞게 살아가는 법>이라는 이야기였다. 그저 모두 나를 향한 이야기였다.

그러다 나를 피식 웃게 한 대목이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손에 쥐려는 사람은 무리하게 됩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지려 하기 때문에 일을 즐기지도 못하고, 기쁨을 즐기지도 못합니다. 결국 아무 것도 손에 쥐지 못하게 되지요. 이는 케이크를 먹을 때와 같습니다. 케이크 한 조각을 먹을 때 우리는 그 맛을 즐기게 됩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먹기만 한다면 기쁨을 느끼지 못하지요.>

이즈음 듣고 볼 때 마다 내 심기를 불편케 하는 윤석열과 그를 이용하거나 그에 편승해서 제 뱃속 채우려는 무리 또는 생각 없이 박수치는 이들이 잠시 겹쳐진 까닭에 나온 웃음이었다.

잡초들과 싸워 이기며 피는 여름 꽃들은 참 보기 좋다. 이제 막 시작하는 여름인데 코스모스도 어느새 활짝 폈다.

참 늘 신기한 일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그저 잠시 뿐이라는 사실이. 생각 있다는 사람들은 그저 늘 잊고 살 뿐.

새소리와 함께 듣는 카톨릭 신부의 조곤조곤한 이야기에 취한 초여름 저녁에.

… 또 하나 신기한 일, 아름다운 새소리는 대개 작은 새들의 것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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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틈새

“할아버지, 담배는 왜 피세요?”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 할아버지에게 물었었다. 그 때 하셨던 할아버지의 짧은 대답, “이눔아! 심심허니까 태우지. 그래 심심초란다.”

할아버지 돌아가신 후 머리 제법 굵어졌을 무렵부터 나도 담배를 입어 물었다가 끊은 지도 이젠 시간이 꽤 흘렀다.

하루 삼시 세끼 이외엔 군것질 이라곤  거의 입에 대지 않던 내가 이즈음 들어 주전부리들을 끼고 산다. 각종 견과류와 과자류들이 그것이다.  그러다 만난 한국산 과자 맛에 흠뻑 빠져 산다.

따져보니 어느새 내가 “이눔아! 심심하니까 태우지.”하셨던  내 할아버지 나이에 닿았다. 심심초 아닌 심심과자를 즐기는 셈이다.

그 심심한 마음으로 요 며칠새 틈틈이 즐기는 책, 댄 주래프스키(Dan Jurafsky)가 쓴 ‘음식의 언어’다.

책장을 넘기자 바로 만나게 되는 케찹의 유래가 중국이라는 썰(說)부터 사람 살아온 과정과 음식을 엮어 풀어내는 지은이에 해박한 이야기에 절로 빠져 든다. 한마디로 참 재밌다.

그가 음식의 언어를 통해 발견한 사람살이 발전 과정을 설명하며 단정지어 선언하는 말 한마디에 깊게 빠져 본다. <혁신은 언제나 작은 틈새에서 발생한다.>는.

내 할아버지의 심심초와 나의 심심과자 그 세월 사이에서 내가 보았던 숱한 작은 틈새들을 더듬어 보며.

저녁나절, 글라디오스가 빨간 꽃망울을 내밀고 있다. 이젠 여름이다. 심심초를 태우든 심심과자를 즐기든, 작은 틈새를 찾아 즐기는 한 삶은 언제나 여름이다. 아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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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페북 친구 분께서 올려 놓으신 김민웅선생 근황을 읽다.

내 세탁소 가까이 델라웨어 대학교(University of Delaware)가 있다. 아니 델라웨어 대학 바로 코 앞에 내 세탁소가 있다는 말이 맞겠다.

몇 주 전, 이 대학교 졸업식이 있던 날이었다. 그 전날 세탁물을 맡기며 “내일 꼭 입어야 한다.”며 신신당부하던 손님이 문 닫을 시간이 다 되어도 오지 않자 아내가 손님에게 전화를 했었다. 그 때 손님이 했던 말이다. “바이든( Joe Biden) 때문에… 거리가 너무 복잡해서 약속을 다 취소했기에… 옷이 필요 없어졌….”

그날 대통령 바이든이 졸업식에 참석하는 바람에 시내 일대 교통이 엉망이 되었다는 말인데, 삼십 수 년 동안 졸업식 날 장사를 이어 온 내 경험으로 보자면 바이든 아니어도 졸업식날 그 정도의 교통난은 늘 겪어 온 일이었다.

아무튼 그날 대통령 바이든은 누군가에게는 일정을 망쳐 놓은 사람이 된 터이고, 또 다른 누군가들에게는 격려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바이든의 잦은 주말 고향 방문으로 우리 동네 신문엔 몇 차례 주민들의 불만을 전하는 기사를 내보기도 했었다. 물론 기사마다 그의 잦은 발길을 환영하는 이들의 소리도 함께 였다.

나도 딱 한번 그의 집 근처에서 교통 차단에 걸려 한 동안 차안에서 기다려 본 경험이 있다만, 주말이었고 급한 일도 없었기에 통제되어 기다리는 시간이 그리 불편하지는 않았었다. 다만 그게 내 출퇴근 시간이었거나 급한 용무가 있었던 시간이었다면 내 반응은 분명 격해졌을 것이다.

다시 델라웨어 대학교 이야기.

나는 이 델라웨어 대학교를 거쳐 간 제법 많은 한국인들을 만났었다. 이 대학교에서 석, 박사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간 이들도 있고, 공무원 또는 교수, 언론인 등으로 연수나 방문, 교환 교수 등으로 잠시 머물다 간 이들도 있다. 내가 그 이들을 만나게 된 장소는 교회였다.

별로 사교적이지도 못하고 골프도 전혀 치지 않는 내가 깊게 교분을 나눈 이들은 거의 없다만, 어쩌다 한 두번 식사 자리나 이야기 자리를 통해 대충 사람의 생각과 됨됨이는 기억에 남아 있게 마련이다. 대부분이 한국으로 돌아가 나름 저마다 제 자리에서 충실하게 사시는 분들이시다.

그 가운데 어쩌다 종종 뉴스를 통해 듣게 되는 이름들이 있다. “쯔쯔… 왜들 그러실까?”하며 내가 부끄러워지는 분들의 소식을 들을 때면 참 안타깝다.

반면에 사는 소식을 들으며 박수 치고 응원하며 잠시라도 스쳐 지나간 인연이 고마운 이들도 있다. 김민웅 목사님은 그 분들 가운데 한 분이다.

그가 곤경에 처한 소식을 접하며, 그를  위해 기도하는 저녁이다. 교회를 통해 알게 되어 자랑스러운 그의 노년 위에 신이 내리시는 용기와 은총이 함께 하시길…. 그로 인해 내 모국의 희망에 찬 소식을 들을 수 있기를….

*****늦저녁에 읽은 글 한 줄. 퀘이커 창시자 조지 폭스(George Fox) 선생의 말.

<나는 어둠과 죽음의 바다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 어둠의 바다 위를 덮어 감싸는 무한한 빛과 사랑의 대양을 보았다. I saw also that there was an ocean of darkness and death, but an infinite ocean of light and love, which flowed over the ocean of darkness.>

 

꽃들에게

세상 소식은 늘 어지럽다. 듣고 보는 것 조차 매우 불편할 때가 많다.

남들 이야기들 뿐만 아니라 내 개인적인 일상도 때론 그러하다. 그렇다고 어떤 도(道)이든 산문(山門)을 두들겨 숨기엔 지나치게 쇠한 나이가 되었다. 누군가들은 백세 시대 운운들 하지만 그게 어차피 모두의 것은 애초 아닐 뿐더러 내가 누려야만 할 까닭도 없다. 그저 내 나이는 내가 느낄 뿐.

이런저런 한 주간의 피곤함 위에 답답한 세상 뉴스들이 더해져 지친 일요일 오후, 뜰에 핀 꽃들이 내 눈에 들어 와 나도 모르게 환한 미소를 머금다.

매우 건방진 말이겠다만 염화미소(拈華微笑)가 별거겠나?

순간 제 맘 하나에 달린 일이거늘.

하여 오늘도 감사!

꽃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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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앞에

참 빠르다. 어느새 뜰엔 여름이 찾아왔다. 새소리 바람소리 들으며 멈추어 있는 듯한 시간 속에 앉아 있건만, 빠르게 흘러간 세월들과 더 다급하게 다가오는 듯한 내일을 생각 하노라면 사람살이 한 순간이라는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그렇다 하여도 그 한 순간에 담겨진 이야기는 셀 수 없을 터이고, 제 아무리 빠르다 하여도 내 생각 하나로 맘껏 되돌리거나 느리게 반추하거나 예견할 수 있는게 시간일 터이니, 살아 있는 한 시간은 그저 축복일 뿐이다. 물론 누구에게나 멈춰 세워진 듯한 고통의 순간들이 있게 마련일 터이지만…

지난 주에 정말 오랜만에 사흘 여정의 짧은 여행을 즐겼다. 참 좋은 벗 내외와 우리 부부가 모처럼 좋은 시간을 누렸다. 시간이나 계획에 쫓기지 않으며 그저 주어진 시간을 맘껏 즐겼다.

토론토에 대한 이십 수 년 전의 기억은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이번 여행으로 그 기억들을 말끔히 지워버렸다.

사흘 동안 우리 일행은 토론토 시내를 맘껏 걸으며 도시의 아름다움과 맛과 멋을 즐겼다. 나이아가라 저녁 풍경을 즐긴 일은 그저 덤이었다. 그 덤의 풍성함도 만만치 않았다. 나이아가라는 이미 여러 차례 가본 곳이지만, 부모, 처부모 아님 아이들을 위해 또는 방문한 친지들을 위해 길라잡이 역할이었는데, 이번엔 그저 우리 부부 발길 닿는 대로 였으므로.

그렇게 걷다 한나절을 보낸 곳, 온타리오 자연사 박물관(Royal Ontario Museum)이었다. 백만 불 짜리 동전, 거대한 다이아몬드나 각종 금붙이 등에 혹하지 않는 아내들에게 감사하는 벗과 내가 맘껏 즐길 수 있던 곳이었다.

박물관 이층은 지구상 생물들의 기원과 생성 발달의 단계 그리고 오늘날 위기에 처한 현실 등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곳에서 내 기억에 담아 온 두 가지. 지구 상에 생존 하는 생명체들의 존재들 중 과학자들이 이제껏 확인해 낸 생명체 수들은 고작 10% 내외라는 사실과 그나마 그 생명체들이 급속히 소멸해 가는 이유들 중 하나는 늘어나는 인간들의 개체 수 때문이라는 것.

내가 잠시 고개 끄덕이며 겸허해 진 까닭이었는데, 아직은 신이 인간들에게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일깨웠기 때문이었다.

늦은 저녁 잠시 뜰에 앉아 있는 짧은 시간과, 사흘 여행의 추억과 칠십 여년 지난 세월들과 수만 년 사람살이 이어 온 시간들은 모두 하나같이 빠를 뿐.

하여 오늘 지금 이 순간은 그저 겸허해야. 시간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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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靑春)에

비록 하룻길 여행일지라도 시간과 노잣돈, 건강 등 나름 제 형편에 맞아야 나서는 법이라는 내 생각으로 보면 나는 이미 노인이다. 어느 날 문득 쌀 몇 되와 고추장 된장 짊어지고 집을 나서 한 달 여포 산과 바다를 헤매던 젊은 때를 생각해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큰 맘 먹지 않고 며칠 여행길을 즐긴 아내와 나는 아직 청춘이다.

걷다가 문득 눈에 들어 온 시계 바늘이 가르친 숫자에 놀라다. 매일 마주하던 시간들이 특별히 다가올 때가 있듯.

날고 뛰지는 못할지 언정 그저 잠시 일상을 벗어나 걸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다. 그 축복을 누리는 아내와 나는 아직은 청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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