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설(妖說)

<언어가 없는 인간들에게 공동체도, 사회도, 계약도, 평화도 없다는 점은 동물세계와 다를 바가 없고 인간이 언어를 가진다는 것은 축복이자 저주이다. 합리적 사고와 과학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축복이고 일시적인 욕망과 기호에 따라서나, 산만하게 언어를 사용하여 재앙을 초래하기 때문에 저주이다.> –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가 리바이어던(Leviathan)에 남긴 말이다. 홉스는 국가 또는 군주라는 힘은 언어를 통제, 통용 시킬 수 있는 절대권력에 의해 탄생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공자는 필야정명호(必也正名乎)라고 가르쳤다. 정치란 무릇 명분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는 외침이다. 명분에 대한 공자의 해설이다. <명분이 바로 서지 않으면 (정치가 하는 일을 사람들에게) 순조로이 설명 할 수 없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은 이루어질 수 없다.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예악이 흥성할 수 없다. 예약이 흥성하지 못하면 형벌도 공정할 수 없다. 형벌이 공정하지 못하면 백성은 손발을 어디 둬야 할 지도 모르게 된다. 그래서 군자의 명분은 반드시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정치하는 사람이) 말하는 것은 반드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군자(정치가)는 자기가 한 말에 대해 언제나 구차함이 없어야 한다.>

뜰일 하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빗발을 피해 쉬며 뉴스들을 훑다가 떠올려본 옛 사람들의 교훈이다. 이즈음 한국에 새로 들어선 정권과 그 권력 주변에 몰려 든 사람들이 내뱉은 말들이 그저 요설 뿐인 듯하여 참 불편하다.

무릇 양심(良心)이 없는 말이 난무하는 사회는 참 위태로운 법이다.

*** 뜰에서 보내는 하루 쉼은 그야말로 안식(安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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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무꽃

가게 앞 공사판은 곧 끝날 듯 끝날 듯 하며 지루하게 이어져 족히 삼 사백 피트(백 미터 이상) 걸어서 세탁물을 들고 오가는 손님들에게 미안함 마음 그치지 않는다.

한 물 간 업종이라는 말도 많고, 더하여 접근성 제로에 이르는 공사판 환경임에도 찾아주는 손님들 덕에 바쁜 한 주간을 보냈다.

지난 주말에 텃밭 열무를 거둘까 하다가 한 주 미루었는데 그새 열무 꽃밭이 되고 말았다. 텃밭 농사 흉내내기 삼년 차, 가장 쉬었던 게 열무농사였다. 그냥 씨 뿌려 놓으면 그만 이었는데, 아뿔사! 내 게으름으로 그만….

처음 경험하는 일이므로 구글(google)신(神)에게 물었다. “열무꽃이 피었을 때…”라고.

그렇게 만나 문태준 시인의 극빈(極貧)이라는 시였다.

<극빈極貧 /문태준

열무를 심어놓고 게을러
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
가까스로 꽃을 얻었다 공중에
흰 열무꽃이 파다하다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
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
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
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
흰 열무꽃잎 같은 나비 떼가
흰 열무꽃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가녀린 발을 딛고
3초씩 5초씩 짧게짧게 혹은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편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
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없었다
내 열무밭은 꽃밭이지만
나는 비로소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 >

열무꽃 덕에 이웃에게 결코 넉넉치 않았던 내 삶을 잠시 돌아보는 시 한편 곱씹다.

*** 거센 열무 꽃대 잘라 내고 여린 열무 잎 다듬어 거두다. 아침 새소리는 경쾌하고 저녁 나절 새소리는 넉넉하다. 새 소리에 취해 열무 다듬는 시간에 누린 행복이라니. 그 짧은 시간만큼은 부끄럽지 않을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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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대기

새로운 것을 배우고 깨닫는 일도 기쁨이겠다만, 종종 지나간 것을 되새겨 얻는 즐거움도 제법 쏠쏠하다.

두어 주 전에 코로나와 씨름 하노라고 방에 갇혀 며칠을 보내며 다시 읽어 본 소설 <나무 위의 남작> 이었다. 얼추 스무 해 전에 읽었던 그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와 새롭게 눈 뜬 기분이었다.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나무 위의 남작> 속 주인공 코지모 남작은 그가 열 두살 되던 해인 1767년에 일생을 나무 위에서 살기로 작심하고 나무 위로 올라간다. 이후 평생을 마치 타잔 처럼 나무와 나무를 타고 지낸다. 타잔과는 다르게 땅 한번 밟지 않고 나무 위에서만 삶을 이어가다가 마침내 죽어 땅으로 돌아와 묻혀 남긴 그의 비문(碑文)이다. –  <코지모 피오바스코 디 론도 – –나무 위에서 살았고 —- 땅을 사랑했으며 — 하늘로 올라갔다.>

그가 어린 나이에 나무 위로 올라가게 된 까닭은 그의 아버지에 대한 반항 때문이었는데, 아버지에 대한 상징은 곧 기득권 세력, 부패한 체제를 일컫고 있다. 프랑스 혁명이라는 대변혁기를 남들 보다는 조금은 높은 나무 위에서 당시 사람사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고뇌하며 행동하는 주인공 코지모 남작에 대한 이야기는 내게 새로운 감흥으로 다가왔다.

그가 비록 현실의 부조리와 부패에 저항하는 뜻으로 나무 위에서 평생을 살았지만 그는 땅과 사람을 사랑했던 이었다. 그는 남들 보다 조금은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내려다 보며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꿰뚫어 보며 살았다. 그는 사람과 사람살이 그리고 자연에 대한 넘치는 사랑을 품고 살다 갔다. 나무 위에서.

어제 텃밭과 꽃밭 잡초를 뽑다가 문득 바라본 하늘이었다. 하늘을 향해 꼭대기로 치솟는 나무들의 새순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던 말. ‘꼭대기’

꼭대기에 닿으면 그저 잊지 말아야 할 말, 바로 ‘겸허’

이젠 점점 하늘에 가까워 가는 나이에 곱씹고 곱씹고 또 곱씹어야 할 말 , 바로 ‘겸허’ 그리고 오늘에 대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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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운동淸雲洞

세상이 너무 많이 달라져 누군가의 경험을 일반화 시키는 일은 아주 무모한 일이 되었다. 비록 그 경험이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함께 해 온 사람들이 다수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나이 들어 돌아보는 십대 나이 어린 시절의 추억은 아름답다.’라는 말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이제와 돌이켜보는 내 십대 어렸던 시절의 추억은 부끄럽지만 내 살아 온 시절 가운데는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들이었다.

일차 중학교 입학 시험에서 실패했던 내가 이차 시험을 통해 들어간 학교는 청운 중학교였다.  머리 빡빡 밀고 검정 교모와 교복을 입고 신촌에서 버스를 타고 신문로에서 내려 신문로 사거리에서 다시 전차를 타고 효자동 전차 종점에서 내려 언덕길을 한참 걸어야 닿았던 청운 중학교였다.

그렇게 여섯 해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 청운 중학교와 경기상업고등학교, 내 십대 소년을 되돌아 추억해 보는 밤이다.

북악산(학교 때 교지 이름이 백악이었는데 북악보다는 나는 백악이 더 좋았었다) 기슭에서 인왕산을 바라보며 품는 멋진 곳에 위치한 학교였다. 구글 검색을 통해 학교를 찾아보니 중학교는 완전히 옛 모습을 잃었으나 고등학교 건물은 예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청운동, 효자동, 통인동, 내자동 그 거리 거리와 골목골목들이 내 어린 시절 벗들의 얼굴들과 함께 내 머리 속을 마구 스쳐 지나간다.

그 누가 무어라 할지라도 지나간 모든 시간들은 비록 아릴지라도 소중하고 아름다워야 한다. 더하여 소년 시대의 추억이라면.

기억컨대 청운동 그 거리를 1972년 이후 밟아 본 적이 없다. 딱 오십 년이 지났다.

몇 해 전 일이던가? 세월호 가족들이 울며 걸어 닿은 곳이 청운동사무소 앞이라는 신문기사를 보며 옛 생각에 잠시 빠졌던 일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 한 시대의 변화를 알리는 청와대 뉴스를 보며 돌아보는 옛 생각이다.

사람살이 종종 반동(反動)의 시간을 겪기는 한다지만, 오십 년 아닌 칠 십년 전 자유당 시절로 돌아가는 듯한 한국의 권부와 그 주변 소식들이 조금은 난감하다만….

잠시나마 내 소년에 대한 추억은 여전히 아름다울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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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길

해마다 이 맘 때면 내 집 앞에 꽃길이 펼쳐진다. 날씨가 궂은 해에는 일주일여, 봄이 제법 긴 해는 석 주 이상 꽃길을 걸으며 일터로 향하고, 그 길을 딛고 돌아온다. 일주일이든 석 주든 해마다 내가 누리는 꽃길의 즐거움은 딱 그만큼이 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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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過程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좀 이상 했었다. 으스스하니 춥고 세수하며 손끝에 닿은 물이 그리 찰 수가 없었다. ‘몸살 기운이 있나?’하며 일터로 나갔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미열이 나기 시작했고 온 몸이 마디마디 쑤시기 시작했다. 오후 들자 콧물 나고 잔기침이 잦아졌었다. 아무래도 좀 심상치 않았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자 마자 covid test를 해보니 영락없이 양성 반응이었다. 다행히 아내는 음성이었다. 지난 주 수요일 일이었다. 마침 수요일엔 가정의(family doctor) 사무실이 8시까지 문을 열었다. 전화를 하니 잠시 후 의사에게 연락이 왔다. 내 증상과 증상이 나타난 시점 등을 물은 의사는 먹는 치료제도 나왔으니 이튿날에 사무실로 오라고 했다.

이튿날 이런 저런 검진 후 의사는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치료를 위해 먹는 약 PAXLOVID를 처방하기 전에 내게 물었다. ‘이 약을 일반인들 누구에게라도 급한 경우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게 바로 어제부터 랍니다. 아직은 연구중인 약품인 것이지요. 약간의 부작용이 따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제 생각입니다만 김씨는 특별한 병력도 없고  복용하는 약도 없고…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선 본인의 의사가 중요하므로… 묻는 것이지요’

나는 잠시 망설였었다. 그 때 증상으로 보아 참을 만도 했고, 앓아봐야 며칠 고생하면 끝일텐데… 부작용을 염려하면서 까지 먹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과 먹고 빨리 나을 수 있다면 나은 방법 아닐까? 또 아내가 아직 괜찮은데 공연히 내가 옮기기 전에 빨리 복용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 사이에서 왔다갔다 했던 것이었다.

결국 처방전을 받아 들고 사무실을 나왔다. 약을 받아 들고 돌아와서도 먹을까 말까 많이 망설였었다. 그 때까진 증세가 참을 만 했기 때문이었다.

본격적인 증상이 시작된 것은 그 날 밤부터 였다. 물은 커녕 침조차 넘기기 어려운 목 통증과 기침 가래에 이은 답답한 가슴 통증 등이 거의 만 48시간 이어졌다. 정말 오랜만에 장시간 누워 있었다.

그렇게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다. 그 사이 아침 저녁 각 세 알씩 오일 간 복용하는 PAXLOVID 30알을 남김 없이 먹었다. 어제 오후엔 의사선생이 전화를 해서 내 상태를 물었다. 나는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온 듯 하다며 감사함을 전했다.

이틀 간격으로 아내는 테스트를 계속했고 정말 감사하게도 연이어 음성이 나왔다. 아파보니 40년 함께 해 온 아내에 대한 고마움이 크게 인다.

누워 있으며 잠시 들었던 생각. < 다 과정인데…. 언젠가 머지 않아 맞이할 내 마지막 때에도… ‘뭘 과정일 뿐인데…’하며 웃을 수 있으려면…. 하루 하루 내가 마주하는 순간 순간들이 그저 과정인데 하며 겸허하고 너그럽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하는 제법 나이 든 생각 하나.

그리고 며칠만에 다시 돌아온 일터에서 만난 진상 손님으로 하여 피로와 짜증과 화가 치밀다 가라앉은 후 중얼거렸던 내 혼잣말. “에이그… 나이가 들긴 뭘…?…. 겸허하고 너그럽게..? 에이고 아직 멀었습니다!”

어쩌겠나?  다 과정인 것을.

그거 하나 되씹어 볼 수 있던 것 만으로도 지난 한 주간에 대해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