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고향인 경기도 포곡면 유운리 유실 마을은 내가 어릴 적 방학이면 찾아가 지내던 곳이다. 초, 중, 고교 시절이었던 1960대만 하여도 아직 전기가 들어 오지 않아 호롱불을 켜고 살았던 유실 마을까지는 서울 신촌에서 거의 하루길이 걸렸다.
유실 마을을 지키고 계셨던 작은 할아버지 체구는 지금의 나 만큼이나 작고 야윈 분이셨다. 그 작은 할아버지는 신 새벽이면 ‘어흠’ 기침소리로 일어나셔 밤새 끓인 쇠죽을 여물통에 옮기신 뒤,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시곤 밭으로 나가셨었다. 그 할아버지 닮아서인지 나 역시 지금까지 해 뜬 후 눈 뜬 적은 별로 없다.
새벽 밭일 끝내고 돌아오셔서 조촐한 아침 상 물리신 후 작은 할아버지는 죽 여물로 배 든든히 채운 황소를 앞세우고 다시 들일에 나서시곤 하셨다.
어린 내겐 엄청난 크기의 황소는 작은 할아버지 앞에서는 늘 공손했고 내가 기억하는 한, 유실 마을 아버지 고향의 기둥이었다.
대학생이 된 내가 1972년 여름 7.4 남북 공동성명 소식을 들은 곳도 이미 전기가 들어 온 유실 마을에서 였다.
그 무렵에 삼성일가의 돈이 그 일대를 차지하기 시작했고…. 모를 일이다…. 지금은 몇 층짜리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는지?
다만, 오늘 다시 생각해보는 황소다.
오늘 아침 장기요양원에 계시는 아버지를 찾기 전에 잠시 만났던 참 좋은 벗 필라 이종국 선생에게 들은 황소 그림 이야기 때문이었다.
올 정월 즈음이었다. 세월호 가족들과 함께 하는 “기억 하장, 함께 하장”이라는 후원행사가 있었다. 뜻있는 분들이 이런 저런 물품들을 기증하고 그 물품들을 구입한 기금으로 4.16가족협의회의 진상규명 활동비를 마련해 보자는 뜻으로 열린 행사였다.
‘필라세사모’ 이름으로 작은 물품 하나라도 구입해 보자는 뜻이 모아져 기증 물품들을 보고 있던 중에 ‘필라세사모(세월호를 기억하는 필라델피아 사람들 모임)” 회원들의 마음을 사로 잡은 것은 작가 류연복의 작품인 그림 <황소>였다.
그러나 당시 한 회원이 남긴 의견 <이 황소는 구경만 하시는 것으로.^^>처럼 다른 물품들에 비해 조금 고가였다.
나야 그저 이름만 걸쳐 놓았을 뿐이지만 ‘필라세사모’ 친구들이 일하는 것을 보면 황소처럼 우직하다. 결국 <황소> 그림은 필라델피아로 오게 되었고, 지난 주에 한인 이민자들 뿐만 아니라 아시안계 이민자들 나아가 소수자들의 권익옹호에 앞장 서 일하는 ‘필라 우리센터’ 사무실에 걸었단다.
다시 <황소>
이재(理財)에 재빠르게 밝은 이들에게 황소는 그저 물품이거나 지나간 시절의 추억거리일 수 있겠다만, 그 우직함과 꾸준함 나아가 든든함을 이어가는 역사성을 찾는 이들에겐 곁에 두고 싶은 상(象)이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