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

세상 걱정 모두 내려놓고 그저 내 맘과 몸이 가는 대로 보낸 하루야 말로 참 안식일(安息日)이다.  내겐 오늘이 그랬다.

이른 아침 지난 뉴스들을 훑다가 보게 된 부고(訃告)들. 솔직히 덤덤하게 받아들일 연세 즈음에 떠나신 이들이라 그 이들의 지난 삶을 잠시 추억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한쪽은 과할 정도로 뉴스 량이 많고 다른 한 쪽은 조촐하 다만, 나는 조촐한 쪽에 꽂혀 그를 추억한다.

이어령 선생은 나름 한 시대에 이름 한번 떨친 이었으나 내겐 별로 큰 의미 없는 이었으므로 그저 뉴스일 뿐, 서광선 선생의 부음은 아주 잠시라도 삶과 신과 이웃을 다시 생각하게 해 주었다.

서광선 선생은 “믿음이란 불안 없는 삶을 보장하지 않는다.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을 태초의 창조의 힘으로 생각하고, 관계성의 힘으로 생각한다면, 창조의 보전은 인간들 사랑의 힘에 달려 있는 것이다.”라고 선언한 도로테 죌레(Dorothee Sölle)를 알게 해 주신 이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장수시대라도 때 되면 다 떠나게 마련이다.

바람 소리 거세도 이미 매운 맛 잃은 봄바람이다. 애초 오늘의 계획대로 뒤뜰 텃밭을 갈아 일구다. 모처럼 삽질에 ‘흠흠’ 콧소리 내며 내가 봄이 된다. 화단엔 움 돋는 화초들과 이미 만개한 이른 봄꽃들이 게으른 내 어수선함을 비웃는 듯하다만 내 흥이 돋는데 제깟 것들이 뭔 대수랴!

오후에 참 좋은 벗이자 후배가 찾아와 쉬는 날 담소(談笑)를 즐겼다. 그는 내가 아는 한, 내가 만나는  발 딛고 서 있는 삶 가운데서 가장 성서적 삶을 살려고 애쓰는 친구다. 그래 난 늘 그가 참 좋다.

무엇보다 그가 꿈꾸는 세상이 조금씩 조금씩 그저 느낄 수 있을 만큼은 누렸으면 하는 생각으로 그를 응원한다. 필라 우리센터(https://wooricenterpa.org/ )는 그의 꿈이 녹아 싹 트고 있는 꿈이다.

담소 끝에 한국 선거 걱정을 하는 그에게 내가 던진 말.

“걱정 마시게! 지난 칠십 년 조금씩 조금씩 스스로 일깨우며 살아 온 시민들이 있는데…>

무릇 안식일은 걱정조차 없어야 한다.

아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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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기도

연 이틀 모질게 매운 바람 불다 그치니 내 집에 봄이 내려 앉았다. 봄 준비 한답시고 뒤뜰로 나선 내게 활짝 핀 크로커스 꽃들이 웃으며 말을 건냈다. “쯔쯔쯔 이 게으른 친구야! 난 벌써 와서 기다렸구만…” 허나 내게도 늘 핑계는 있는 법. “예끼! 비웃지 말어! 겨우내 집안 단장하느냐고 나도 몹시 바뻣다고. 네 놈 웃음을 반갑게 맞는 걸 고맙게 생각해!”

그렇게 봄이 온다.

오늘 아침 집안 정리를 하다가 발견한 작은 상자는 눈에 익지 않은 것이었다. 상자를 여니 돌아가신 장모 물건들이 담겨 있었다. 그 물건들 중엔 돌돌 말린 신문 쪼가리들이 담긴 백이 하나 있었다. 그 신문 쪼가리들을 펼치며 터져 나온 말 “에고, 우리 장모님”

어느새 스무 해가 빠르게 지나 간 일이다. 그 무렵에 나는 지역 한인사회 신문에 글을 열심히 썼고 한 때는 신문을 만들기도 했었다. 다 ‘지나간 일이다’라는 생각으로 내가 모아두었던 흔적들을 모두 없앴던 일도 벌써 오래 전이다. 하여 이젠 거의 기억에도 없는 일이 되었다.

허나 장모는 그 당시에 내가 썼던 글들을 오려 고이 간직해 두셨던 것이다. 장모 남기신 물건들도 이젠 없다 싶었는데 상자 하나 남아 잠시 옛 생각에 빠져 본 아침이었다.

2002년 월드컵 경기 중계를 보며 썼던 글을 보며 웃었다. 그 때만 하여도 내가 참 젊었었구나 하는  생각으로.

 

<중계 카메라가 비추어 주는 곳곳마다 온통 붉은 바다였다. 열 두 번 째 선수라는 응원단 곧 red devils의 상징색이란다. 더하여 그들의 가슴에는 ‘빨갱이가 되자(Be the reds) 구호조차 선명하였다. 이 어찜이뇨? 이 넉넉함이 어디서 온 것이더뇨?

일개 축구응원단의 색깔을 비약한다 말하지 말라. 지난 세기, 우리에게 적(赤)은 오직 적(敵)이었으며 뛰어넘지 못할 벽이었다. – 그렇게 반 백년을 살아왔다. – 그럼에도 아직도 툭하면 좌파입네 우파입네 손가락질로 때리고 싸우며 저 함성 뿐인 민중을 속이는 정치꾼, 오직 양시(兩是)나 양비(兩非) 뿐인 사이비 언론들 그 냄새나는 구덩이에서 쏟아 터져 나오는 저 붉은 빛의 함성, 붉은 파도 이 어찌 신(神)의 일하심 아니겠나!>

이 글의 끝을 나는 이리 맺었었다.

<비노니 언론이여! 실축(失蹴)한 젊은이에게 돌 던지지 말지어다. 분단의 세월, 그대들이 내지른 고의적 실축은 천년이 가도 남을지니.>

이즈음 한국 언론들을 보면  ‘양비양시’도 아니고 그저 장사꾼처럼 보인다. 실축도 아니고 고의적 실축 뿐.

지금 내가 사는 곳이나 그저 생각 속에 남은 한국이나 봄이 참 봄 다운 봄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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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내가 대통령 선거 투표를 처음 해 본 때는 2000년도이다. Al Gore와 George W. Bush가 붙었던 그 해 선거에서 나는 아시안계 정치 참여단체인 80-20 Initiative의 이사자격으로 Al Gore를 위한 선거 운동도 했었다.

한국에서는 내가 투표권을 부여 받을 나이부터 이민을 올 때까지 대통령 선거에 참여할 수 없었다.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뽑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이민 온 이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기 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었다. 그러다 맘먹고 시민권을 갖고 뒤늦게 첫 대통령 선거 경험을 한 것이다.

나이 육십이 넘을 무렵에 품은 꿈이 하나 있었다. 예순 다섯이 되면 가능한 이중 국적을 얻어 한국 대통령 선거도 한 번 해 보아야겠다는 꿈이었다. 막상 그 나이에 이르자 나는 망설였다. 어차피 다시 돌아 가 누울 한 뼘의 땅도 없는 처지이고, 돌아가 살 마음도 없고, 내 아이들도 돌아갈 가능성이 거의 전무한데 그 꿈이 가당키나 한 것이냐? 하는 물음 앞에 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여 그 꿈을 접은 지도 시간이 꽤 흘렀다.

비록 권리는 없으나 관심마저 끊을 수는 없는 일이다. 법적 지위로야 어찌되었던 나는 근본이 그저 한국인이므로.

그렇게 보게 된 한국 대통령 후보 토론이었다.

나는 진보니 보수니 하는 가름이나 좌나 우를 나누는 일은 그리 마뜩찮게 여기는 편이다. 무엇보다 내가 선 자리를 매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이 들어 갈수록 그 자리매김이 힘든 일은 점점 많아진다. 다만 그 양단의 극에 다른 이야기들은 거의 듣지도 않거니와 그런 주장을 펴는 사람조차 피하는 편이다.

내가 유일하게 즐기는 페북을 통해 오래 전 어렸을 때 친구들의 소식들을 힐끔거리론 하지만, 친구 맺기를 거의 하지 않는 까닭은 나와 세상보는 생각이 이미 너무 멀리 떨어진 친구들과 공연히 어색한 관계를 잇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저 옛 추억으로 반가움을 되새기고 말 뿐.

이젠 칠순잔치 소식들을 올리는 친구들과 내가 서로 결코 꺾이지 않을 고집스런 생각을 나누며 시간을 허비 할 순 없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민주적 사회에서 선거란 개인이나 이런 저런 각종 이익, 이해단체들이 자신이나 속한 단체들의 이해관계에 맞는 대표자를 선택하는 과정이다. 하여 자기 주장도 펴고, 아까운 돈과 시간을 보태기도 하고, 속한 공동체의 뜻을 하나로 묶어 내는 일도 하는 법이다.

문제는 대표자로 나서는 후보자들이나 그를 내세우는 정치집단과 표를 행사하는 개개 유권자나 각종 이해 단체들 사이에 난무하는 거짓과 사기질들이다.

그 거짓과 사기질을 잘 가리는 유권자들이 표를 제대로 행사하는 사회가 민주적으로 앞서 나가는 법일 터이고.

그렇게 든 몇 가지 생각들.

우선 누가 뭐라고 떠들어도 대한민국은 정말 짧은 시간에 너무나 빨리 좋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첫째이다. 그 생각의 까닭은 단순하다. 내가 비록 투표권은 행사하지 못했지만 처음 투표권을 가졌던 1970년 대초만 하여도 이편 저편의 세가 99.9대 0.1이었다. 그것이 조금씩 조금씩 바뀌어 이젠 거의 51대 49 다툼이 되었으니 참 많이 바뀌었다. 그 다툼의 내용이야 어떠하든 어느 한 쪽이 일방적이 아니라는 것만 하여도 크게 나아진 일 아니겠나? 더하여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여건임도 불구하고.

둘째는 사람의 생각이나 모습이 바뀌기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심상정과 안철수를 보며 가져 본 생각이다.

세째는 사람살이 발전해 나아가는 방향에는 언제나 맞바람이 불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윤석열을 보며 든 생각이다. 그를 보며 내가 공연히 부끄러워진다. 허나 역풍으로 하여 사람살이 좀 더 나은 세상으로 향하는 힘이 더욱 거세진 역사도 종종 겪어온 일이다.

오래 전 0.1이었던 숫자가 이번 선거에서 51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오래 또아리 틀었던 양 극단(極端)들이 모두 한 칸 씩 밀려나 사라지는 역사가 일지 않을까?

과메기

친구 덕에 말로만 듣던 과메기 맛을 보았다. 과메기란 놈을 본 것도 처음이었다. 과메기라는 말을 들어 본 지도 그리 오래 되지 않는다. 내게 과메기 맛을 보게해 준 친구 역시 그의 지인에게서 선물을 받게 되어 처음 마주하게 된 음식이란다. 우리들이 즐겨 먹던 건조 생선으로는 오징어, 굴비, 북어, 양미리 등이었을 뿐 한국에서 살 때 과메기란 음식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기는 서울내기들인 친구나 나나 마찬가지였다.

과메기 뿐만 아니라 친구 아내는 생태찌개, 김치 찜, 삼겹살 수육 등 맛깔스런 음식들로 한 상을 차려 내어 우리 부부가 호사를 누린 어제 저녁이었다. 친구는 그가 담근 매실주를 따라주며 말했다. “이게 뒤끝이 참 깨끗해요. 맘껏 마셔도 내일 아침 거뜬할 겝니다.” 그의 말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실로 간만에 권커니 잣커니 하며 마신 술자리였는데 오늘 아침 맞이는 정말 가뿐했다.

엊그제 친구를 만난 것은 거의 삼년 만 이었다. 비록 가까운 거리에 떨어져 살지만 코로나 탓도 있고 그저 무심히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먼저 인사 치레를 건넸다. “아이고 날 잡아 오랜만에 한 잔 합시다.” 이어진 그의 응답이었다.”아이 뭔 날을 잡아요? 그냥 오늘 하면 되겠구만!”

그렇게 마련한 어제 저녁 자리였다.

서로 못 본 사이에 그는 이사를 했다. 그의 새집은 그의 농장을 한 눈에 조망하는 자리에 작고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친구 내외의 노년을 보낼 집으론 정말 안성맞춤이었다. 일찌감치 노년을 즐길 준비를 마친 그가 크게 부러운 저녁이었다. 근사한 저녁상과 매실주 반주에 대한 감사는 부러움의 크기보다 훨씬 컸다.

길고양이 두 마리를 보살펴 키우는 재미도 듣고, 구십 대 쇠약해지신 그의 어머니와 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아이들 소식들도 나누고, 우리들의 노후에 대한 그저 쓰잘데없는 걱정도 나누며 적당히 오르는 취기를 즐긴 저녁이었다.

어쩌면 내게 과메기는 어제 밤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내겐 낯 선 음식이기도 하거니와 구태여 특별한 음식을 찾아 나서지는 않는 내 성정 탓으로 보아 그런 생각이 든다.

다만 과메기 없이도 숙취 없는 매실주 없이도, 그저 참 좋은 친구들과 이따금씩이라도 얼굴 마주 하고 여유로운 담소를 나누는 시간들을 즐길 기회를 누렸으면 좋겠다.

친구내외에게 고마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