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돈

캘리포니아 사돈댁에서 귀한 선물을 보내 주셨다. 손수 키워 거두시고 잘 말린 먹음직스런 대추를 한아름 보내 주셨다. 예상치 않던 일이라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의 크기가 꽤 컸다.

누이들 집에도 나누어 보내고, 마침 찾아 온 내 참 좋은 벗에게 조금 덜어 주었건만  우리 내외에겐 과할 정도로 남은 많은 양이었다.

대추차도 끓여 놓고, 대추 꿀차도 절여 놓았다. 사돈 덕에 올 겨울 감기 걱정은 내려놓아도 좋을 듯하다. 대추 넉넉히 넣은 약밥 만들기는 뒤로 미루어 두었다.

사돈사이 –  꽤 오랜 시간 내겐 어머니와 아버지와 장모와 장인 사이를 일컽는 말이었다.

나는 일남 삼녀 외아들, 아내는 일녀 이남 맏딸. 장인과 장모, 아버지와 어머니, 그렇게 사돈 내외는 이 미국 땅에서 기십년을 한 동네에서 살았었다. 다 지나간 이야기다만.

세월은 어느 사이에 나와 아내를 사돈 사이의 한 축으로 만들었다. 사돈 댁도 마찬가지일 터.

대추 꽃은 그냥 피고 지는 법 없이 열매를 반드시 맺는다고 한다지.

눈내리는 늦은 밤, 대추차 한잔 앞에 놓고 비나리 한마당.

‘그저 우리 아이들 건강하고 행복하게…’

한마음일 사돈내외에게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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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디 맨

며칠 전 일이다.

이즈음 내가 이런저런 집수리를 하느냐고 손을 빌리고 있는 김선생은 경험 많은 목수이자 핸디 맨이다. 내가 그를 안지는 오래 되었다만 내 집 일을 맡긴 것은 처음이고, 그와 특별히 이야기를 나눈 일이 없어 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 그의 편에서 보아도 마찬가지일게다. 나에 대한 관심이 그의 삶에 끼어들 틈은 전혀 없었을게다.

집수리 자재들은 내가 주문을 하고 그의 손을 빌리고 있는데, 자재 주문을 하다보니 아무래도 그의 의견이 필요하다 싶어 내 컴퓨터 앞에 함께 앉게 되었었다.

내가 준비한 자재 목록을 찾다가 우연치 않게 그 전날 밤에 보고 있었던 유튜브 채널이 뜨던 것이었다. 그 때 김선생이 내게 던진 물음이었다.

“아니 이런 걸 다 보세요?  XX교회 분들은 이런거 안보시던데. 그 교회 다니시잖아요?” 김선생의 다소 황당한 물음에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그때 내 컴퓨터에서 돌아가고 있던 유튜브 채널은 ‘열리공감 TV’이었는데, 이어지는 김선생의 말이었다. “저도 이거 즐겨보는데요. 놀랬네요. XX교회 분이 이런 걸 보시다니…”

나는 또 웃었고, 그냥 좀 아팟다.

나는 이젠 토론을 즐기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 교회에 적은 두고 있으되  출석은 거의 드문 편이다.

누군가에게 정형화된 모습으로 기억된다는 것은 조금은 아프고 슬픈 일이다.

그렇다하여도 이즈음 자기 믿음 또는 패거리 믿음 속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마치 중세처럼. 내가 교회를 가까이 하지 않은 까닭 가운데 하나다만.

나 역시 갇힌 믿음으로 우기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사람사는 모습은 어제보다는 늘 앞으로 나아가는 법이다. 비록 때론 뒤로 돌아가는 형국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왈 나선형 전진이라고 하던가? 그렇게 앞으로 나간다고 믿는다.

그 맘으로 작지만 내 소출의 일부를 떼어내 보내도 즐거운 한국 유튜브 채널들이 있다. ‘열린공감 TV’와 ‘김용민의 평화나무’ 등이다.

핸디 맨 김선생의 손이 닿은 끝은 참 보기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