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족(知足)에

눈길 닿는 곳마다 가을인 일요일 하루를 만끽하다. 쉬는 날 하루 계획에 온전히 들어맞게 시간을 보내고 난 후 맞는 저녁 시간에 맛보는 족함이 크고 또 크다.

애초 대단한 계획을 세운 일은 없다.

한 시간 늦게 아침을 맞는 일, 뜰에 낙엽 거두는 일, 아욱 상추 깻잎 쑥갓 무우 등속 가을 푸성귀 거두는 일, 누워 계시는 아버지 찾아 뵙고 점심 한끼 드시는 것 도와드리는 일, 돌아와 낮잠 한숨 즐기는 일, 아내와 함께 장보는 일, 푸성귀 다듬고 무우 김치 담그는 일, 이젠 길어진 밤시간 노장자(老莊子) 글귀 하나 곱씹어 보는 일.

그저 그렇고 그런 쉬는 날 하루 계획대로 보내고 맞이 한 왈 시월의 마지막 밤에 곱씹어 보는 말, 지족(知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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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

일요일 하루 쉼이 큰 축복으로 여겨지는 날이 있다. 그럴 땐 참 좋다. 주중 일터에서 마주하는 아침 하늘을 바라보며 속마음에서 감사가 일곤 할 때는 부끄럼이 따라오기도 한다. 내가 살아온 흔적에 비해 누리는 기쁨이 너무 큰 까닭이다.

어제 오후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만났던 무지개 뜬 하늘은 그야말로 경외(敬畏)였다.

무지개 – 성서 속 옛사람들의 고백이다.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 구름 사이에 무지개가 나타나면, 나는 너 뿐 아니라 숨쉬는 모든 짐승과 나 사이에 세워진 내 계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물이 홍수가 되어 모든 동물을 쓸어 버리지 못하게 하리라. When I send clouds over the earth, and a rainbow appears in the sky, I will remember my promise to you and to all other living creatures. Never again will I let floodwaters destroy all life. – 창세 9:14-15>

노아의 홍수 이후 성서 속 옛사람들이 고백한 신의 음성이다. 기억은 사람이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신이 잊지 않고 간직해 가는 것이라는 신앙고백, 바로 믿음이다. “내 계약을 기억하고…I will remember my promise…”의 주체는 내가 아니고 신이라는 바로 그 믿음.

모든 축복, 감사, 기쁨은 신의 기억을 전제로 한다는 생각에 이르면 그저 경외다.

무릇 믿음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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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함에

다 늦은 나이에 시간에 쫓기며 산다. 아직 생업(生業)과 생활(生活)에 얽매어 있는 탓이다.

어느새 해 짧아진 일요일 저녁, 반주 한잔에 묵은 피로를 덜다 생각난 후배에게 전화를 넣었다. 못 본지 두 해는 족히 되었다. 후배라 하지만 이젠 다 같은 늙막에 맞먹어도 좋은 친구다.

“오, 정선생 살아 계셨나?” 내 인사에 돌아 온 후배의 답, “가실 때가 되셨나? 웬 선생? 아이 졸라… 씨…. 개밥 사러 나갔다가… 거의 쌀….”

나는 그의 다급한 소리에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걸려 온 그의 전화 목소리. “아따…하여간…. 그 새를 못 참고 전화를 끊다니… 내가 싸는 소리 좀 들으면 어때서!”

웃으며 던진 내 답. “얼마나 거룩한 일이냐? 누군가의 먹을거리를 위해 막장에 이른 배설의 아픔을 참는다는 일이… 마침내 그 아픔이 환희로 바뀌는 더할 나위 없는 그 거룩한 시간을 내가 차마 어찌 빼앗겠냐?”

그렇게 낄낄거리다 ‘해 바뀌기 전에 얼굴 함 보자’는 인사로 전화를 끊었다. 그 해가 언제인 줄은 서로가 모른 채.

곰곰 따지고 보니 무릇 모든 거룩함은 거룩한 곳에 있지 않는 듯도 하고…

하늘

종종 하늘에 홀리곤 하는 버릇은 나이 예순을 넘기고 나서 생겼다.

홀려 바라보는 하늘엔 사람살이가 그대로 그려져 있곤 한다.

이른 나이에 그 하늘 그림 깨달아 ‘바닥이 하늘이다’며 평생 외길 걸어온 벗 하나 있다.

<누구든지 내가 없으면 세상도 없고 하나님도 없습니다…… 하늘에서 땅은 바닥이 아니라 하늘입니다……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하늘입니다…… 하늘이 내려와서 또 하나의 하늘인 민중을 섬기고 있는 바닥이 하늘입니다. 하늘나라는 하늘이 아니라 바닥에 있습니다.>

하늘 쳐다보며 생각 난 오랜 벗이 부른 노래이자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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