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反復)에

여러 날 전에 가게 손님 한 분이 자기 셀폰을 열어 사진을 보여주며 한 말이었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펜실베니아 지역에 내 소유의 샤핑센터가 있다우. 거기 있던 세탁소가 문을 닫아서 이런 저런 장비들이 놓여 있다우. 여기 사진들이 그것들인데… 혹시 당신이 관심이 있다면 가져다 쓰실라우?”

그래 틈나면 한번 가서 보겠노라고 답하고는 차일피일 하다가 오늘 다녀왔다. 딱히 내가 쓸 만한 물건은 없었다. 덕분에 아내와 함께 모처럼 필라델피아 한국 시장에 들러 장을 보았다.

몇 달러 짜리 물건 하나 들고서 들었다 놨다를 거듭하며 ‘먹곤 싶은데 뭐가 이렇게 비싸?’하는 아내에게 나는 퉁명스럽게 말을 던졌다. ‘아, 이 사람아! 먹고 싶으면 그냥 사!’. 허긴 이즈음 가는 곳마다 물가가 보통 오른 게 아니다.

오후에 이런 저런 뉴스들을 훑다가 눈에 들어 온 두가지.

하나는 어제 날짜 LA Times에 실린 한인 세탁인들의 이즈음 모습에 대한 짧은 르포 기사. 남가주 한인 세탁인들 몇 명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그들이 바라보는 내일을 이야기하는 기사였다. 그저 내 이야기이기도 하고, 내 주변에 있는 한인 세탁인들의 이야기이기도 하여 고개 끄덕이며 읽었다. 기사에 나오는 낯익은 이름이 반갑기도 했고.

기사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문장. “The dry cleaning business ends with me,” Roh said. “That’s OK, because my children are doing something better.”

어느 세대건 내일의 희망으로 사는 것이지만, 저무는 한 세대에 속한 이들 모두에겐 회한이 묻어 있게 마련.

연합 뉴스 발 또 다른 뉴스 하나는 나를 잠시 거의 반백 년 전으로 되돌려 놓았다.

박정희의 유신이 한참 기승을 부릴 때 여차저차 하여 군에 들어 간 나는 81mm 박격포 소대 말단 소총수였다. 당시 중대 일반병들 가운데 대학 재학 또는 졸업자는 내가 유일했다. ‘저 놈은 곧 다른 좋은 곳으로 갈 것’이라는 말과 함께 거의 왕따로 시작했던 81mm 소대 생활은 만 34개월 이어져 그 곳에서 제대를 했다.

81mm 박격포의 무게는 60kg가 조금 넘었다. 포다리, 포열, 포판으로 삼등분해서 행군할 때면 우린 그걸 메고 다녔다. 삼등분한 포 무게 20kg에 소총과 배낭과 철모 등, 그렇게 나는 내 몸무게의 반이 훨씬 넘는 무게를 이고 지고 20km, 30km, 100km 행군을 했었다.

우리들이 지고 메고 다녔던 박격포는 1940대 초 제작한 무기로 이차 대전과 한국전쟁 때 쓰던 것들이었다. 그걸 21세기 최근까지 젊은 애들이 이고 지고 다녔다니 그게 참 믿기지 않았다.

이젠 참 놀랄 만한 앞선 나라가 되어 자랑스런 고국인 동시에 이국이 된 내 정든 고향 소식들인데 종종 너무 더딘 변화엔 곤혹스럽기까지 하다.

아직도 박정희 흉내가 먹히는 세상에 이르면 때론 분노가 앞서기도 한다.

저녁나절, 아내가 주문한 작은 펌프 분수를 바라보며 든 생각 하나. ‘사람살이 어찌 보면 똑같거나 엇비슷한 반복의 연속, 그 반복을 바라보는 생각 하나 바뀌어 어느 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거’

새소리와 익어가는 텃밭 작물들을 보며 반복의 주체들은 늘 변한다는 위로를 받는 팔월 초하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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