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미소리

포플러와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빼곡했던 내 어린 시절 놀이터에 매미소리가 가득차면 나는 미루어 두었던 여름방학 숙제에 매달리곤 했다. 매미소리는 여름방학이 끝났음을 알리는 전령사였기 때문이다.

신촌 연세대 뒷산은 내 어린 시절의 놀이터였다. 매미와 잠자리들을 잡으며 놀다가 상감(어린 우리들은 학교 수위를 그렇게 부르곤 했었는데 거기에 마마를 붙여 상감마마라 부르기도 했었다. 일제시대에 쓰던 산감(山監)을 그리 불렀던 것이다.)에게 잡히면 호되게 곤욕을 치루기도 했었다.

1960년 대 초였으니 어느새 육십 여년 전 일이다.

신촌, 내 고향이자 내 아버지의 치열한 삶의 터전이었다. 신촌역 앞 아버지의 작고 좁은 도장포겸 인쇄소도 내 어린 시절 놀이터였다. 활자로 한자를 가르쳐 주던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어린 시절과 일본 탄광 노동 경험과  상이 용사가 된 전쟁 이야기들을 들었던 공부방이기도 했다. 그렇게 1930년대 이후 아버지의 경험은 내 삶에도 이어졌다.

이즈음 아버지가 누워 계신 병실은 전망이 아주 좋다. 이즈음 내 생활반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보이는 것은 온통 나무 숲이지만 , 내 집과 일터와 이즈음 오고 드나드는 곳들을 환히 알 수 있는 방이다. 그 방에서 아버지와 나누는 이야기는 거의 없다. 이즈음 들어 이따금 묻곤 하신다. ‘나 몇 살이야?’ 그러면 나는 되묻는다. ‘아버지 언제 났는데?’ 나이는 오락가락 하시지만 생년에 대한 기억은 아직 또렷하시다. ‘일천 구백…. 이십…. 육년?’

늦은 저녁 딸아이의 전화를 받다. 결혼 날짜를 코 앞에 둔 딸아이는 이즈음 전화가 잦은 편이다.  내가 차마 가 닿지 못할 아이들이 누릴 내일을 생각하며 잠시 신(神)을 찾는다.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혼잣말, ‘참, 백 년이라… 별거 아니네’

뜰엔 아내가 좋아하는 바람개비가 쉬지 않고 돌고, 매미소리 가득한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