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서 참 좋은 벗들이 있음은 내가 살며 누리는 복 가운데 하나다. 더더구나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엇비슷한 시각과 시선으로 함께 바라보며, 그 뜻을 헤아리는데 다툼이나 삐짐 없이 훅 또는 맘껏 제 속내 들어낼 수 있는 벗들임에랴! 그저 만나서 참 즐거운 일이다.

펜데믹 탓으로 거의 일년 반 만에 이루어진 모임이었다. 그저 소소한 서로의 일상에서부터 우리들의 공동 목표에 대한 이야기들로 모처럼 만남의 기쁨을 한껏 즐겼다.

나야 어쩌다 다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 하나 들고 끼여들은 처지이지만, 함께 한 벗들은 지난 삼, 사십 년 동안 필라델피아를 근거로 평화, 통일, 민주, 인권 등등 거대 담론에서부터 그저 사람 답게 하루를 살아가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들과 그 이야기에 이어진 행동들을 함께 해 온 이들이다.

벗들은 지난 수 년 동안 한 푼 두 푼 작지만 뜻있는 종자 돈을 모아왔다. 이는 우리 다음 세대들이 우리 세대 보다는 좀 더 나은 환경에서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 만드는 일에 나설 수 있도록 기반을 닦고자 함이었다.

앞으로의 일이야 어찌 알겠느냐만, 그저 나름의 역사성을 곱씹으며 오늘에 충실한 벗들이 참 좋다.

이런 저런 사는 이야기와 건강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한 친구가 아직은 검은 머리인 내게 물었다. ‘염색 안하시죠? 어떻게 아직도…’. 이어진 내 짧은 대답, ‘아! 머리를 안 쓰고 사니까요.’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거나 머리털이 아직은 까만 것은 내 노력과는 아무 상관 없는 그저 타고난 체질일게다. 그렇다하여도 이즈음 거의 머리를 안 쓰고 사는 것은 사실이다.

어찌보면 내 일상과 세상사(事)는 내가 살아 온 지난 시간들과 다름없이 혼돈(渾沌)의 연속이지만, 그냥 그대로 그 혼돈을 받아 들이며 그저 내게 주어진 시간들을 즐기려 하는 편이다. 머리 쓰지 않고.

그러다 이 나이에 장주(莊周)를 만나면 그 또한 복일 터이니.

이즈음 내 삶의 또 다른 참 좋은 벗들, 내 뜨락에 푸성귀와 꽃과 풀잎들.

벗들로 하여 누리고 있는 내 복에 대해 그저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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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식

외식(外食)은 팬데믹 이후 처음이니 가히 15개월여만이다. 간혹 take-out한 경우는 있었지만 식당 테이블에 앉아 본 일은 참 오랜만이다.

집에서 아주 가까운 이웃 마을을 찾아 여유로운 저녁시간을 누리다. 작은 마을 금요일 저녁은 팬데믹과는 상관없는 해방구였다.

거리 구경을 하며 걷는 우리 내외를 향해 누군가 전하는 인사말. “아유~  안녕하세요!” 지나가던 차안에서 소리치는 귀에 익은 한국어였다.  연(緣)의 끈들이 이어져 있기에 살아있음이다.

“우리가 부모님들 처럼 함께할 수 있을까?” 아내의 물음에 나는 차마 강한 부정은 못하고 웃었다. 내 부모는 70년, 처부모는 60년 해로를 하셨는데… 우리 부부가 그걸 넘으려면 내 나이가?… 쯔쯔쯔…. 하여 웃다.

바라기는 이렇게 저렇게 얽힌 연들과 결코 내려놓을 수 없는 이런저런 소소한 시름과 걱정들 속에서도, 우리 내외가 여유롭게 시간을 즐기고 감사하는 날들이 어제보다는 넉넉해지기를.

모처럼의 외식에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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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밑의 개들

글의 시작은 삶의 처절함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가족의 피에 펜을 찍어 써내려 가는…그러나 꾹 참고 써야했습니다. – 7쪽,  기막히고 황당했다. – 22쪽,  (그들은)야비했다. -81쪽>

글은 벼랑 끝에 선 절박함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을 이어 전한다.
<서둘러야 했다. 집중해야 했다. …버텨야 했다.  237쪽>

글 곳곳에는 곤고한 삶을 지탱해 주는 버팀목 같은 고백이 이어진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 101쪽, 고마웠다. 239쪽, 가슴 찡하게 감사했다. 278쪽>

그리고 글 말미에 적힌 주인공의 다짐이다.
<‘불씨’ 하나만 남아 있으면 족하다. 이 불씨 하나를 꺼뜨리지 않고 소중히 간직하며 주어진 삶을 살 것이다. 280쪽>

그렇게 책 <조국의 시간>을 덮었다.

책을 읽는 내내 내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던 장면, 바로 ‘십자가 밑에서 침 흘리는 개떼들’이었다.

<형벌의 수단으로써 십자가는 고대에 널리 퍼져 있었다. … 그것은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형벌이었으며 또 그런 목적으로 유지되었다….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무엇보다도 … 특히 유대의 불순분자들에게 과해졌다. 그것을 사용한 주된 이유는 소위 그것이 가지고 있는 억제력으로서의 탁월한 효과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십자가들에 달린 희생자들이 야수들과 새들의 먹이로 제공된다는 것은 일반화된 상황이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그(십자가에 달린 이)의 수치는 완전한 것으로 만들어졌다.> – 마틴  헹엘(Martin Hegel) 이 쓴 <고대 십자가 처형과 십자가 메시지의 오류Crucifixion in the Ancient World and the Folly of the Message of the Cross>에서

<로마의 극형 세 가지는 십자가와 화형과 야수였다. 이것들을 최악의 것이 되게 한 것은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비인간적인 잔인성이나 공개적인 명예 실추 때문이 아니라, 이런 처형의 마지막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아 매장할 수 없게 된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십자가형에 대하여 우리가 흔히 잊어버리는 것은 이미 죽은 자나 죽어 가는 자들의 위에서 울어 대고 밑에서 짖어 대는, 썩은 고기를 먹는 까마귀와 개의 존재이다.> –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이 쓴 예수 사회적 혁명가의 전기(Jesus A Revolutionary Biography) 에서

나는 글의 주인공처럼 소중하게 간직하고 남길 ‘불씨’ 하나 품지 못하는 삶을 살아왔다.

다만 십자가 밑에서 침 흘리는 개떼들 같은 삶을 살지는 말아야 할 터이다. 비록 내 초라한 일상 속에서만이라도.

*** 책 <조국의 시간> 마지막 표지에 실린 도서출판 한길사 광고에 ‘한나 아렌트’의 명저들이 실린 발상에 탄성이…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삶은 쉽게 십자가 밑의 개떼들로 변할 수 있다는 아렌트의 가르침과 이어져 참 좋았다.

그 나라

장인 때 한 번, 어머니 때 두 번, 아버지 덕에 또 한 번. 네 군데 서로 다른 노인 재활원을 경험한다. 아버지는 운도 참 좋으시다. 네 군데 중 시설이나 분위기나 환자의 느낌과 반응 모두 가장 좋다. 엿새 만에 병원에서 재활원으로 옮기신 아버지의 회복 속도는 놀랄만치 빠르다.

삶에 대한 강한 의욕, 철저한 자신의 몸 관리,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그 속도를 더하는 듯하다.

허나 식사를 하시는 모습을 바라보는 내 속은 그저 애틋하다.

늦은 밤, 이즈음 새로운 느낌으로 다시 책장을 넘기고 있는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의 ‘역사적 예수 The Historical Jesus’ 속 글귀 하나를 넘기지 못하고 오랜 동안 곱씹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미래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통찰력이 아니라 현존하는 그 나라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예수에게 있어 오늘을 간절한 마음으로 사는 이들의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 있는 나라라는 크로산(Crossan)의 사족(蛇足)은 오늘 밤 내게 절대적으로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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