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일주기에 맞는 어머니 주일 아침, 어머니 생각하며 가게 손님들에게 편지를 띄우다.
제 어머니는 문맹이셨습니다. 초등학교 교육조차 받지 못했던 어머니는 영어는 물론이고, 한글도 읽거나 쓰지 못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어머니는 지극히 상식적인 분이셨습니다. 사람은 부지런해야 한다거나,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남의 것을 탐해서는 안된다거나 부족해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등의 지극히 상식적인 것들에 충실했던 분이셨습니다. 때때로 엉뚱한 당신의 고집조차 상식적인 사람살이라고 우기시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딸 셋, 아들 하나를 다 키우시고 난 뒤인 쉰 넘은 나이에 한글을 깨우치셔서 성경도 읽게 되셨고, 영어로 당신의 이름 정도는 쓰실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제일 으뜸가는 관심은 가족이었습니다. 평생 제 아버지의 하루 세끼 식사는 물론 자식들의 건강과 안녕이 가장 우선하는 그녀의 관심사였습니다. 세 딸들은 비교적 그런 어머니의 바램대로 잘 살아온 듯 합니다만, 아들인 저와는 그렇게 잘 맞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젊은 시절에 저는 어머니의 속을 많이 썩였었습니다. 제 꿈이 너무 컷던 탓이었는데, 어머니는 그런 제 꿈들을 헛 꿈이라고 말하곤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먼저 미국으로 이민을 오셨고, 어머니의 초청으로 내가 크게 내키지 않았던 미국 이민을 오던 때 어머니가 제게 하셨던 말씀이랍니다. “이놈아! 이젠 헛 꿈들일랑 다 버리고 열심히 일하고 살어! 작업복 몇 벌만 가지고 와서 열심히 일하며 살아!”
그렇게 시작된 세탁소랍니다. 그 무렵 윌밍톤과 뉴왁시 일대에는 70군데 가까운 세탁소들을 한인들이 운영하고 있었답니다. 서로 간의 정보도 교환하고 상호 이익을 위해 힘을 합쳐 보자는 생각으로 세탁인 협회를 만들고, 나아가 델라웨어 한인 사회 일을 맡아서 하고, 필라델피아 인근 한인들을 위한 신문을 만드는 저를 보며 어머니는 혀를 차셨습니다. “쯔쯔, 네 팔자다! 아직도 헛 꿈을 버리지 못하니… “
그런 어머니를 제가 이해하게 된 것은 제 나이 60이 거의 다 되어서 였습니다. 세탁소가 제 천직임을 깨달은 것도 그즈음이었습니다. 이젠 그 세탁협회도 없어지고 당시 함께 했던 사람들 중 아직도 세탁소를 하고 있는 사람은 제가 유일하답니다.
오늘 저녁 어머니를 뺀 저희 모든 가족들이 함께 한답니다. 비록 모두 함께 한자리에 모이지는 못하지만 온라인 Zoom Meeting으로 함께 한답니다. 아버지와 제 형제들과 어머니의 손주들과 증손주들이 한사람도 빠짐없이 함께 한답니다.
어머니가 떠나신 지 일년이 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저는 어머니가 헛 꿈이라고 말씀하신 그 꿈은 버리지 못했답니다. 다만 더 이상 그 꿈을 쫓지는 않는답니다.
어머니가 살아 생전 지켜왔던 상식들에게 만이라도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제가 아직 세탁소의 하루 하루를 즐거워 하며, 오늘 아침 당신에게 이 편지를 쓸 수 있는 것은 모두 제 어머니 덕입니다. 그래 감사하는 하루랍니다.
그 맘으로 당신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리며.
당신의 세탁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