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冊

워낙 이렇다하게 가진 것 없는 삶인데도 집안을 휘이 돌아보면 온통 정리하고 버려야 할 것들 투성이다.

그 중 하나가 책들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여러 번 ‘갖다 버리자’라는 충동을 불러 일으키곤 했던 녀석들이 바로 책이다.

그리 많지는 않지만, 행여 우리 부부 노년을 위해 이사라도 할라치면 가장 크게 힘들일 듯 하기도 하거니와, 이젠 제 아무리 선견(先見)이라도 남의 소리에 귀 기울일 나이는 지난 듯하다는 건방진 생각도 들고하여 일곤하는 충동이다. 그보다 가장 큰 까닭은 이젠 책장을 넘기는 지적 사치보다는 그저 시간 나는대로 나와 이야기하는 순간들을 즐길 때가 아닐까 하는 겉늙은 생각 때문이다.

허나 아직은 차마 책들을 싣고 가까운 재활용품 쓰레기 처리장을 찾는 용기를 내지는 못한다. 다만 새로 책을 구입하는 일은 극도로 자제 한다.

며칠 전 필라 세사모(세월호를 기억하는 필라델피아 사람들 모임) 이야기방에 멤버 한 사람이 공지 글을 남겼다. 그이의 사정상 갖고 있는 책들을 정리해 처분하고자 하는데 혹시 원하시는 분들이 계시면 나누어 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꼼꼼히 정리해 놓은 거의 오백 여권에 달하는 그이가 처분하려고 하는 책 목록을 보면서 혹 하는 책들이 몇 권 있었다만 아니다 싶어 참았다.

그리고 얼마 후 이야기방에는 하나의 제안과 그 제안을 구체화 하는 의견이 올라왔다. 그이가 정리하려고 하는 책들을 한 곳에 모아 도서관을 만드는 시초를 만들어 보자는 제안이었는데, 필라델피아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풀뿌리 단체 ‘우리센터’가 그 일을 맡아서 해보자는 의견이었다.

<저소득층, 이민자, 영어 구사가 제한적인 이들, 서류 미비자, 여성, 노인 및 청소년을 포함해 우리 사회 내 가장 취약한 구성원들이 겪는 문제들의 해소를 위해, 우리 공동체 구성원들의 주인의식과 역량을 강화하고 함께 행동>하려고 노력한다는 ‘우리센터’가 그 일을 맡기엔 아주 적합하다는 생각에 나도 적극 동의하였다.

그 동의의 뜻으로 그 동안 억제하고 있었던 책 구입을 서둘렀다. 재활용품 쓰레기장이 아닌 누군가 다른 이들의 손에 들려 책장이 넘어가는 일이 일어난다면  오늘의 내 욕심이 과한 것만은 아닐 듯하다는 자족으로.

그 구입 리스트에 신간으로 하나. 조국이 쓴 <조국의 시간>을 더하다.

오후에 뒷뜰 언덕배기 잡풀들을 베다가 자칫 다칠 뻔한 이름 모르는 꽃과 평소와 다른 방향으로 처마 끝에 앉아 있는 새를 바라보며 든 생각 하나.

‘이왕 사는 거, 사는 날까지 나와 이웃과 선견 소리에 세심하게 그저 듣고 보기만이라도 할 수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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