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6일, 죽음 또는 삶

매사 늦된 나는 육십 대에 이르러서야 죽음에 대한 생각을 조금은 진지하게 생각 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이 육십이 지날 무렵부터 처부모와 부모들이 이런 저런 노환을 만나게 되어, 한 분 두 분 떠나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 되었다. 이즈음은 아흔 다섯에 막 하나를 더 하시는 아버지를 가까이 보며 그 죽음이란 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그렇게 지나가는 내 육십 대를 통해 죽음은 내게도 이젠 낯설지 않은 이웃으로 다가온다.

어머니 떠나신지도 어느새 일년이 가까이 다가와 이즈음 가족들끼리 조촐히 온라인 모임으로 나마 일주기를 기리려고 이런 저런 준비를 하고 있는 중에, 꺼내 든 책 한권 김진균이  쓴 <죽음과 부활의 신학>이다.

<성서가 말하는 영원한 생명은 죽지 않고 끝없이 연장되는 삶의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희망과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삶을 가리킨다.

그것은 시간의 끝없는 연장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이웃과 교통하며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세우는 삶의 깊이 내지 ‘삶의 질’을 말한다. 영원은 현재의 삶의 끝없는 연장에서 경험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강도에서 경험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신빙성 있는 것은 사랑이다…… 이 세상의 연약한 피조물들에 대한 사랑 안에서 영원한 생명이 현재적으로 경험된다.>

<영원한 생명은 자기 안에 폐쇄되어 있는 개인의 고립된 내적 삶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피조물들 안에 있음이요, 그들 존재와 함께하는 참여다.

그러나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고통을 당하며, 그들의 생명이 눈에 보이지 않게 파괴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적으로 경험하는 영원한 생명은 모든 피조물들의 생명이 회복되고 구원 받는 것을 동경하며, 그들의 생명을 파괴하는 죽음의 세력에 맞설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을 극복하고자 노력할 수 밖에 없다. 예수도 그러하지 않았던가!

다른 피조물들이 당하는 고난과 죽음에서 눈을 돌리고, 자기 혼자 하나님과 수직적 관계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착각이다.>

그러고보니 오늘이 4월 16일.

세월호 아이들이 부활하는 사건을 만들어 내는일, 그것이 예수쟁이 흉내라도 내려는 내가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태도가 아닐런지….

죽음 또는 삶에.

내 책상 머리에서 쯔쯔쯔 혀 차시는 어머니 목소리 들으며.

‘이 눔아! 너만 잘 해봐!’

>>> 함께 세월호 아이들과 가족들의 아픔을 나누다가 먼저 떠난 이들도 생각난다. 그 이들의 춤과 가락은 살아있는 우리들에게 또 하나의 힘으로 살아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