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아직 팬데믹 이전과 같은 형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즈음 들어 내 세탁소도 많이 바빠졌다. 백신 접종율이 급속하게 늘어나면서 주정부가 내놓은 거리두기 완화책들의 영향도 있었을게다. 빠르게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듯한 한 주간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바쁜 세탁소의 하루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거센 봄바람에 아직 푸른 옷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한 나무들이 휘청이며 제 몸 가누지 못한다.

가만 돌아보니 십년에 한 번 씩 겪어 온 일인 듯 하다. 거센 바람에 휘청거리며 곧 쓰러질 듯한 나무들처럼 내 생업인 세탁소 경영이 어려웠던 때가 십년 주기로 다가왔었던 것 같다.

두 번은 외적 요인으로 분 바람이었고, 한 번은 내가 일으켰던 바람이었다. 그렇게 삼십 년 넘는 세월이 흘렀고, 나는 다시 세탁소의 하루를 맞는다. 어제 보단 바쁘게.

그게 또 감사다.

저녁 나절 바람 잔 내 뜨락엔  봄이 가득하다.

뒤뜰 이웃집 담장 위엔 혼밥 만끽하는 다람쥐 한 마리 세상 부러울 게 없단다.

때론 바람에 맞서 보기도 하고, 바람을 타기도 하며 예까지 왔다. 내 생업(生業).

그래 또 감사다.

바람 몹시 분 사월 마지막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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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해가 사뭇 길다. 저녁상 물리고 뒤뜰에 한동안 맥없이 앉아 있어도 저물지 않는다. 어미가 아이들을 부르는지 아님 아이들이 어미를 찾는지, 누군가를 찾는 저녁 새소리에 생각이 잠시 내 어릴 적  옛날로 돌아갔다 오곤 한다. 하늘엔 비행기들이 긴 발자국 남기고 연이어 날아간다. 매일 저녁 그렇게 날아갈 듯 한데 나는 마치 처음 본 일인 양 신기해 한다.

배우 윤여정에 대한 뉴스를 본 때문인지 생각이 한 동안 1970년대로 돌아가 맴돈다. 돌아볼수록 내 삶 가운데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이었다. 스물 나이라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아련한 세월에 대한 추억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무렵에 만나고 배웠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은 정말 아름답게 새겨야 마땅하다.

따지고 보면 내가 뭘 알았겠나. 반독재, 민주, 평화, 통일, 인권, 평등, 해방 등등 차마 감당 못할 거창한 구호들과 함께 했던 사람들과의 추억인데, 돌이켜 곰곰 생각해 보면 그게 그리 거창할 것도 없는 그저 만나고 생각하는 사람들 끼리 서로 사람 대접하며 사는 세상 꿈꾸는 일. 일컬어 하나님 나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시간이 흘러 이제 2021년, 그 때 만났던 많은 선생님들은 이미 세상을 뜨셨고, 또래 친구들 역시 이젠 사람 보다는 신(神 ) 또는 자연의 소리가 더 가까이 들릴 나이들이 되었다.

왈, 반세기만에 세상은 참 많이 좋아졌다. 배우 윤여정의 뉴스로 그것을 다시 확인한다.

팔자라기도 하고,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고도 하고, 또 누군가들은 신의 뜻이라고도 하더라만, 그게 다 사람이 저 자신도 모르게 제 할 일 다 하고 난 뒤에 다다른 세상이 아닐까?

날아가는 비행기 꼬리는 길지만 사라지는 것 또한 순간이다. 허나 아름다움으로 남는 것은 사라진 긴 꼬리 뿐이다.

배우 윤여정이 삶의 허기로 만든 오늘의 뉴스를 보며, 1970년대 그 시절 벗들과 선후배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 그 꿈 외롭게 간직하며 사는 얼굴들을 떠올리며…

해가 사뭇 긴 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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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에

어느 순간 세상이 바뀌어 장사에 일정한 순환 원칙이 무너진 지 오래 되었다만,  내 생업인 세탁업은 여전히 날씨에 따라 그 날의 매상이 널을 뛰곤 한다. 하여 날씨에 매우 민감한 편이다. 그렇다 하여도 일기예보를 매일 들여다 볼 정도로 예민하지는 않다. 그저 그런가 보다 할 정도이다.

그런데 이즈음은 하루에도 몇 번씩 그 날의 일기 예보는 물론이요, 한 주간의 날씨 나아가 한 달 예보까지 들여다보기 일쑤이고, 때론 시간대 별 예보까지 챙기기도 한다. 물론 내 생업과는 전혀 관계없이 생긴 습관이다.

얼치기라면 차라리 중간이라도 가는 법이지만, 이건 생짜 초보가 마구잡이로 땅을 헤집어 놓는 형국이라 하늘과 땅의 흐름에 귀라도 기울여야 마땅하다는 생각 때문에 이리 되었다.

유튜브나 구글신이 가르쳐 주는 것은 터무니 없을 정도로 수 많다만, 따지고 보면 모든 결과는 오로지 나에게 달린 일이어서 매사 겁 많고 생각 많은 내가 쳐다보는 것이 하늘이 되었다.

손바닥 만한 채마밭과 화초밭 가꾸는 일에 이리 소심한데도, 이 나이까지 이만큼 산 것은 모두 내가 믿는 신(神) 덕이다. 이 덕담 만큼은 살아있는 한 부끄럽지 아니 할 일이다.

못된 내 성정이 늘 그래왔듯, 결과에 대한 두려움은 그리 없다. 그저 흙을 뒤엎고, 새 흙을 섞어 내 뜻대로 고른 그 한 뼘 땅 위에 싹을 틔우고 잎과 꽃과 열매를 맺는 그 지속되는 순간 순간들 속에서 느끼는 기쁨과 즐거움을 만끽해 보자는 내 욕심에 충실할 뿐이다. 그 욕심 속에서 문득 문득 마주하는 신(神)을 만나는 기쁨이라니. 하여 하늘을 본다.

화초와 채마는 욕심을 부려도 그리 후회될 리 크게 없을 듯 하여 마구잡이로 용기를 내었다만, 아직 나무는 이른 것 같아 올해는 화분에 작은 묘묙들을 키워 볼 요량이다.

그렇게 오늘 오후에 흙을 만지며 스쳐 간 생각 하나.

신(神)은 믿어야 할 나의 대상이 아니라, 나를 향해 묻고 있는 그의 뜻을 헤아려야 할 물음  – 바로 그 물음 자체일 수도.

날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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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사월

내 젊은 시절의 4월은 늘 추웠다.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추위를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1960년 4월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당시엔 새학기가 4월에 시작되었다. 왼쪽 가슴에 커다란 흰색 손수건을 달고 운동장에서 ‘앞으로 나란히’ 등의 제식과 체조, 그리고 동요 등을 배우다 처음 교실을 배정받아 들어가던 날, 바로 4월 19일이었다.

전쟁이 막 끝날 무렵에 태어난 우리 또래들에게 학교와 교실은 많이 부족했다. 본교와 분교로 교사(校舍)가 나누어져 있었고, 더하여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등교를 하였다. 나는 오후반이었는데, 그날 어머니가 내게 빨리 서두르라고 재촉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게 나섰던 등교길인데 내 걸음은 신촌 노타리(당시엔 노타리가 아닌 버스 종점이었다.)에서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무수한 대학생들이 어깨 걸고 문안(당시엔 시내를 문안이라 했다.)으로 달려가는 행렬이 내 앞을 가로 막고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그 행렬이 끝나고서야 향했던 학교 운동장은 휑하니 텅 비어 있었다.  아이들은 이미 배정된 교실로 다들 들어간 후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운 기억은 없다. 그저 서늘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었을까.

그날 밤이던가 그 이튿날이던가, 내게 자전거를 태워 주곤 하던 고등학생 동네 형이 문안에 나갔다가 죽었다는 소식에 동네 아줌마들이 혀를 차던 일도 기억난다.

머리 굵어진 어느 해 4월부터 나는 벗들과 함께 어깨 걸고 매캐한 최루가스로 가득한 그 신촌 거리를 뛰어 다녔다. 1980년 4월, 이미 나이 든 축에 속한 나는 여전히 그 거리를 뛰었었다. 그리고 정말 아팠던 5월을 맞았던 기억들이 새롭다.

그랬다 젊은 시절 내가 겪은 4월은 늘 추었다.

이제 늙막의 선을 딛고 선 나이에도 4월 소식은 여전히 몸 움추려 드는 서늘함이 이어진다.

그래도 언제나 4월엔 꽃들이 핀다. 내 젊은 시절의 신촌이나 오늘 여기 내가 서 있는 델라웨어나 꽃들이 핀다.

꽃은 추웠던 4월의 기억을 잊게 하곤 한다. 오늘은 꽃들이 내 4월의 추억들을 되새겨 놓았지만.

<꽃과 과일은 언제나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다. 꽃은 세상의 모든 쓸모 있는 것들을 넘어서는 아름다운 빛으로 도도하기 때문이다. Flowers and fruits are always fit presents; flowers, because they are a proud assertion that a ray of beauty outvalues all the utilities of the world.”> – 미국이 처음 시작할 무렵에 큰 생각으로 노래하던 사람, 시인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의  노래이다.

에머슨의 노래처럼 꽃의 도도한 아름다움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취하기 위해, 4월이 더는 춥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 어느 곳에 사는 누구에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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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6일, 죽음 또는 삶

매사 늦된 나는 육십 대에 이르러서야 죽음에 대한 생각을 조금은 진지하게 생각 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이 육십이 지날 무렵부터 처부모와 부모들이 이런 저런 노환을 만나게 되어, 한 분 두 분 떠나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 되었다. 이즈음은 아흔 다섯에 막 하나를 더 하시는 아버지를 가까이 보며 그 죽음이란 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그렇게 지나가는 내 육십 대를 통해 죽음은 내게도 이젠 낯설지 않은 이웃으로 다가온다.

어머니 떠나신지도 어느새 일년이 가까이 다가와 이즈음 가족들끼리 조촐히 온라인 모임으로 나마 일주기를 기리려고 이런 저런 준비를 하고 있는 중에, 꺼내 든 책 한권 김진균이  쓴 <죽음과 부활의 신학>이다.

<성서가 말하는 영원한 생명은 죽지 않고 끝없이 연장되는 삶의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희망과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삶을 가리킨다.

그것은 시간의 끝없는 연장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이웃과 교통하며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세우는 삶의 깊이 내지 ‘삶의 질’을 말한다. 영원은 현재의 삶의 끝없는 연장에서 경험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강도에서 경험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신빙성 있는 것은 사랑이다…… 이 세상의 연약한 피조물들에 대한 사랑 안에서 영원한 생명이 현재적으로 경험된다.>

<영원한 생명은 자기 안에 폐쇄되어 있는 개인의 고립된 내적 삶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피조물들 안에 있음이요, 그들 존재와 함께하는 참여다.

그러나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고통을 당하며, 그들의 생명이 눈에 보이지 않게 파괴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적으로 경험하는 영원한 생명은 모든 피조물들의 생명이 회복되고 구원 받는 것을 동경하며, 그들의 생명을 파괴하는 죽음의 세력에 맞설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을 극복하고자 노력할 수 밖에 없다. 예수도 그러하지 않았던가!

다른 피조물들이 당하는 고난과 죽음에서 눈을 돌리고, 자기 혼자 하나님과 수직적 관계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착각이다.>

그러고보니 오늘이 4월 16일.

세월호 아이들이 부활하는 사건을 만들어 내는일, 그것이 예수쟁이 흉내라도 내려는 내가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태도가 아닐런지….

죽음 또는 삶에.

내 책상 머리에서 쯔쯔쯔 혀 차시는 어머니 목소리 들으며.

‘이 눔아! 너만 잘 해봐!’

>>> 함께 세월호 아이들과 가족들의 아픔을 나누다가 먼저 떠난 이들도 생각난다. 그 이들의 춤과 가락은 살아있는 우리들에게 또 하나의 힘으로 살아난다. <<<

감사에

뒷뜰 언덕배미 대나무 숲을 베어낸 지 두 해 째. 대나무 뿌리는 여전히 땅속에서도 푸른 대에게 생기를 불어 넣고 있다. 대나무 뿌리를 완전히 없앨 수 있다는 숱한 비법과 사례들을 구글과 유튜브를 읽고 보곤 하였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딱히 많지 않았다.

하여 조금 긴 호흡으로 마음 다잡으며 실로 무지하게 맨땅에 헤딩하는 방법을 택하기로 하였다. 삽과 곡괭이 들고 뿌리를 들어내는 일을 시작하자 마자 ‘아차!’ 싶은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내딛은 걸음인지라 갈 데 갈지 가보자고 삽질을 잇는다.

대나무 뿌리는 아주 견고한 동맹으로 이어져 있다. 그 뿌리들의 연결 고리를 끊어 캐내는 일을 마치기 전에 내 어깨와 팔이 먼저 지쳐 포기할 수도 있겠다는 불안함이 일만큼 견고하다.

하지만 긴 싸움으로 가자고 맘 먹었으니, 비록 나도 이제 노년의 초입이지만 대나무 뿌리는 이길 수 있으리라.

군데군데 대나무 뿌리들의 연결 고리를 끊어내어 부근의 땅을 한바탕 엎어 들어낸 후, 내 가게에 넘쳐나는 종이상자를 깔고, 그 위에 새 흙을 덮어 내가 가꿀 수 있는 아주 작은 새 세상들을 만들어 본다.

대나무 뿌리를 거두어 낸 새 세상에 야채와 화초 씨와 모종을 심어 가꾸어 보는 일인데, 그 삽질이 만만치 않다.

허리와 어깨 두드리며 내게 넘쳐나는 감사하는 맘 두 가지.

큰 나무들은 아직 내가 격어보지 않아 모를 일이지만, 야채나 화초들은 고작 몇 인치 정도의 흙을 파면 잘 자랄 수 있거니와, 대나무 뿌리라고 해 보았자 그 역시 일 피트만 파면 끝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감사가 첫째인데, 감사의 까닭은 신은 그리 깊은 곳에 진리를 묻어 놓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

또 하나의 감사는 이 나이에 흙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 언젠가 내가 될 흙과 미리 벗이 되어 지내는 시간들에  대한 이 큰 감사라니.

하여 내가 마땅히 없애려 하는 대나무 뿌리에게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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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사(獻詞)

여기서 산지 지난 삼십 오 년 동안 많은 한국 뉴스들을 보고 들었다. 그 가운데 내가 가장 아파하며 분노했던 뉴스는 세월호 참사 소식이었다. 21세기 대명천지에 삼백 명이 넘는 젊디 젊은,  아니 어리고 어린 아이들이 생수장 되는 현장이 실시간 영상으로 중계되는 일이 한국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 당시 나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아픈 뉴스는 그 이전에도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했던 때였다. 그 때 그 아픔은 아린 것이였지만, 세월호 참사는 분노였다.

그 날 이후 어찌어찌 인근에 사는 맘 맞는 벗들이 모여 그 사건을 잊지 말고 기억하면서 가족들을 위로하며, ‘도대체 왜?’라는 물음에 응답을 얻을 때까지 함께 해 보자고 틈나면 함께 모임을 이어왔다.

아이들이 그렇게 떠난 지 칠 년 째 되는 날을 앞두고 벗들과 오랜만에 함께 했다. 지난 해 삼월 팬데믹 이후 처음 만나는 얼굴들이 많았다.

펜실베니아 밸리 포지 국립 역사 공원(Valley Forge National Historical Park) 미국 독립 전쟁을 기념하는 상징으로 세워진 독립 기념문(The United States National Memorial Arch) 앞에서 였다.

기념문 상단에 새겨진 글귀가 썩 맘에 들었다.( Naked and starving as they are We cannot enough admire The incomparable Patience and Fidelity of the Soldiery) 독립전쟁 당시 많은 군인들이 기아 질병 영양실조 또는 헐벗음으로 죽음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를 상기하며 쓰여진 헌사이리라.

나는 그 헌사를 세월호 가족들 그리고 그 가족들과 함께 하는 벗들과 나누는 뜻으로 새겼다.

지난 칠 년 동안 헐벗고 굶주림 보다 더한 질시와 조롱 속에 이어 온 삶을 위로 한다기 보다는 , 가족들의 더할 나위없이 크나 큰 인내와 끝내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그 충심을 칭송하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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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記憶)에

알프레드(Alfred), 이 양반은 내 오랜 단골이지만 좀 골 아픈 손님이다. 그가 가지고 오는 세탁물이란 언제나 정장 예비군복 한 벌, 아니 대개는 바지 하나인데 늘 당일 아니면 이튿날 찾겠노라 한다. 지난 이십 수 년 간 한결같다. 여기까지야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올 때 마다 우리 내외의 시간을 턱없이 많이 빼앗곤 하기에 골 아프다. 그것도 매양 한가지 이야기로 그리 한다. 바로 한국에 대한 이야기다. 보다 정확하게 하자면 한국에 대한 그의 기억들이다.

그는 늘 한국전쟁 참전 기념 모자를 쓰고 다닌다. 아직도 걸음걸이가 꼿꼿하여 그가 칠십 년 전에  있었던 한국전쟁에 파병 되었다는 사실이 쉽게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허나 나이는 숨길 수 없어 최근 몇 년 이래 청력도 많이 잃었고, 정신도 이따금 오락가락이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모습 하나가 우리 부부를 만나기만 하면 이어지는 “내가 한국에 있을 때는….”하며 이어지는 이야기다. 우리 부부는 그의 칠십 년 전 사진들을 많이도 보았으므로, 그의 기억을 탓하지는 않는다.

어제만 해도 그랬다. 가게 카운터 옆 벽면에 걸어 놓은 내 가족 사진들 가운데 아내와 딸이 함께 있는 사진을 가리키며 그가 물었다.  “여기가 한국의 어디니? 내가 한국에 있을 땐 …” 나는 그의 말을 급히 잘랐다. “거긴 한국 아니고요. 뉴욕주에 있는 Minnewaska State Park에서 지지난 가을에 찍은 거고요. 저도 한국을 떠난 지 너무 오래 되어서요… 오늘 맡기신 제복 내일 찾아 가시려면 제가 일을 해야되서요…” 그렇게 그를 내어밀 듯 인사를 끝내었다.

칠십 년 전 한국에 대한 기억으로 한국을 이야기하는 알프레드나 일천 구백 칠십 년 대를 위주로 한국을 기억하는 내게나 오늘날의 한국은 그야말로 외국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기억의 파편 속에 남아 있는 내 모습이 피할 수 없는 나의 단면이듯, 알프레드와 내 기억 속 한국 역시 오늘날의 한국 모습에 닿아 있을 게다.

늘 절박하고 간절한 것은 ‘오늘 그리고 여기’이지만, 그것은 언제나 ‘어제 그리고 거기’와 연결되어 있다.

알프레드(Alfred), 그를 성급히 내어 밀어 낸 미안함으로.

이즈음 내 일터 아침은 내일을 꿈꾸는 부근 건설 노동자들이 열고 있다. 내 옛 세탁소 자리를 밀어낸 터 위에서.

기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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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하루

봄날 하루는 짧다.

손님들의 발길이 조금씩 잦아져 아침 영업시간을 팬데믹 이전으로 돌려 놓았다. 일년 넘게 느긋한 이른 아침 시간을 즐기다보니 어느 사이 게을러졌었는데, 이즘엔 거의 다 자란 모종들에게 아침 인사를 나누곤 일터로 나가기 바쁘다.

그렇다고 가게가 이전처럼 쌩쌩 돌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일하는 시간만큼은 할 일이 연속으로 이어진다.

여전히 손님들과 아크릴 판넬을 사이에 두고 서로간 마스크를 쓰고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목청이 높아지기 일수지만 어느새 그것도 그저 그런 일상이 되었다.

백신 접종율이 높아가는 만큼 확진자 수가 늘어간다는 어제 아침 동네 뉴스는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너나없이 바이러스에 대한 긴장이 느슨해 지는 탓일게다.

내 집안의 최고령이신 아흔 다섯 아버지는 일찌감치 접종을 모두 끝내셨고, 우리 부부와 아들 내외 그리고 내 형제들 모두 접종을 마쳤다. 제일 어린 딸아이가 이번 주에 예약이 되어있으니 일단은 가족 모두 접종은 마치게 되는 모양새다.

올 한 해 넘기기 전에 또 한번의 접종이 있게 될 것이고, 어쩌면 독감주사처럼 해마다 한 두차례 맞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허기사 독감주사를 맞기 위해 긴 줄을 이어서 기다리던 시절이 그리 먼 옛날 일이 아닌 것을 생각해 보면 이즈음의 북새통도 그저 사람들 살아가는 과정이란 생각도 든다.

바이러스 치료제 소식들도 종종 만날 수 있는 것 보면, 멀지 않은 어느 시간에 오늘을 옛 일처럼 이야기할 시간을 맞게 되리라.

하여 늘 조심할 일이다. 무언가 기다리는 시간에 드리는 기도는 늘 간절한 법이다.

오후에 텃밭과 뜰에 찾아오는 봄에게 인사를 나누다가 문득 눈에 들어 온 콩 새싹에 고목처럼 굳어진 내 가슴이 콩딱콩딱 뛰다. 몇 주전에 서리 내린 땅에 뿌렸던 씨앗들이 생명이 되어 내게 건네는 인사라니!

이른 봄꽃들과 인사도 나누고, 내 텃밭과 뜰에 오시는 새 손님들 맞을 준비에 봄날 하루는 참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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