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바퀴

귀바퀴에 있는 콩알만한 크기의 이물감을 느낀 것은 한 열흘 전 일이었다. 통증이나 가려움증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무심히 지나갔다. 그렇게 하루 이틀 콩나물 크듯 콩알만 하던 이물은 밤톨만한 멍울이 되어 내 한쪽 귀를 마치 당나귀처럼 만들어 놓았다.

엊그제 찾아간 가정의는 아무래도 전문의를 찾아 보는 것이 낫겠다며 이비인후과를 소개해 주었다.

오늘 찾아간 이비인후과 젊은 의사 선생은 가히 물건이었다. 경쾌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 그는 내 귀바퀴를 만지작 거리더니만 ‘짜내면 되겠군요, 간단한 일입니다.’라며 간호원에게 몇 가지 도구를 준비하라고 시켰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라고 묻는 내게 던진 그의 답이 나를 웃게 하였다. ‘글쎄, 나도 모르죠. 마스크를 오래 쓰셔서 그랬나? 아니면 잘 때 이 쪽 귀를 너무 누르고 주무신 건 아닌지?’하며 웃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 따라 웃었다.

‘조금 아플겝니다’라는 그의 주의를 확인이라도 하는 듯, 마취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는 내 귀바퀴 앞 뒤로  7개의  바늘 구멍을 낸 뒤 귀바퀴에 고인 물을 짜내었다. 그가 계속해서 묻는 ‘아프나?, 괜찮냐?’라는 물음에 짧은 통증보다도 웃음이 먼저 났었다.

‘다 끝났다’라는 말은 정말 거짓이었다. 정작 그와 간호원은 그 이후에 내 귀바퀴 앞뒤로 솜을 틀어막고 그것을 꿰메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젊은 의사가 정말 물건이었던 까닭은 그가 내게 건넨 항생 연고였다. ‘뭐 별거 아니었고요. 다음 주 화요일에 다시 오면 되고요. 이 항생 연고를 귀바퀴 주변에 바르세요.’라며 건넨 항생 연고는 그의 책상 서랍에서 꺼낸 쓰다 남은 항생 연고제였다.

b

사실 오늘 이비인후과에서 가장 많이 시간이 걸렸던 것은 내 신상에 대해 묻는 질문지를 작성하는 일과 의사를 기다리는 일이었다.

내 병력과 복용하는 약에 대한 많은 질문들과 가족 병력에 대한 물음들은 거의가 아직까지 나와는 무관한 질문들이었다. 그 순간에 느낀 감사가 아주 컸다.

그리고 이제 하루가 저무는 시간, 살며 만나지 않고 살면 좋은 직업군들인 판사 검사 변호사 의사들…

이젠 어쩔 수 없이 만날 가능성이 높아진 의사 앞에서도 늘 감사할 수 있는 날들을 이어갈 수 있기를.

너무 많은 소리를 거르다 피곤해진 내 귀바퀴를 달래며.

 

바람개비

서리가 하얗게 내려 앉은 봄날 아침이었다. 이상 기온이 아니라면 다시 겨울을 맞기까지 서리는 내리지 않을 것이지만, 언제 이상기온을 맞지 않을 때가 있었던가 싶다. 이즈음엔 더더욱.

텃밭농사 흉내에 재미 들려 이즈음 틈나면 작은 밭을 일군다. 오늘 첫 작물로 콩과 감자를 심었다. 먹을 거리로 생각하면 평소 소식(小食)인 우리 두 내외에겐 농사보단 사 먹는 것이 몇 배는 경제적일 것이다만, 재미란 경제논리와는 무관한 것일게다.

이즈음에 탐닉하고 있는 맛도 따지고 보면 그 재미 때문이다. 우연히 만들어 본 무장아찌 맛에 홀려 한 달 여, 매 끼니 함께 했다. 옛날 옛날에(?)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무장아찌 몇 젓가락으로 찬 밥 물에 말아 훌훌 넘기던 그 옛 생각 맛에 홀린 탓일게다.

아무렴, 사는 일이란 늘 진일보 하는 법. 양파, 샐러리, 파프리카, 당근, 고추 등속을 저며 달인 간장으로 장아찌를 담다.

완연한 봄날 오후를 맞아 어머니와 장모 장인에게 모처럼 문안 인사 드리다. 부활절을 맞는 장식들 중에 바람개비들이 눈길을 끌었다. 부활절과 바람개비. 이런 저런 저마다의 우김질들로 세상은 늘 시끌벅적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동서남북 어디에나 사람들 욕망은 늘 같다.

아내가 “이것 좀 봐!”라며 가르킨 어느 묘비명이었다. <LIVED AND LOVED WITHOUT HESITATION>

해 아래 그 어떤 삶이 제 맘껏 게다가 받을 사랑 다 받고 살다 간 사람이 있겠냐마는, 스스로를 그런 모습으로 기억해 주기를 바라며 마지막 순간을 맞은 사람에게 그렇게 그를 기억하며 남아 있는 단 한 사람만이라도 있다면…

봄날엔 찬 밥 한덩이 물에 말아 변변한 건건이 없이 장아찌 하나 얹어 훌훌 넘기는 한 끼도 감사다. 맘껏 살아보고 맘껏 사랑받는 시간에 대한 꿈을 꿀 수 있는 계절의 시작임으로. 겨울의 기억과 함께.

비록 바람 따라 도는 바람개비 꿈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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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맛

몸이 먼저 시간을 느끼는 나른한 토요일 오후, 손님 한 분이 빨래감을 맡기며 편지 봉투를 내어 민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 “내 미안한 마음을 담았는데…” 그렇게 봉투 하나 내어 밀고 내 가게를 나서는 그에게 영문 모른 채 그냥 웃음으로 주말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뜯어 본 편지 내용이다.

<아시안계 지역사회에 대한 추악하게 심한 편견과 인종 차별에 대해 당신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맞습니다. 한국과 중국은 다른 국가이며, 미국처럼 단지 몇 백 년이 아닌 수천년에 이르는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를 각각 지니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러하듯이) 제 고객들과 정치에 대해서는 절대 논의하지 않지만, 개인의 생명과 생계를 위협하는 사건들은 가벼이 무시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어쩌면, 피해를 입힌 다수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정보가(피해를 입힌 다수의 잘못된 행위를 널리 알린다면) 평화와 수용의 시대를 맞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간절히 바랄 뿐…>

며칠 전 아틀란타에서 일어난 한인들을 포함한 아시아계에 대한 폭력 만행 사건 소식을 듣고 보며 한국계인 내게 전하는 그의 속마음 인사였다. 그는 나보다 조금 아래 연배의 백인 사내였다.

편견과 인종 차별 뿐만이 아니라, 누군가의 아픔에 대해 공감하고 그 공감으로 연대하는 이들의 힘으로 세상은 느린 걸음이지만 늘 진보하는 것일게다.(나는 하나님의 나라로 가까이 가는 역사의 진행이라고 말하곤 한다만…)

우리 부부가 세탁소에서 느껴보는 삶의 맛이다.

내 뜨락에도 하루 사이에 봄 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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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개

다시 Daylight Saving Time으로 바뀐 아침이다. 봄이다. 여전히 마스크 없이는 집을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지만 봄은 어김없이 다시 왔다.

아침에 일어나 나갈 일터가 있음은 이즈음 내가 누리는 가장 큰 축복이다. 내 오랜 일터인 까닭이 우선이겠지만 내 세탁소에 대한 자부는 제법 크다.

델라웨어 대학이 있는  뉴왁시 한복판에 위치한 내 세탁소 주고객들에는 대학과 시관계자들이 많다. 대학 및 시 경찰 제복 세탁을 오랫동안 도맡아와 경찰출입도 꽤 잦은 편이다. 대학교 및 인근 뉴왁 고등학교 밴드복과 합창단 제복 등 역시 제법 긴 세월 내 세탁소 차지였다. 뉴왁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영업을 하는 세탁소로써 최선을 다한다는 자부를 갖는 기반들이다.

그러나 지난 해 3월 이래 일년 여 동안 학교 세탁물들의 서비스는 중단되었다. 학교가 문을 닫았고 학생들의 활동이 없었으니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팬데믹으로 하여 모든 사람들의 삶이 많이 바뀌었다만, 특별히 아직 교육을 받고 있는 초, 중, 고 학생들과 대학생들이 겪고 있는 팬데믹 시간들은 평생 잊지 못할 시간들로 남을 것이다. 그 어느 세대도 겪어보지 못한 장기간의 비대면 학습과 야외 및 단체활동의 제약 등을 겪어낸 아이들은 어쩌면 이제껏 보지 못한 아주 새로운 세대를 이룰 듯하다.

아무튼 그렇게 다시 맞는 봄이고, Daylight Saving Time이다.

엊그제 뉴왁 고등학교 관계자에게서 이메일을 받았다. 이메일의 첫 문장이다. ‘드디어 우리학교 밴드부 제복 세탁할 때가 되었습니다.’ 학생들을 맞을 준비로 기지개를 펴니 세탁물들을 수거해 가라는 것이었다.

물론 내가 다시 세탁물을 받아 서비스를 하게 된 것이 크게 기쁘지만, 그보다도 아이들이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 우리들의 일상이 이전으로 돌아가는 기지개를 켜는 것 같아 봄소식 치곤 최고였다.

내 집 뜰에는 지난 늦가을에 심은 구근들이 온 몸으로 기지개 피며 흙을 밀치고 나와 파랗고 붉은 움을 튀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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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다.

그 누구랄 것도 없이, 사람들 모두 너나없이 활짝 기지개 피며 힘이 솟는 봄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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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의 아침 하늘은 때론 경이롭다.

이른 봄날

하루 사이에 봄이 왔다. 새떼들은 벌써 아침 햇살을 타고 무리 지어 봄놀이 나선다. 봄과 아침 기운에 마음이 날아갈 듯 가벼운 것으로 보아 아직 괜찮은 나이다.

엊저녁 배운 들숨 날숨, 숨으로 몸을 다스리는 연습과 아주 작은 몸놀림으로 아침기운을 받는 운동을 하며 일을 시작하다. 살며 좋은 선생을 만나는 일은 내가 누리는 참 큰  축복이다. 춤꾼 김정웅 선생께 감사!

오후에 텃밭 가꾸기 준비하며 삽을 들다. 나무그늘 아래 잔설이 아직 겨울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지난 가을에 심은 구근들이 뾰족히 움을 틔어 언 땅 녹이는 봄이다.

봄엔 살아볼 만한 삶의 욕심들이 쌓인다. 하여 모종판도 계획없이 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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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맞이

응달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과 얼음들이 겨울이라고 우긴다. 허긴 내가 바깥 일 하기엔 아직은 이르다. 부지런한 농부는 아니므로.

내 직업인 세탁소에 봄은 부활절 즈음에 찾아오니 아직 이르긴 하여도 그래도 경칩(驚蟄)이 지났는데, 아무렴 봄이다.

바깥은 아직 이르다는 생각으로 내 방안 봄맞이 준비를 하다가 만난 시인 윤동주의 동시집이다. 윤동주의 동시집이 내 방에 꽂혀 있는 줄 모르다 만나니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1999년에 도서출판 <푸른 책들>에서  펴낸 시집이다. 아마도 2000년을 맞는 그 무렵에 뉴욕 서점에서 윤동주라는 이름에 혹해 내 방으로 모셔 온 시집이었을 듯. 내 방안에 있는 줄도 몰랐으니 미안하고, 오늘 시집의 책장을 넘기다 힘을 얻어 고맙다.

윤동주의 시 <새로운 길> 전문이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코로나 바이러스로 어수선했던, 아직도 어수선한 그 길에서 너나없이 모두 새로운 길을 걷고 있다.

그 길은 어쩌면 여전히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이는 길 일게다.

그럼에도 내가 만나는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아무렴!

하여 흉내일지언정 모종판에 흙을.

새 봄, 새로운 삶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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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

엊저녁에 참석했던 온라인 회의에서 있었던 일이다. 내가 어떤 직책에 이름을 걸어 놓은 유일한 단체인 <우리 센터(Woori Center> 정기 이사회 모임이었다. 자칫 딱딱한 분위기가 이어지기 십상인 모임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참석자들에게 던진 이사장의 첫 물음은 내겐 사뭇 도발적으로 다가왔다. 참석자들의 이즈음 근황을 물으며 던진 질문이었다.

“만일 한 달 여행이 가능하다면 가장 가고 싶은 곳은 어딘가요?”라는 물음이었다.

꿈을 꾸었었고, 꿈이 손에 닿은 듯 했었다. 더 나이 들어 먼 길 다니기 힘들어 지기 전에 아내와 함께 일년에 달 포 정도는 여행을 즐겨보자는 꿈이었다. 수 년 전에 그 꿈의 첫발을 내 디뎠고 몇 차례 여행을 즐기며 ‘다음은 어디, 다음은 어디’하며 꿈을 부풀리다가 부모님들이 눕기 시작하면서 그만 멈추고 말았다.

그렇게 지난 사 오 년 사이 장모, 장인, 어머니 순서로 떠나시고 이젠 아버지 수발로 먼 길 나서는 일은 그저 꿈으로 남았다. 게다가 이어지는 COVID 상황은 꿈이란 그저 품었을 때 아름다운 것일 뿐이라는 자족(自足)을 키워 내었다.

그런 내게 던져진 “만일 한 달 여행이 가능하다면…”이라는 질문은 모처럼 나를 흥분케 하기 충분한 것이었다만, 오늘 세탁소 일을 하며 가라앉힐 만한 크기였다.

며칠 전 아내와 함께  만기가 곧 다가오는 여권용 사진을 찍었다. 십여 년 만에 찍어 본 증명사진이었다. 운전면허용 사진은 디지털화 한지 오래 이고, 인화된 증명 사진은 단지 여권 갱신 때만 필요한 듯 하다. 앞으로 십 년 후는 또 어찌 변할지 모르는 일이고 보면, 살며 이제껏 찍었던 증명사진들만 놓고 보아도 세월의 변화를 가늠할 수 있을게다.

아내는 즉석에서 인화된 사진을 보며 도저히 자기일 수 없다고 몇 차례 놀램과 실망을 털어 놓았지만 아내답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나이에 상관없이 성별을 불문하고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 대한 이중 잣대는 사는 한 늘 차고 다니는 법일게다.

십년 만기 여권 갱신 서류들을 챙겨 보내며 내가 맞이 할 새로운 십년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을 즈음에 맞이한 질문, “만일 한 달 여행이 가능하다면…”에 자칫 혹 할 뻔 하였다.

어느새 여러 해 전이 되어 버린 시간에 맛보았던 환희에 가까운 여행의 맛 하나.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본 그림들이다. 그림에 대한 지식이나 이해는 거의 문맹에 가까운 내가 그저 가슴으로 느낀 희열이었다. 시대순으로 배열된 그림 속 얼굴들의 변화를 알아 챈 순간이었다. 중세에서 르네쌍스로 접어 들면서 그림 속 사람들의 얼굴엔 웃음기가 돌기 시작하였다. 그 변화는 내게 제법 큰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그 그림 속 얼굴들의 변화는 종교, 정치, 이념, 신념, 사상 등등 거창한 것들일랑 다 접고 사람 답게 사는 일이란 게 그리 큰 게 아니라는 가르침으로 내게 다가 왔었다.

그저 얼굴에 웃음 그리고 사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세상, 그게 바로 사람살이가 나아지는 세상이라는 배움을 얻은 여행이었다.

솔직히 이제껏 살아 온 시간들도 돌이켜보니 아는 것 처럼 느낄 뿐인데, 다가와  마주할 내일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다. 내게 여행의 꿈이 이어질런지, 새로 받을 여권에 몇 개의 도장들을 찍을 수 있을런지…

다만, 내 얼굴에 작은 웃음 잃지 않고, 마주 하는 이들에게 웃음기 전하는 시간 여행이라도 즐기며 살 수 있었으면…

여행에.

초대

내 어린 시절 기억들 중 많은 것들이  교회와 함께 한다. 서울 신촌에 있는 대현교회이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교회는 내 삶의 중심에 있었다.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새벽기도회에 나가는 일이 그저 당연했던 것으로 생각했던 어린 시절이었다. 그 무렵에 겪은 많은 이야기들은 접자.

새벽기도 대신에 명상과 선(禪)을 탐닉하게 된 것은 머리가 제법 굵어진 이후의 일이다.

이민을 와서 퀘이커 모임이 바로 집 앞에 있었던 까닭도 있었고, 어깨 넘어 함석헌 선생님께 배운 생각들도 있어 그 모임에 한 동안 함께 한 적도 있다.

이쯤해서 되돌아보면 새벽기도나 명상이나 선이나 퀘이커 예배방식이나 모두 신 앞에 홀로 선 나를 만나는 기쁨을 누리는 일이었다.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인근 한인들과 소수민족들의 인권을 위해 노력하는 <우리센터(WOORI CENTER)>가 COVID 팬데믹 상황에서 아직은 불안한 일상을 걱정하는 이들을 위해 작은 기쁨을 찾아 주고자 하는 노력을 보며 내 머리 속에 스쳐가는 지난 시간들이다.

필라델피아에서 내가 아는 유일한 춤꾼 김정웅 선생이 ‘호흡과 명상을 통해 몸과 마음을 돌보는 시간’을 나누고자 한단다.

다음 주 월요일(3월 8일) 부터 4월 12일까지 여섯 번 하루 45분씩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단다. 누구나 각자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그 시간을 함께 할 수 있단다.

눈으로 읽었던 책들을 접고 나도 함께 숨쉬고 움직여 볼란다.

http://bit.ly/breathingbo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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