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이틀 옛날 생각 속에 지냈다. 엊그제 금요일 밤에 참여했던 온라인 줌(zoom) 모임 이후로 오늘 까지다. 마침내 황해도 운율 땅 밟으셨을 백기완 선생을 기리는 해외동포들의 모임이었다. 이젠 웬만하면 먼 거리 모임은 자제하는 편이고, 그건 온라인 모임도 마찬가지지만, 선생의 부음을 듣고 내 머리속에 이어지는 ‘외로움’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위해 참석한 자리였다.
약 120여 명에 달하는 많은 이들이 미국내 각 지역을 비롯해 유럽과 일본 등지에서 함께 한 추모모임 이었다.예정된 추모행사에 이어 참석자들이 백기완선생과 만남의 기억들을 나누는 시간에 나는 슬그머니 그 자리를 떳다.
내게 1970년대는 아리고 아픈 세월이기도 했지만, 이제껏 내가 살아 온 시간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멋지고 더하여 신이 내게 주신 절정의 시간들이기도 했다. 내 나이 스물 무렵이었으므로.
서울 한복판 신문로 뒷골목, 순두부집 등 음식점들과 대포집과 생맥주 가게들이 어지러이 늘어선 그 골목 안 <백범 사상 연구소>를 지키고 계시던 선생은 그 때만 하여도 훤칠한 대장부 청년이셨다. 그 무렵 선생 곁을 지켰던 내 또래들은 이젠 부끄러운 모습으로 변했거나 모습조차 찾을 수 없다. 그렇게 선생과 외로움은 이어진다.
그리고 칠 십년 대 후반 몇 년간 잠시 가르침을 받았던 선생님들은 모두 떠나셨다. 문익환, 문동환, 안병무, 서남동, 김찬국, 송건호, 이우정, 이문영, 박현채 선생님들 모두 떠나시고 이제 백선생님도 가셨다.
해방 이후, 한반도 남쪽에서 통일, 민족, 민중, 민주 그리고 예수를 가르치며 고민하던 첫 세대의 마지막 사람도 이젠 떠났다.
그 선생님들 가운데 유독 ‘외로움’과 연결되어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선생이셨다. 백기완 선생님.
어느새 나도 이젠 칠십 대를 코 앞에 둔 나이. 그저 부끄러운 삶을 지우고 지워가며 다다른 1970년대의 삶과 만났던 이틀 동안의 시간들. 아무렴, 그나마 그 때 그 시간들이 그리고 그 선생님들과 만남이 있어, 오늘 요만큼 이라도 여기서 숨 쉬고 있는 것일게다.
<우리의 일상적 주변에서 ‘한’이라는 말의 머리에 있던 ‘원’자가 빠지게 된 것은 ‘원한’이라는 말을 똑바로 쓰기가 어려운 시대의 연속 속에서 원한의 뜻이 축소된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 중략- 그런데 내가 주의해서 관찰해 본 것은 이 원한이라는 말에는 반드시 ‘풀이’라는 동명사가 뒤에 붙어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무슨 말인가? 원한이란 본래 이를 풀지 않으면 원한일 수가 없다는 뜻이라고 해석된다.> – 백기완 선생 쓰신 <자주 고름 입에 물고 옥색 치마 휘날리며>에서
훨훨. 백기완 선생님이 품고 사셨던 모든 원한들이 풀어지는 그 세상을 꿈꾸며.
코로나 바이러스 덕에 아내의 파마(perm) 머리를 말다. 생각보다 덜 다투며 이루어 낸 작업인데… 나름 결과가 나쁘진 않다. 눈 녹는 오후의 공원을 걷다. 눈밭 발자국 찍기 놀이에 신나 하는 아내도 어느새 예순 중반이다.
양지 바른 곳, 햇볕 즐기던 텃새 한 마리 우리 내외 발자국 소리에 놀라 자리를 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