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understand…

“이 노래 기억나시나?” 아내가 유투브 영상을 하나 보여주며 건넨 말이다.

오늘 2020년 마지막 날, 아내와 나는 1970년대 서울 거리로 돌아가 ‘Auld lang syne’과 ‘I understand…’을 합성한 노래를 몇 번이나 되돌려 들었다.

우리 나이가 새삼스레 떠난 님에 대한 정이 그리울 나이도 아니거니와, 다시 돌와오기만 한다면 언제라도 기다리겠다는 어줍잖은 약속을 팔 나이도 아니기에 노랫말에 감흥한 것은 아니었고, 그저 그 노래가락 흥에 취해본 것이었다.

우리 내외 젊었을 무렵 이맘 때면 서울 거리 곳곳에서 아님 다방에서 흔히 들을 수 있었던 노래였다. 많이들 쫓아 부르기도 했었고.

이해, 이별, 사랑, 기다림, 변심, 그리고 다시 사랑, 이해.

그 대상을 연인이나 사람이 아닌 시간으로 바꾸어 곱씹어 본다. 이젠 아주 떠나가 버린 시간들, 내가 간절히 기다린다한들 다시 돌아 올 수 없는 시간들. 단지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을 곱씹어 이해하는 일. I understand, I understand. I understand…

I understand just how you feel
Your love for me, why not be mine?
It’s over now but it was grand
I understand, I understand

If you ever change your mind
Come back to me and you will find
Me waiting there, at your command
I understand, I understand

I miss you so, please believe me when I tell you
I just can’t stand to see you go
You know

If you ever change your mind
Come back to me and you will find
Me waiting there at your command
I understand, I understand

“I understand just how you feel. Let bygones be bygones. But always
remember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I understand

이렇게 또 한 해를 보낸다. 2020이라는 숫자.

그리고 신(神)이 예비해 주신 새로운 시간을 만난다. 돌아가신 송기득 선생께서 가르쳐주신 만남이다.

<희망이야말로 아픔을 극복하고 삶을 긍정할 수 있는 힘이다. 희망은 그대로 존재를 나타내는 용기다. 이 용기는 오늘의 아픔을 극복하고 내일의 새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생동력이 된다. 새 세계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거기에로 다가가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아픔은 자칫 <절망과 허탈속의 아픔>으로 끝내 버릴 위험이 있다. 우리의 아픔이 희망을 품기 위한 아픔, 창조를 이루어 내는 아픔이 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 위에 이외수선생의 가르침을 얹어본다. <희망은 품는 자의 것>이라는….

20년을 이해하며 21년을 품어보는 시간에.

일을 마치고 가게 문을 나서다 마주친 둥근 달 속에
도는 듯 다가왔다가 이젠 아주 떠나 버린 시간들이 머물고 있다.
그리고 빛.
빛의 크기와 세기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어두움 속을 걸어가야 하는 나그네에게.
달은 오늘의 축복이다. 희망을 품는.
비록 그믐이어도.
희망을 품고 산다는 것은 오늘에서 내일을 사는 일이다.
마주쳐 인사 나눈 둥근 달에게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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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2020

내 기억에 대한 정당함을 주장하는 떳떳함이 차츰 줄어들고 있기는 하다만, 단언컨데 최근 십 수년 이래 일반 가정들의 크리스마스 치장(治粧)은 올해가 단연 으뜸이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일반 가정들의 크리스마스 치장은 분명 줄어드는 추세였고, ‘Merry Christmas!’ 보다는 ‘Happy Holidays!’라는 인사가 보편화되어가는 느낌이었다.

글쎄, 내가 사는 동네에 국한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올 연말에는 크리스마스 장식을 한 집들도 많고 그 치장이 예년에 비해 사뭇 화려하다. 그 또한 다만 내 기분 탓 인지도 모를 일이다만.

너나없이 그야말로 지난(至難)했던 한 해를 마무리하며 종교적 의지가 강해진 탓도 있을 터이고, 집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많아지며 쌓인 이런저런 욕구들이 치장으로 분출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사흘을 쉬며 한 해를 찬찬히 돌아보는 시간들을 누리게 해 준 성탄절에 치장 대신 감사를 드린다. 한 해를 무사 무탈하게 지낸 감사가 이리 컷던 적이 있었던가 싶다.

조심조심하면서도 ‘설마…’하는 낙관이 늘 앞서 있었지만, 바이러스 확진 소식들을 가게 손님들과 먼 이웃들에게서 듣기 시작하고, 이즈음에 들어서는 가까운 이웃들과 내 가족들과 이어진 사람들에게서 듣다 보니 아직 무사 무탈함이 그야말로 큰 감사로 다가온다.

돌아보니 신기할 정도로 감사한 것은 가게 매상이 지난 해에 비해 반토막 이상이 줄었음에도 이럭저럭 한 해를 큰 걱정없이 보낸 일이다. 지난 주 내린 폭설과 강풍 탓에 뒷뜰 소나무 몇 그루가 부러져 넘어졌다. ‘돈 들일 일 또 생겼군’하는 걱정이 들 무렵인 지난 월요일, 바이러스 재난지원금 지급안이 국회를 통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쓰러진 나무들을 제거하는 데 드는 경비와 우리 부부가 받게 될 재난지원금이 얼추 맞아 떨어져 걱정을 금새 덜었다.

그래 또 성탄에 이는 감사다.

이즈음에 매일 페이스북에서 기다리며 읽는 글이 하나 있다. 한국의 진혜원검사가 올리는 페북 글이다. 그의 글은 우선 재밌다. 마치 골리앗 앞에서 물매를 돌리고 있는 다윗을 보는 스릴이 넘친다. 현실은 그저 스릴만 넘치는 연속 동작이어서 그에 대한 안타까움만 이어가며 읽기는 한다만.

아무튼 어제 그가 올린 <훗, 이게 인생이지>이라는 글에서 그가 단언한 말이다.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권력은 종교와 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떠올라 손에 든 것은 리차드 호슬리의 책 <크리스마스의 해방>이다.

크리스마스와 해방이라는 어찌보면 서로 맞붙어 싸우는 말이 하나가 된 이 책에서 호슬리는 예수의 탄생 이야기를 통해 참 예수의 모습을 찾는다.

바로 종교와 돈으로 신비스럽게 포장되고 치장된 크리스마스를 벗겨내어 해방시키고, 예수의 참모습인 ‘오늘 여기에서 고통과 걱정 속에서 살아가는 이야기의 주인공들’을 만나자는 주장이다.

리차드 호슬리의 주장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서의 인물 및 사건에 관련된 그들의 삶에 대한 공동체의 토론 가운데서 나타난다.>

어찌보면 갇힌 듯 모든 것들이 답답한 오늘이지만, 지난 시간들에 대한 감사와 다시 시작하는 새날들에 대해 희망을 버리지 않는 까닭은 바로 엇비슷한 고백들로 이어진 사람들이 늘 함께 하기 때문이다. 종교와 돈을 쫓고 누리되 권력이 되고자 하는 일에는 물매 들고 싸우는 이들.

그렇게 또 한 해가 저무는 성탄에.

 

얼음꽃

쌓인 눈 치울 때면 ‘이젠 이사 가야겠다’라는 맘이 솟구친지도 여러 해 되었다. 함박눈 펑펑 쏟아지다 비로 변하더니 새벽녘 다시 눈이 되어 내려 덮은 드라이브웨이는 두꺼운 얼음판이 되었다.  가늠했던 시간에 두 배를 쓰고서야 눈과 얼음을 치웠다. 행여 허리 다칠세라 조심 조심… ‘에고 이젠 이사가야겠다’라는 맘 절로 들다가 눈에 들어 온 만개한 얼음꽃들. 잠시 그 아름다움에 취하다.

똑같은 일상, 똑같은 풍경인데 하늘님 내쉰 입김 하나로 내 변덕은 널뛴다.

한낮에 나선 일터로 가는 길도 새롭다. 흐음… 내일이면 또 다시 그저 시쿤둥한 일상이겠지만.DSC01493A DSC01495A DSC01499A DSC01500A DSC01502A DSC01503A DSC01512A DSC01513A DSC01514A DSC01515A IMG_20201217_110312172_MP-A IMG_20201217_110608507_HDR-A

첫눈

첫눈 내리다.

아기 주먹만한 함박눈이 펑펑

눈송이들이 내 시름들을 다독이며 덮다.

소리 없는 세상을 즐긴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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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움에

아내와 나는 많이 다르다. 달라도 너무 많이 다르다. 그래도 부부인데 그것도 마흔 해 넘은.

닮은 곳들을 찾아보지만 교집합의 크기는 보잘 것 없이 작다.

서로 딱 맞게 닮아 이제껏 부부의 연을 이어 온 큰 까닭 하나 찾자면, 남과 비교하거나 빗대어 놓고 우리들의 삶을 꾸리지 않았다는 것일게다.

아내에게 그런 성정이 깊었다면 애초 나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을 터이다. 생전 울 어머니 말씀마따나 아내가 남과 비교하기를 좋아하는 성정이었다면 나는 열 두번이나 홀아비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게다.

물론 나 역시 나 밖에 볼 줄 모른다.

우리 부부의 교집합이 이루어지는 만남이다.

더더구나 이 나이에 이르니 ‘누군가가 부러워지는’ 시간은 거의 없다. (과했나?)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우리 부부에게 참 부러운 사람 하나가 다가왔다. 시인 강남옥이다.

그의 세번 째 시집 <그냥 가라 했다>를 받은 것은 지난 주였다. 시집을 받자 마자 후루룩 넘기다 내 눈에 꽂힌 시는 <쌀과 꽃>이었다.

<쌀과 꽃> 을 관통하는 시어는 ‘값’이었다. 바로 가치, 삶의 가치였다.

오늘 저녁, 찬찬히 그의 시편들을 곱씹다 울컥하니 부러움에 빠지다. 가히 도발적이라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은 그의 시어들이 가  닿은 곳들은 사람들이었고, 그 곳엔 깊은 사랑이 함께 하였다.

남의 가게 일 도우시는 한국 분을/ 필라델피아 시내로 모셔다드린 적 있다/ 그분은 시청에서 자동차로/ 40분쯤 걸리는 곳에 사셨는데/ 필라델피아에서만 15년 사셨다 했고/ 15년 만에 시내는 처음 가 본다 하셨다

20년쯤 전의 일이다

그의 시 <슬펐다>이다.

40, 15, 20이라는 숫자들이 말하는 거리와 시간들은 그에게 그저 거추장스런 치장일 뿐이다. 일상에서 누려야하는 마땅한 일들이 처음인 사람을 마주하는 그의 슬픔은 옛 고향에서 부터 이민, 그 역시 떠나온 고향처럼 빠르게 변하는 이민의 땅에서 수시로 이어진다.

그렇게 그의 시편들은 사람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이어진다. 부고(訃告)와 무고(無故) 사이에 놓인 모든 사람들을 향해.

모를 일이다. <그냥 가라 했다>는 시집 이름이 그의 생각인지는.

단언컨데 그에게  <그냥 가라>할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게다. 사랑 한 줌 받지 않고서는.

남도(嶺이건 湖이건)말이 부러운 서울 촌놈의 열등감을 그가 헤아릴지는 모르겠지만.

부러움으로

그의 시집에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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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
우리들의 적은 카크 다글라스나 리챠드 위드마크 모양으로 사나웁지도 않다
그들은 조금도 사나운 악한이 아니다
그들은 선량하기까지도 하다
그들은 민주주의자를 가장하고
자기들이 양민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선량이라고도 하고>

일요일 아침 느긋하게 밀린 뉴스들을 훑다가 느긋함이 분노로 바뀔 즈음 떠오른 김수영의 시 <하······ 그림자가 없다>의 시작 연이다.

제법 긴 그의 시 마무리다.

<우리들의 싸움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 있다
민주주의의 싸움이니까 싸우는 방법도 민주주의적으로 싸워야한다
하늘에 그림자가 없듯이 민주주의의 싸움에도 그림자가 없다

하······그림자가 없다
하······그렇다······
하······그렇지·····
아암 그렇구 말구······그렇지 그래······
응응······응······뭐?
아 그래······그래 그래.>

뉴스를 덮고 뒷뜰 떨어진 나무가지들 그러 모으며 봄을 구상하다. 곧 눈이 많이 내리고 춥단다.
오후에 아내와 딸과 함께 동네 공원을 걷다.
언제적 김수영이었던가? 환갑 세월이 흘러도 역사의 적들은 그림자가 없다.

그래도 많이 나아졌지?
아암 그렇구 말구······그렇지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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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일기

장모 기일을 기리며,  당신 자손 모두가 함께 얼굴 마주할 시간을 갖게 된 것은 이즈음 비대면 세태 덕(?)이라 할 수 있을 터이니 삶의 역설이다. 그렇게 서울 사는 두 처남네 식구들과 필라 아들 내외와 모처럼 집에 온 딸애와 우리 내외 모두 함께하는 시간을 누렸다. 장모 떠나신 지 사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마침 아내의 생일 직전이기도 하여 두루 감사였다. 비록 그것이 온라인 모임일지언정.

조촐한 가정 예배를 드리며 단지 나이가 가장 많다는 까닭으로 하여 몇 마디 말을 가족들과 함께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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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렇게라도 얼굴들 볼 수 있으니 우리 모두 감사한 오늘이야! 세월이 빠르다는 소리는 너무 많이 들어서 진부하지만 어찌 보면 늘 새로워.

2020년이라는 시간은 어쩌면 인류사에 있어 아주 독특하게 남을 한해가 될 것 같아. 나는 물론이거니와 오늘 함께 한 모두가 처음 겪어보는 시간들이었지. 이제껏 전 세계인들이 함께 두려워 했던 것이 전쟁이었다면 올 한해는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그걸 뛰어넘는 새로운 경험을 해본 것일게야.

자! 이쯤 우리들의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구.

내가 지금 보여주는 몇 장의 사진들은 우리들의 어머니이자 할머니인 최용옥 할머니가 남겨놓은 일기장이야.

찬찬히 보라구. 매일 매일 일기의 글은 매우 짧아. 그런데 매일 매일의 일기에 똑 같이 반복되는 문장이 하나 있어. 자! 찾아 보자구.

맞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바로 그 말이야.

내가 가지고 있는 할머니의 일기장은 처음 할머니가 암이라는 판정을 받은 후부터 돌아가시기 몇 달 전 펜을 들어 글을 쓸 수 있을 때까지의 하루 하루 아주 짧은 생각들이 담겨 있어.

할머니의 마지막 몇 년 동안 기록에는 몇 가지 일관된 이야기들이 있어.

첫째는 이미 말했듯 감사야. 하나님에 대한 감사인데 나는 그걸 시간에 대한,  삶에 대한 감사로 읽고 있어. 할머니에 대한 감사를 어떻게 읽고 해석하든 모두 너희들 몫이겠지.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 읽고 쓰고 말하고 숨쉬는 순간이 그저 감사라는 할머니의 생각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지.

둘째는 할머니의 일기에는 그 누구에 대한 원망이나 누구의 흉도 없어. 얼핏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결코 이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오늘 함께 한 우리 모두에게 최용옥 할머니가 남겨주신 큰 교훈이라는 생각이지. 살며 누구에게 대한 원망도 품지 말고 흉보지 않고 사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할머니 흉내라도 내고 살면 좋겠어.

세째는, 두번 째에서 내가 누구에 대한 원망이나 흉 없다고 했지만 딱 한 사람 예외가 있었어. 때때로 흉도 보고 원망도 한 딱 한 사람. 바로 남편인 이영제 할아버지였어. 이건 아주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태도였다고 나는 생각해. 살며 흉보고 원망하는 사람 하나 없다면 뭔 살 맛이 있겠어. 부부란 그런 것 아닐까? 원망과 흉을 품을지라도  함께 살 수 있는 유일한 관계가 바로 부부라는 생각 말이지. 물론 이즈음 세상은 많이 바뀌었지만 난 부부사이에 대해 최용옥 할머니가 느끼고 남긴 말에 많이 동감하는 편이야.

어때 이쯤, 최용옥 할머니가 우리에게 남겨 준 유산이 뭔지 생각해 보자구.

감사와 사랑 가족. 나는 그렇게 정리해 보구 싶어. 매우 성서적이지.

최용옥 할머니는 그렇게 살았고 우리더러 그렇게 살라하는게 아닐까?

자! 우리 모두 최용옥 할머니에게 감사하자구.

–            장모 4주기에


 

Well! It is a grateful day today, as we can see each other like this. Though the expression, “Time flies!” is a cliché as we’ve heard so many times, it always seems new in some way.

Perhaps, the year 2020 will be remembered as a very unique year in human history. All of you, as well as I, have never experienced a year like this. If what human beings fear most thus far has been a war, all the people in the world may have been experiencing something even more fearful this year.

Now, let’s talk about your grandmother.

These pictures which I’m showing you now are those of the diary which Mrs. Choi Yong-ok, our mother and your grandmother, left.

Look at them slowly and carefully. What she wrote each day was short. But, one sentence appeared repeatedly every day. Well, let’s find it.

Right! “Lord, thank you.” That’s exactly it.

Grandmother’s diary, which I keep, held very short thoughts of hers each day from the time when she had been diagnosed with cancer to the day when she could not have held a pen any more, just a few months before she passed away.

What Grandmother wrote during her last some years showed some consistent and prominent features.

The first was gratitude, as I said before. Though it was gratitude to God, I’d like to read it as gratitude for time and for life. Of course, it is up to you how her gratitude may be read and interpreted. However, I hope that you won’t forget Grandmother’s thought that every moment, whether reading, writing, speaking or breathing, is to be grateful for, no matter how you read and understand.

The second was that Grandmother had never written resentment at anyone or found fault with anybody. It could be passed easily as nothing unusual without notice. But it is not really so easy to do so. I think that it is a very precious lesson which Grandmother, Choi Yong-ok, left to all of us gathered together today. I know that living without holding resentment at and finding fault with anybody is not easy. But I hope that I will be able to imitate her, if not living like her.

Though I said earlier that Grandmother had never revealed any resentment or someone’s faults in her diary, there was only one exception. Who she resented from time to time was her husband and your grandfather, Lee Young-je. In my opinion, it was quite natural and commonsensical. How can a human being live, if he/she has no one to resent at or to find fault with? Isn’t the relationship of husband and wife like that? Yes, the world has changed a lot. But I empathize a lot with what Grandmother, Choi, Yong-ok had felt and left about the relationship of husband and wife.

Now, how about thinking about the legacy which Grandmother Choi, Yong-ok has left us?

Gratitude, love and family. I like to summarize it like that. It appears very biblical.

Grandmother, Choi, Yong-ok lived her life like that and she wanted us to live our lives like that, too. Don’t you think so?

Well! Let’s thank Grandmother Choi, Yong-ok together.

– The Fourth Anniversary to remember the late Mother-in-law

살아남기

1.

지난 주 바이러스 하루 확진자가 천명 가까이에 이르자 주지사는 주민들에게 “집에 머물라(stay-at-home)”는 명령을 재개하였다. 비록 강제 명령이 아닌 권고성이라 할지라도 현재 상황이 얼마나 절박한지를 알 수 있는 소식이다.

백 만명이 사는 지역에서 하루 천명에 가까운 확진자가 늘어난다는 사실은 가히 공포다. 다행히 엊그제 사이 하루 칠백 여 명으로 숫자가 줄기는 하였지만 그 공포의 도가 줄지는 않는다.

그렇다 하여도 도로를 달리는 차량 수를 보면 여느 일상과 전혀 다름없고, 나 역시 아침이면 세탁소 문을 연다. 내 가게 문을 들어서는 손님 숫자는 아직 공포에 이를 만큼 줄지는 않았지만 또 다시 뜸해진 것을 느끼기엔 충분하다.

이즈음 사정을 두루 잘 아는 내 오랜 단골 하나가 지난 주에 내게 건넸던 말이다. ‘사는 놈이 이기는거지! 세탁소를 드나드는 손님들 총량과 빨래감의 총량은 당연히 줄겠지. 그러다보면 하나 둘 문을 닫겠지. 그럼 남는 놈이 줄어든 손님들과 빨래감들을 차지하겠지. 그래 그렇게 사는 놈은 결국 산다니까. 염려말라고 친구!’

나는 그냥 웃었다.

2.

두 주 동안 딸아이는 격리생활에 철저하였다. 두 주 전 맨하턴에서 차 뒷자리에 탄 아이는 내가 마스크를 벗자 아무말 없이 뒷 창문을 열었다. 나는 움칠했었다.

그렇게 아홉 달 만에 집에 돌아온 아이는 집안에서 우리 내외하곤 거의 격리 상태로 지냈다. 나는 아이의 생각에 따랐다.

그리고 오늘 아이와 함께 ‘에고 제 시집가는거 보고 죽으면 다 이룬건데…’ 그 욕심 채우지 못하고 가신 어머님 찾아 뵙다. 어머니 가신 후 딸아이와는 오늘 첫 만남이다.

‘할머니 옆에 내 자리, 그 옆에 네 엄마 자리…’운운하는 내게 아이는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어머니와 장인 장모에게 성탄장식으로 계절을 알리다.

살아남는 것은 내가 아니다. 나를 기억하는 누군가가 살아남는 것이다. 그 역시 시간에 달린 일이지만.

3.

좋은 글들을 만나면 아직은 가슴이 뛴다.

<검찰 독립성의 핵심은 힘 있는 자가  힘을 부당하게 이용하고도 돈과 조직 또는 정치의 보호막 뒤에 숨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난 주 대한민국 법무부 장관 추미애가 그의 페북에 올린 글 첫 문장이다. 나는 인류 역사가 진보하는 과정에서 숙성된 오랜 물음에 대한 선언으로 읽었다.

종교, 정치, 경제, 문화 등등 모든 권력과 제도가 마땅히 지켜 나가야 할 저지선을 굳건하게 만들고 지켜 나가는 일이 바로 그저 하루를 작은 욕심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살아남기 선언일 게다.

4.

오후에 두 시간 반 먼 여행길을 다녀 오다. 한국 EBS 방송 <세계 테마 여행 : 천상의 왕국-부탄>편을 넋 놓고 즐기다.

부족함을 넉넉함으로 느끼며 사는 삶과 넉넉함에 욕심을 더하는 삶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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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에

십 수 년 동안 한국관련 뉴스 하고는 거의 담 쌓고 살던 때가 있었다. 내가 의도했던 바가 전혀 없지는 않았으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물리적으로 한국 소식을 접할 기회가 정말 적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그리 살 수 밖에 없던 때였다. 컴퓨터니 인터넷이니 하는 물건이나 기능들이 아직 나와는 낯 선 때였고, 한국 소식을 들으려면 필라델피아나 뉴욕 또는 워싱턴 나들이를 해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전두환 시대가 끝날 무렵부터 김대중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나실 즈음까지의 한국 소식은 언제나 내겐 낯설다.

그러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이르러 거의 실시간으로 한국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 무렵 내게 다가온 한국은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박정희가 피살되어 그의 장례가 있던 날, 광화문 일대를 메우고 통곡하던 국민들이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세우는 시민이 되어 내게 다가온 세상은 그야말로 경이로운 새 세상이었다.

세상이 워낙 빠르게 변하다 보니 이젠 내가 서울에 사는 것인지, 미국 촌구석에 사는 것인지 모를 지경에 이르렀다.

내 손 전화 뉴스 알림 기능은 실시간으로 내가 사는 동네 소식부터 우리 주 소식과  미국내 소식 나아가 한국 소식들을 속보로 알려주는 세상이 되었다.

그렇게 내가 실시간으로 소식을 접하기 시작한  그 무렵부터 그렇게 빠르게 변했던 한국의 변화는 더디거나 뒷걸음 치기 일수였다.

빠른 소식으로 변화는 그렇게 너무나 더디어졌다.

오늘 그 더딘 변화에 대한 답답함 끝에서 떠오른 생각 하나.

변화는 언제나 답답한 걸음으로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지만, 그 변화를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것은 나에게 달린 것이라는.

내가 한국 소식에 한참 민감했던 십 수 년 전 어느 날,  우연찮게 잠시 마주쳐 인사 나누었던 추미애라는 사람은 나처럼 작고 연약했지만, 그가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었음에도 겸손하고 당당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가 웃음으로 새로운 변화가 이는 한국 소식을 기다리며.

오늘 따라 하늘에 구름이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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