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세탁소 카운터에는 막대사탕을 담은 작은 나무접시가 하나 있다. 나무접시는 족히 30년 넘게 우리 부부와 함께 했다. 나무접시에 담긴 막대사탕을 즐기던 아이들이 이젠 중년이 되어 내 세탁소를 찾기도 한다.
올들어 역병 탓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세탁소를 찾는 이들은 매우 드물다. 그래도 막대사탕을 담은 접시는 금새 비어지곤 한다. 이즈음 막대사탕을 주로 집어가는 이들은 노인들이다. 이따금 나보다 족히 세 배는 됨직한 젊은 친구가 사탕 두세 개를 한 입에 넣어 빠그작 소리를 내며 씹을 때면 그 둔한 몸은 전혀 아니지만 그의 건치(健齒)에 이르면 여간 부러운 것이 아니다.
지난 몇 달 사이 내 눈에 밟힌 노인 손님 한 분이 있다. 평소 내가 카운터를 보는 일은 매우 드물어 오랜 단골 손님들 빼고는 기억하는 손님들이 그리 많지 않다만, 이즈음엔 한가한 탓에 카운터를 차고 앉아 있는 경우가 많다.
노인이라고 했지만 내 또래 거나 몇 년 더 산 정도인 사내는 늘 나만큼 허름한 모습으로 두 주에 한 번 꼴로 내 가게를 찾는다. 들고 오는 빨래거리라고는 언제나 달랑 셔츠 두 장이다. 사내가 눈에 띤 것은 막대사탕 때문이었다. 다른 일을 하다가 그를 맞기 위해 카운터로 다가서는데 그는 흠칫 놀라는 모습이었다. 그 땐 잘 몰랐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내 세탁소에 올 때 마다 막대사탕을 한 줌 주머니에 넣곤 하는 것이었다. 한 줌이라고 해 보았자 대 여섯 개 정도일 터이다.
어차피 오는 손님 누구나 원하면 집어 가라고 놓아 둔 것이므로 몇 개를 집어가든 상관할 바 아니데, 문제는 그가 내 눈치를 본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난 이후 나는 그가 가게로 들어서면 그를 위한 틈을 만들어 주곤 한다.
모를 일이다. 그가 사탕을 좋아하는지, 병든 아내를 위해 챙기는 것인지, 손주 녀석들 생각으로 그리 하는지, 내가 또 알면 뭐하랴. 사탕 몇 개로 그가 잠시 삶에 단 맛을 얻을 수 있다면 좋은 일일 터.
누군가 접시채로 막대사탕을 다 집어간들 또 다시 채울 수 있는 부요함은 아직 누리고 사니 그저 고마운 오늘이다.
나이든다는 것은 소소한 고마움들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뜻일게다.
아내와 함께 가을 길을 걷다. 먼 길 나서지 않아도 우리 내외가 넉넉히 즐길 수 있는 가을 풍경이 놓인 오늘의 삶에 또 고마움이 인다.
곰곰 생각해 보니 늘 허름한 내가 막대사탕 하나를 온전히 다 먹은 기억이……
……없다.